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을 보고 ‘질의 관점’이냐 ‘입자 관점’이냐? 구조론은 ‘질의 관점을 얻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팀의 관점이다. 팀으로 보면 대중이 싫어하는 캐릭터인 낸시랭, 강의석, 한비야도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좀도둑질의 달인과 성대모사의 달인을 식객으로 거느렸던 맹상군의 구도계명과 같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골치 아픈 괴짜나 사고뭉치라도 팀의 관점에서 보면 다 써먹을 데가 있다. 명심하라. 우리는 팀이다. 당신이 감독이면 어떤 선수를 모아 팀을 꾸릴 것인가? 유능한 감독은 말썽쟁이선수, 괴짜선수, 피부색이 다른 선수도 잘 다스려낸다. 능력이 있는데 성격이 더럽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감독은 역량이 없는 거다. 동기부여로 풀 수 있다. 인간이 실패하는 이유는 타인과 비교하는 콤플렉스로부터 동기부여 되기 때문이다. 야구선수들이 연봉협상때 ‘자존심 세워달라’는 괴상한 요구를 하는 것이 그렇다. 그게 입자 마인드다. 질의 마인드로 바꿔주면 된다. 뛰어난 감독은 팀의 관점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외부와 비교하지 않고 내적인 동기부여에 성공한다. 김병현이 넥센으로 온 것은 그런 면에서 동기부여가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팀으로 보면 김병현은 고참 중에서도 주장급이다. 넥센에서 김병현은 단지 야구만 할 수 있는게 아니라 그 이상의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고향팀 감독으로 온 선동렬 감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곳도 아닌 고향팀이니 팀의 관점에서 접근하기가 편하다. 선수단 장악이 더 쉽다. 그렇다면 문제아 최희섭도 간단히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지난해 초 리더십 없는 최희섭에게 주장을 맡긴 것이 잘못이었다. 팀과 융화되지 못하고 헛도는 바퀴가 된 것이다. 이런건 차동장치로 간단히 해결된다. 차동장치의 유성기어는 겉도는게 오히려 잘 도는 것이다. 문제 안에서 해결하려 드는건 바보들의 방식이다. 문제에 고여있는 에너지를 빼버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최희섭을 붙잡아놓고 인성교육시키려 든다면 최악이다. 성격 그대로 두고 필요한 때 써먹는게 맞다. 최희섭 대 선수단의 내적 갈등구도를 코칭스태프 대 선수단의 외적 긴장구도로 변경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유능한 리더는 끝없이 새로운 긴장구도를 세팅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갈등구도를 밀어낸다. 면모일신하고, 분위기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목표를 바꾸고, 선수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방법을 쓴다. 무엇보다 입자 마인드를 극복해야 한다. 입자 마인드에 빠져 있으면 자신을 사건에 개입시킨다. 대중이 연예인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렇다. 연예인에게서 모범을 기대하고 롤모델을 찾으려고 한다. 팀이 아닌 자신에게 뭔가 플러스 되는 것을 기대하는 태도. 바보다. 연예인은 감독도 아니고 선수도 아니고 기껏해야 응원단장 정도다. 연예인 역시 팀의 일원일 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팀에 보탬이 되는가를 생각하라. 연예인은 사고를 쳐서 우리 사회를 긴장시키는 역할이다. 얌전한 연예인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 전혀다. 필자는 일관되게 사고치는 문제 연예인을 옹호해 왔다. 사고뭉치 괴짜들이 우리 사회의 내부 상호작용을 늘려 건강한 긴장을 조성한다. 미꾸라지가 든 수조를 폐사없이 운반하기 위하여 메기를 넣어두듯이. 차의 흔들림과의 대결구도를 메기와의 대결구도로 바꾼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을 보이는 적과의 싸움으로 바꾼다. 드러나지 않는 잠복한 긴장을 겉으로 드러내어 미리 폭파시키는 것이 고수들의 할 일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는 관점도 그렇다. 팩트로 보면 이는 단순히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를 테러한, 혹은 위협한 사건이다.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 판사에 대한 위해는 이탈리아 마피아나 하는 짓이다. 그렇게 팩트만 보자는게, 질이 아닌 입자로 보려는게 진중권류 쓰레기들의 마인드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봐야 한다. 왜 김명호 교수는 석궁을 쐈을까? 간단하다. 누구라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피아노줄을 보면 건드려서 소리내고 만다. 그곳이 대한민국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김명호 교수 자신은 지극히 보수적인 인물이다. 영화에 묘사되고 있듯이 ‘법대로’만 주장하는 사람이다. 진중권이 ‘팩트대로’만 주장하듯이. 이는 유아적인 발상이다. ‘뭐뭐만 하면 돼.’ 하고 자신의 역할을 좁히는 것이 전형적인 보수꼴통 마인드다. 히딩크는 그렇게 뒷짐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했다. 그는 철저히 개입했다. 히딩크는 그라운드에 물 뿌려놓기 등의 꼼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명박의 꼼수에는 우리쪽의 꼼수로 되받아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대로 된 감독이라면 ‘나는 뭐뭐만 할거야.’ 하고 제 역할을 제한하지 않는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20여년 지켜본 바로는 감독이 ‘우리팀 아무개 선수가 잘해줘야 이길 수 있어.’하고 말하는 팀은 항상 지더라. 양승호 감독이 ‘이대호가 홈런을 쳐야 이기지.’ 하는 것 보고 질 줄 알았다. 어떤 틀을 정해놓고 끼워맞추는 식의 사고를 하면 잘못되고 만다. 반대로 밑바닥의 에너지 흐름을 조율하는 사람은 승리한다. ‘법은 아름다운 거야. 법대로만 하면 다돼.’ 이거 유치발랄한 보수꼴통의 사고이다. 진보적인 판사라면 법대로만 판결할 것이 아니라 판례를 바꾸어 잘못된 법이 바뀌도록 재촉해야 한다. 법을 고정시켜 놓고 인간이 법에 행동을 맞춘다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 사회는 낙후해지고 만다. 활동반경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는게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는 것과 같다. 노인네들은 몸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옷에 몸을 맞출 수 있지만, 자라나는 청소년은 몸이 매일 변하므로 옷에 몸을 맞출 수 없다. 옷에 몸을 맞추자는 생각은 결국 노인네의 편의주의에 불과하다. 진중권의 팩트지상주의 역시 먹물편의주의에 불과하다. 뭐가 팩트인지 대중은 모른다. 진중권이 ‘이게 팩트다’고 외치지만 대중은 믿지 않는다. 대중이 모르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 대중은 불신한다. 대중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다. 그것은 에너지의 절대량이다. 밑바닥에 에너지가 고여있고 건드리면 터진다. 대중은 그것을 보고 열광한다. 김어준은 폭탄냄새를 맡는 능력이 있다. 어디에 에너지가 고여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을 건드리는 방법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어떻게든 도화선에 점화만 해주면 기폭되고 만다. 그 다음은 한나라당의 자체팀킬. 정리하자. 인간은 변한다. 어린이의 몸이 자라듯이 사회도 자란다. 법도 변해야 한다. 법과 인간 사이에도 끝없는 긴장이 조성되어야 한다. 긴장을 거부하고 법에 혹은 사회의 어떤 고정된 룰에 인간을 맞추려는 자가 보수꼴통이다. 팩트로 보면 김명호 교수는 단지 사법부에 테러를 한, 혹은 테러에 준하는 시위를 한 인물에 불과하지만 본질로 보면 김명호교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민감한 성감대를 본능적으로 건드려버린 것이다. 이는 의거다. 이는 인간의 진화를 추동하는 본능 때문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무엇인가? 에너지가 한 곳에 고여 있다면 그것이 사회의 리스크다. 그 에너지는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한다.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 그 지점을 본 사람은 어떻게든 그것을 건드리게 되어 있다. 누가 그것을 건드리는가? 괴짜가 건드리고 고집불통이 건드린다. 신해철, 김구라, 김제동처럼 캐릭터가 센 사람들이 그것을 기어코 건드린다. 우리 사회는 그런 메기들을 양성하고 격려해야 한다. 맹상군이 좀도둑 달인과 성대모사 달인에게도 역할을 주었듯이 우리 사회는 김명호 교수같은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 모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나태하게 만드는 일체의 시도에 필자는 반대한다. 보수의 본질은 ‘두려움’과 ‘귀찮음’이다. 생각하기도 싫고 판단하기도 싫다는 거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며 기존의 판단을 뒤집어야 한다. 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니까. 나는 묻고 싶다. 왜 사냐고?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다면 도대체 당신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행복한 돼지로 만족하겠느냐고. 당신이 지구로 떠나올 때의 미션은 무어냐고. 제대로 된 판사라면 법과 다른 판결을 해서 잘못된 법이 고쳐지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실제로 법원은 일정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판사의 판결은 공동체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이어야 한다. 영국이라면 아예 헌법이 없다. 그러므로 법대로가 불가능하다. 법은 판례의 집합이며 그 판례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중요한건 우리 사회가 밑바닥의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하는가이다. 에너지가 고루 분산되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있다면 위험하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왜곡과 꼼수와 조작이 적절한 에너지의 분산을 막는다. 에너지의 동맥경화를 일으킨다. 그 사회는 병들고 만다. 그 에너지를 건드려서 터뜨려버려야 한다. 그 팽대한 압력을 소진시켜야 한다. 이 참에 보수와 진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법대로만 주장하는 김명호교수와 팩트대로만 주장하는 진중권의 공통점은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을 줄인다는 것이다. “다 필요없고 딱 요것 하나만 하면 다돼!” 이걸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속인다. 갓바위에 3000배만 하면 서울대 합격 문제없어. 1억짜리 굿 한 번만 하면 운수대통해. 기도만 하면 하느님이 다 용서해줘. 십일조만 내면 다 용서돼. 면죄부야. 진보든 보수든 이거 비겁한 거다. 용기있게 정면승부 해야 한다. 아슬아슬한 긴장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잠시도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는 운전기사처럼. 흔히 법치주의를 보수라고 하지만 법대로 했다면 고승덕이 폭로했듯이 한나라당은 전원 구속이다. 속임수다. 그들이 법치타령을 하는 이유는 자기들은 빽이 있으므로 다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을 흉기로 쓸 의도로 그렇게 말하는 거다. 법치 좋아하네. 본질에서 보수와 법치는 아무 관련없다. 진정한 보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없다. 보수라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보수가 법치를 들고나오는 것은 그것이 자기네의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보가 데모하다가 감방을 많이 갔기 때문이다. 지들은 감방에 안 가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다. 한나라당 비대위에 참여하는 이상돈이 원칙보수를 자처하지만 구실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보수’는 지구에 없다. 서구유럽 어느 나라에도 없다. 그것은 가상의 어떤 이미지다. 신기루 같은 것이다. 진정한 보수 같은 것은 원래 없다. 보수는 단지 진보의 실패에 기생할 뿐이며 진보와 반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므로 보수를 결정하는 것은 진보다. 진보가 데모하다 감방을 많이 갔기 때문에 법치타령 나온거다. 결국 보수가 있는게 아니라 보수심리가 있다. 보수심리는 어떤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기피하는 거다. 고정된 기준을 정해놓고 인간을 거기에 때려맞추려는 거다. 보수심리로 보면 진중권과 김명호는 태생이 같은 과다. 진보 역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딱 이것만 하면 진보라는 그런거 없다. 진보는 진리와의, 역사와의, 시대와의 끝없는 상호작용 그 자체다. 진보는 아슬아슬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팀플레이를 강조하면서, 크게 세력을 길러가면서, 외부 환경과 조율하면서, 모든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모든 사회의 차단된 벽을 허물면서 역사의 물길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거다. ◎ 진보 – 시대와의 끝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아슬아슬한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 보수 – 어떤 고정된 틀에 의존한다. 구조론의 정답은 이러하다. 아슬아슬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라. 어떤 경우에도 조종간을 손에서 놓지 말아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늘려가라. 괴짜 포지션도 때가 되면 필요하니 아껴두라. 어느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에 맞춰놓고 판단과 결정을 그것으로 대리하게 하며 편안하게 가려하다가 리스크가 증폭되어 망한다. 그렇다. 결국 진보가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깊이 판단하고, 새롭게 결정하고 더 아슬아슬하게 판을 가져가는 거다. 쫄지 말고 가는 거다. 쫄면 벽을 등지고 싶어 한다. 슬금슬금 한쪽 구석으로 간다. 구석에서 고립되어 말라죽는다. 미국 공화당은 중도적인 롬니보다 더 보수의 구석에 있는 깅리치를 선택하고 있다. 치열한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맘편한대로 정한 거다. 깅리치가 맘은 편하다. 보수인 점은 확실하니까. 복음주의 기독교세력과의 내부갈등은 줄여주니까. 이러한 사정은 한나라당이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포지션의 이명박보다 더 구석에 있는 박근혜 카드를 내뽑다가 망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레이건은 경직된 보수꼴통이 아닌척 해서 성공했다. 부드럽고 유머감각있는 척 했다. 결론.. 경직된 진보나 경직된 보수의 본질은 한 마디로 쫄았다는 거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줄이는 결정을 내린다. 자신을 되받아치기 전문의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그 결과 자신에게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 위에 법이나 제도를 놓고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체의 시도에 나는 반대한다. 인간의 활동반경을 줄이는, 바운더리를 좁히는 일체의 결정에 나는 반대한다.
- 구조론의 시소 축이 움직여서 양측을 동시에 제어하는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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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화 보니까 김명호 교수가 했던
"법은 아무 문제 없다. 법은 아름답다." 는 대목이 생각나네요.
쏜 화살이 맞았느냐 안맞았느냐로
판사와 교수가 공방하는 장면을 보니
결국은 저 둘도 법의 해석 측면이라는 일정한 공간 안에서 다투는 데 지나지 않아 보였어요.
그 틀인 법 자체가 잘못되었느냐 아니냐 보다.
오히려, 박준 변호사가 법과 사법부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해준것 같고.
등장인물간의 갑론을박 자체 보다는
이 사건이 한국의 민감한 부분을 관객들에게 알렸다는데 의의를 둡니다.
몇 년전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이 사건을 보고
기억나서 오늘 한 번 봤습니다.
제작비 다해서 5억인가 들었다네요.
정지영 감독이 원래는 상업영화로 만들려다가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사람들이 투자하기를 꺼려서
독립영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말을 떠나
볼만함.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 보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사람이 한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저절로 진보가 된다는 겁니다.
김명호 이 양반 대단한 보수꼴통이랍니다.
대학생들 데모하는 것 보고 '저 새끼들 다 총살시켜 버려야 해.' 하고 떠들고 다녔다지요.
그렇게 교만하게 살다가 막상 자신이 그 보수의 피해자가 되니
생각이 바뀌어 진보가 된게 아니고
그래도 계속 열심히 보수했는데
뭐든 열심히 하면 그 결과는 진보라는 거죠.
결말부분-감방 안에서 죄수의 인권을 개선하고 있잖아요.
자신이 보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든 말든 상관없이.
어떻든 상호작용을 높이면 결과는 진보입니다.
정말 그렇네요 ^^
보수 이데올로기를 갖든 말든
상호작용을 높이면 결과는 진보.
오늘 트윗에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며
관련 판사들의 해명글이 올라오는 등
소동이 벌어진 걸 보았는데
이미 그 일로 사회가 시끌시끌 해지는 것 자체가
상호작용이 높아 진 걸로 보입니다.
주변과 그리 상호작용할 일이 없는 교수사회 (수학과 교수니 오죽하겠습니까?)에 있을 때는 그의 똘끼 (자신 나름의 원리원칙, 매우 고지식함 등등)가 묻혀있었는데, 사회의 경직성 또는 부조리가 극대화 된 곳과 맞부딪히는 장면(수학문제 오류 지적, 교수 재임용 재판, 석궁 재판, 교도소내 인권문제)이 발생할 때마다, 그 고지식함을 꺽지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이더군요. 그를 보면 답답하지만, 조직들(교수사회, 사법부, 교도소)의 더 답답하고 부조리한 면과 맞부딪힐 때는 힘내라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둥글둥글해지지 않고, 계속 각을 유지하는 사람 -상황에따라 각을 변화시키지 않는 이가 결국에는 세상의 진보에 큰 도움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식이 짧아 글전체를 이해하긴 힘들지만
요즘 제고민중에 하나인 직장내 잠재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에 대한
놀라운 영감을 주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참 공감되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