선담의 이해 세상을 규율하는 근본은 인과율이다. 사건에 대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이다. 인간의 관심은 언제라도 결(結)을 지향한다. 반드시 잘못되고 만다. 기(起)에 주의해야 한다. 결과가 아닌 원인을 주목해야 한다. 끝단이 아닌 시작을 살펴야 한다. 기(起)가 문이라면 결(結)은 답이다. 기는 만남이다. 사건은 어떤 둘의 만남에 의해 기(起)하고, 둘의 활동과 대칭에 의해 승(承)하고, 그 대칭된 둘을 한 줄에 꿰는 소실점에 의해 전(轉)하고, 여기에 에너지를 투입하여 공간의 모순을 시간으로 틀어 해소하면 결(結)로 끝난다. ◎ 원인 - 결과 ◎ 질문 - 대답 ◎ 시작 – 결말 ◎ 상부구조 - 하부구조 ◎ 질 – 입자 – 힘 – 운동 - 량 ◎ 기 – 승 – 전 – 결 인생을 묻는다면 탄생이 원인이고 죽음이 결과다. 탄생이 기(起)라면 죽음은 결(結)이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하다. 뒤집어야 한다. 결에 서서 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죽음에 서서 탄생을 바라보아야 한다. 결과에서 원인을 바라보아야 한다. 답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답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원인이 문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빵점을 맞는다. 빵점이 나온 성적표가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내가 태어남으로 인하여 모든 것은 비롯되었다. 태어난게 원인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따위는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과연 내가 태어났는가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세상과 충분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완전하지 않다. 나의 탄생은 완전하지 않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탄생이 문제다. 출발점이 문제다. 만남이 문제다. 불완전한 탄생, 잘못된 만남, 비뚤어진 관계가 문제다. 바로잡아야 한다. 탄생을 바로잡아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떤 것은 돼지로 태어나고 어떤 것은 개로 태어난다. 어떤 이는 왕자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공주로 태어난다. 나는 무엇으로 태어나는가? 나는 나로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충분히 나로 태어났는가? 나는 충분히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만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관계맺지 않았다. 나는 충분하게 내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주체다. 나는 충분히 가치판단하지 않았고 의사결정하지 않았다. 내가 덜 나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내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내가 무엇과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내가 얼마나 나인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사건은 시작된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선문답은 묻고 답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질문에서 답변을 바라보므로 실패다. 답변에서 질문을 바라보아야 한다. 선문답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정답이 있다. 질문의 반대쪽 정답 포지션에는 정답이 없다. 거꾸로 질문 포지션이 정답이 있다. 선문답은 문제에 대해 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답에 대해 문제를 조직해내는 구조이다. 상대의 답을 듣고 거기에 맞추어 문제를 조직하므로 무조건 질문하는 쪽이 이긴다. 문제와 답 사이에 결이 있기 때문이다. 조형적 질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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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와 답 사이에 성립하여 있는 조형적 질서를 안다면 문제를 듣고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듣고 거기에 맞추어 문제를 조직할 수 있습니다. 멋대로 꾸며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그러합니다. 멋대로 룰을 바꾸어 버리는데도 그럴수록 더욱 칭송을 듣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고 하더라도 알고 해야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세계가 열립니다. 무조건 자신이 이기도록 세팅되어 있는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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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달을 만들지 말자.
그러면 달이 뜨지도 지지도 않을테니...
그 자체로도 세상은 밝으며 완벽하다.
예술이란 마음의 드러남이지만 완벽의 훼손이다.
흰도화지, 큰 돌덩어리 자체가 이미 완벽이다.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라 행위 자체에 스스로 완벽을 만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