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이 명과 싸워서 패배한 결과로
고원으로 후퇴했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페스트가 유럽에만 퍼진 것은 아니죠.
황하 북쪽 인구의 반이 페스트로 죽었다고 하는데
질병과 기근 등의 천재지변으로
제국이 총체적 통제불능 상태에 빠져 고원으로 철수한 것입니다.
주원장(朱元璋) 자(字)는 국서(國瑞).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페스트였다.
흑사병이라고 불린다.) 부친 주세진이 죽고 이어 맏형과 여러 형제들이
연이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둘째와 셋째 형수, 그리고 둘째 형의 아이
들과 어머니 진씨마저 전염병에 목숨을 잃었다. 그와 그의 둘째 형 주중육
(朱重六)만이 살아남았다.(위키사전)
분명히 말하면 로마의 문화수준이 중세 암흑시대보다 월등하게 높았고,
도시 중심으로 생활했던 신라시대의 문화수준이 고려보다 높았습니다.
유럽인들은 19세기까지 로마의 수도교가 무슨 시설인지 이해 못했습니다.
네덜란드인은 18세기까지 맨 손으로 밥먹었습니다.
목욕은 19세기 이후에나 일반화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신발신고 방에 돌아다니는 야만인입니다.
신라 > 넘사벽> 고려 > 넘사벽 > 조선
송나라때는 자본주의 맹아단계까지 갔고
분업을 위주로 한 유사 포드시스템에 따른 대량생산방식과
대규모 코커스 용광로가 있었고 주식회사도 있었습니다.
몽골이 자본주의로 이행하려던 송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명이 다시 고도의 제국시스템을 운영하던 원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사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한 무려 1천년간의 거대한 역사퇴행이 있었고
이후에도 자력으로 르네상스하여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아랍의 것을 가져온 거죠.
새빨간 거짓 역사에 우리는 속고 있는 거죠.
중국은 몽골의 정복과 명나라의 건국과정에서 두 번의 역사퇴행이 일어납니다.
몽골은 중국을 500년 퇴행시켰고
명은 거기다가 300년 더 퇴행시켰습니다.
고려도 신라의 전성기에 비하면
도읍의 규모가 1/10으로 퇴행했습니다.
이러한 본질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물론 종이, 면화의 보급 등으로 일부 진전한 것도 있습니다.
도자기의 보급도 있고. 그러나 일부고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퇴행입니다.
신라와 고려의 수준 차이는 석굴암 본존불과 은진미륵의 차이입니다.
역사가 점진적으로 진보한다는 망상을 버려야 합니다.
무수하게 많은 문명이 갑자기 사라지고 졸지에 정글로 변합니다.
아이티가 처음 독립했을 때는 나폴레옹을 물리친 선진국이었으나
독재자가 죽자 바로 원시사회로 되돌아갔습니다.
몽골이 물러나고 주원장이 바로 성공한 것은 아니며
장사성 등 해양세력이 도망쳐서 고려로 상당히 이주해 왔습니다.
그때 몽골과 관계가 있는 이성계가 명을 쳤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 그때 명은 제대로 된 실체가 없었으니까.
전쟁할 때는 원래 왕자가 침전하든가 왕이 국경까지 와야 합니다.
백제를 칠때 신라왕은 옥천 근처까지 와 있었습니다.
최영과 우왕은 의주까지 갔어야 합니다.
위화도 회군은 몽골의 후퇴로 일어난
대륙의 혼란기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인데
공민왕 말년의 어수선한 사정에 따른 실패이기도 하고
나이든 최영의 실책이었던 거죠.
이성계의 결정적 오점이기도 하고.
이성계는 척준경,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사의 무패장군입니다.
최영은 바로 최충헌, 최우와 같이
최씨 무신정치를 했어야 했는데 늙은이가 뭐를 하겠습니까?
이성계는 명을 쳤어야 했고 정도전과 함께 명을 치려고 했으며
나중에 세종이 함경도를 가져오는 것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야 합니다.
근데 역사학자 중에 이 부분을 짚어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요즘 교과서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라도.
역사의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젊은이가 없으면 나라는 망합니다.
의자왕.. 유능했으나 중요한 시기에 너무 늙었다.
최영.. 진작에 세대교체 했어야지.
이성계.. 너무 늙어서 정도전을 지켜주지 못했다.
영조.. 늙은이의 장기집권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번영할 때 조선혼자 망했다.
영,정조가 훌륭한 군주라는 바보도 우리나라에 많지요.
제 꼬리 보고 이빨 드러내고 짖다가
알아채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 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