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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190 vote 0 2013.02.17 (15:20:12)

 


    목요일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5라는 숫자가 구조론의 결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문제는 매슬로우의 헛소리가 수구꼴통의 전쟁논리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1) 생리적 욕구(음식, 수면 등)
    (2) 안전의 욕구(위험의 회피)
    (3) 소속과 애정의 욕구(타인과의 관계)
    (4) 자존의 욕구(사회적 존경)
    (5) 자기실현의 욕구(이상의 실현)


 

    안전을 앞에 두고 이상을 뒤로 밀어낸 다음, 실제로는 전쟁을 벌여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자가당착을 저지르는 것이 수구꼴통이다. 어쨌든 단계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은 평가할만 하다. 구조론은 단계론이다.


    먼저 단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일의적 결정이라야 단계다. 1단계를 통과하면 자동으로 2단계로 넘어가도록 세팅되어야 일의적 결정이다. 씨앗 안에 여름의 꽃과 가을의 열매가 잠재해 있어야 한다.


    매슬로우의 5단계는 단계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짜깁기론이다. 이중기준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일단 출발은 좋다. 1단계인 생리적 욕구가 구조론의 질 개념과 같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잘못 해석했을 뿐 매슬로우가 뭔가 본 것은 사실이다. 매슬로우의 두 번째 안전욕과 세 번째 애정욕은 구조론의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5단계 중 두 번째 자유, 세 번째 사랑과 유사하다.


    ◎ 마음의 구조≫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 매슬로우 ≫ 생리, 안전, 애정, 존경, 이상


    자유와 안전은 통한다. 안전에 실패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맨 먼저 자유를 잃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 2), 3)번까지는 대략 맞다. 그런데 4)번과 5)번이 이상하다. 여기에 이중기준의 꼼수가 있다.


    존경이나 이상은 나이가 들어야만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것도 문명사회의 유명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여기서 보편성을 잃는다. 진리의 속성은 보편성이다. 보편성을 잃으면 무조건 가짜다.


    진리는 나이, 인종, 성별을 가리지 않아야 하며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지도 말아야 하며 무생물과 생물도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공변되니 수학법칙과 같아서 널리 구애됨이 없어야 한다.


    강아지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아한다. 아기도 칭찬을 해주면 착해진다. 영웅이 될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게 소년이다. 무엇인가? 아기에게도 자기실현욕이 있는 것이다.


    다만 아기는 그 자기실현의 범위가 좁을 뿐이다. 아기의 세계는 엄마와 나 둘 뿐이므로 자기실현은 엄마를 찾는 것으로 완성된다. 엄마와 떨어져 있다가 엄마를 발견하면 까르르 웃는다. 자기실현 성공이다.


    엄마가 아기를 안아주면 아기는 존경을 받은 것이다. 이미 네 번째 자존의 욕구가 채워졌다. 아기는 밥만 먹어도 칭찬을 듣고 응가만 싸도 칭찬을 듣는다. 아기 입장에서는 생존이 곧 자기실현이다.


    무엇인가? 일의적 결정원리는 공간의 법칙인데 매슬로우는 공간으로 가다가 갑자기 시간으로 방향을 튼다. 이중기준의 오류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매슬로우의 관심이 자기 자신의 문제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감을 알 수 있다. 1)번과 2)번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3)번은 타자와의 관계이며 4)번과 5)번은 타인의 평가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에게서 사회로 발전한다고 매슬로우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기중심적 사고다. 필자가 누차 강조하는 ‘누가 물어봤냐고?’에 해당된다. 이 양반 안 물어봤는데 자기소개 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구조론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사회가 앞서고 개인이 따른다. 단 어린이는 그 사회의 범위가 좁을 뿐이다. 갓난 아기는 엄마와 나의 관계가 사회의 전부다.


    진리의 속성은 보편성이다. 보편성은 성별이나 나이나 인종이나 동물이나 자연물을 가리지 않는다. 아마존 정글의 부족민에게는 자기실현욕이 없다고 말하면 진리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정글에 고립된 씨족에게는 이렇다 할 사회라는 것이 없으므로 이상의 실현도 없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매슬로우의 5단계는 귀납적 인식의 순서다. 인간이 상황을 알아채는 순서가 개인≫사회이며 실제로 사건이 작동하는 순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 기준이면 곤란하다. 주관을 배제하고 자연의 결을 따라야 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간은 뒤늦게 그 사건의 의미를 알아챈다. 그래서 개인이 앞서고 사회가 뒤에 온다. 이는 멍청해서 그렇고 항상 사건은 사회에서 일어난다. 개인은 잘못이 없다.


    사회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한다. 갓난 아기라면 엄마와 나의 관계가 먼저다. 생존이라는 것도 사회로부터 담보된다. 아기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엄마다.


    아기는 필사적으로 엄마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 한다. 울어야 젖을 주고 웃어야 기저귀를 갈아준다. MBC에서 방영하는 ‘아빠 어디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기들의 주의는 항상 타자에게로 향해있다. 아기니까 그 범위가 좁을 뿐이다.


    아기는 자신의 욕구 때문에 울거나 웃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주의를 끌고자 웃거나 우는 것이다.


    중요한건 논리학이다. 일의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여러 사건을 주워섬기면 곤란하다. 논리가 깨진다. 예컨대 1단계를 통과하고 2단계로 가야 한다.


    1)단계 없이 2)단계로 바로 갈 수 있다면 단계설이라 할 수 없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이고 3)단계는 사랑인데 생리를 해결했다고 해서 여자친구가 생기나? 정답 – ASKY(안생겨요.)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여자친구가 생겼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반면 존경받는 일을 했더니 여자친구가 생겼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엊그제만 해도 버스에서 잃어버린 돈을 찾아준 이야기를 SNS에 올렸더니, 모르는 이성으로부터 사귀자는 연락이 왔다는 뉴스가 있었다.


    ◎ 단계실패 – 생리를 해결했더니 이성친구가 생겼다?
    ◎ 단계성공 – 존중받을 일을 했더니 이성친구가 생겼다.


    매슬로우는 방향이 틀렸으며 인간의 행위는 모두 사회적 행위고 사회로부터 동기부여되며 존엄이 1)번이고 생존이 마지막이다. 단 생존이 앞에 오느냐와 뒤에 오느냐에 따라 맥락이 달라진다. 그 생존이 그 생존이 아니다.


    아기는 그 사회의 범위가 작다. 그러나 아기에게도 사회는 분명히 있다. 매슬로우가 영감들만 관찰했기 때문에 빚어진 오류다.


    ◎ 구조론의 연역방향 : 사회 ≫ 개인
    ◎ 매슬로우 귀납방향 : 개인 ≫ 사회


    가장 첫 번째는 동기부여이며 동기는 외부로부터 자극되므로 존엄이 먼저다. 자기실현이 먼저다. 배가 고픈 것은 신체 내부로부터의 자극이지만 뇌가 기준이므로 배고픔 역시 외부자극이다. 배고픔이 뇌를 괴롭혔기 때문에 뇌가 방어행동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기준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뇌가 기준이다. 자기도 남이다. 자기의 신체가 남일뿐더러 자기의 마음도 남이다. 오직 뇌의 의사결정영역만이 진정한 자기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외부와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 하나로 전부 해명하는 것이 일의적 결정이다. 갓난아기의 자기실현은 엄마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아기가 울거나 웃거나 보채거나 뒤집거나 다 엄마의 주의를 끈다. 범위가 좁을 뿐 존엄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같다.


    청소년이 되면 자기실현의 범위가 애매해진다. 띨띨한 녀석은 가족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이 경우는 난폭한 남편이나 자식을 억압하는 아버지가 되기 쉽다. 똑똑한 사람은 인류의 존경을 받으려 한다.


    그 사람의 인격레벨에 따라 자기실현의 스케일이 다를 뿐 자기실현으로부터 동기부여되는 것은 명백하다. 존엄이 1)번이다. 똑똑한 사람은 선행으로 존경받고 띨띨한 자는 폭행으로 존중받는다.


    깡패가 부하를 제압하는 것도 일종의 존경이다. 구조론은 수학이므로 선악의 가치를 배제하고 건조하게 있는 그대로의 결을 본다. 그러므로 여기서 존경은 영향력이다. 깡패는 폭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어떤 행동을 하든 먼저 영향력을 얻고 난 다음이다. 강한 포지션에서 약한 포지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먼저 갑이 되려고 한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한 다음 행동한다.


    남자가 완력을 과시하거나, 여자가 미모를 과시하거나, 아이가 울거나, 노인이 잔소리를 하거나, 부자가 돈을 자랑하거나, 거지가 동정심을 자극하거나 간에 모두 영향력의 행사이며 매슬로우가 말한 존경이다.


    수학적으로 보아야 한다. 존경은 사회적 존경이 아니라 갑을관계의 갑이다. 힘이 없는 약자라도 어떤 특별한 순간에 강자의 발목을 잡아 순간적으로 갑이 될 수 있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존경받는다.


    힘없는 노동자도 파업을 해서 공장을 세워버리면 영향력을 행사한 셈이다. 존경받는다. 물론 그 존경이 흔히 말하는 도덕적 존경은 아니다. 어쨌든 눈길을 끈다. 시위를 한 셈이다. 존재감 확인된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생존이 1)번이라면 성욕이 먼저인데 스님은 성욕이 없을까? 윤봉길 의사는 생존욕구가 없었을까? 아니다. 인의예지 사단은 욕망이 아닌 것일까? 희노애락애오욕 7정은 욕망일까? 외로움은 무슨 욕망일까? 두려움은 무엇일까? 이렇게 되면 복잡해진다.


    일체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모두 생존이며 존엄이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모두 존엄에 기초한다. 외로움은 타자 속으로 침투할 때 해결되고 두려움은 역시 친구들 속으로 들어설 때 해소된다. 모두 존엄으로 가능하다.


    인간이 기본적인 욕구는 외로움과 두려움이며 생존욕이고 존엄욕이다. 희노애락애오욕은 모두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한 신체적 태도이다. 인의예지는 모두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태도이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이성이 반응하면 인의예지고 몸이 반응하면 희노애락애오욕이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궁극적으로 존엄욕이다. 배고픔이나 성욕도 외부와의 물리적 관계를 설정하므로 존엄에 해당한다. 다만 신체로부터 신호가 들어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본질은 같다.


    여기서 매슬로우가 과학적 접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존욕이라는 말은 모호하고 포괄적이며 2차적인 해석이 가해진 것이다. 비과학적인 접근이다. 인간의 행동은 나와 타자 사이에 성립하며 타자와 나의 만남이 첫 번째고 어떻게 타자를 만나는가가 모든 행위의 대전제이며 그것이 존엄이다.


    아기는 오직 엄마와 만날 뿐이며 성인은 진리와 만난다.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행동이 결정된다. 개나 돼지는 오직 사료와 만난다. 돼지는 먹이만 주면 만족한다. 만남의 대상이 다를 뿐 만남이라는 본질은 같다.


    인간의 행위는 존엄에서 자유, 사랑, 성취, 행복으로 나아가며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사건 안에서 규명된다. 여러 가지 행동을 모아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딱 하나의 사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일의적 결정원리가 모든 논리의 대전제다.


    ◎ 존엄 – 나와 타자가 어느 레벨에서 만나는가?


    예컨대 내가 오바마를 만났다고 치자. TV 출연자와 TV 시청자의 관계로 만났다면 의미가 없다. 오바마를 만나려면 백악관에서 만나야 한다. 인간의 첫 번째 행동은 만남의 레벨을 결정하는 것이다.


    ◎ 자유 – 나와 타자의 만남에서 누가 갑인가?


    스쳐간 만남이 아니라 운명적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엔 그 만남의 장 안에서 자기 포지션이다. 자기가 갑이 되어야 한다. 전화를 하든 카톡을 하든 어필을 하든 시비를 걸든 연애를 하든 그 순간에 내가 갑이어야 한다.


    이는 실질적인 역학관계와 무관하다. 상대가 대통령이라도 내가 질문하면 그 문답에서는 내가 갑이다.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역시 구조론은 수학이므로 사회적인 위상관계를 논외로 하고 특정한 행동 안에서 누가 갑이냐다.


    실제로 어느 쪽이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 행동 안에서 누가 먼저 상대의 눈길을 끌고, 주목을 끌고, 어필을 하고, 말을 걸고, 분위기를 장악했는지에 따라 갑을관계가 성립하며 그 순간의 갑이 되는 것이 인간 행동의 절대적인 동기다.


    작용반작용 구조 안에서 먼저 작용하는 것이 갑이다. 아기는 울기만 해도 갑이 되고 웃기만 해도 갑이 된다. 울면 사람들이 주목하고 웃어도 사람들이 주목한다. 아기는 손쉽게 갑이 될 수 있다. 할배는 용돈을 줄때만 갑이 될 수 있다.


    먼저 레벨을 정하고 그 레벨을 수평으로 맞춘 다음 자신이 갑이 되어야 행동에 들어간다. 이 순서는 절대적이다. 예컨대 내가 대통령을 만나든, 장군을 만나든, 고관을 만나든, 그 순간에는 적어도 수평구조라야 하며 수평구조가 아니면 나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 하려고 해도 불능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홍만이 꼬마와 말을 하려고 하면 최홍만이 아기의 눈높이로 고개를 숙이는 수 밖에 없다. 아기가 최홍만 높이로 올라설 하이힐을 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전체≫부분으로 간다. 단 아기는 그 전체의 규모가 작다. 성장하면서 전체의 사이즈가 확대된다. 일베충과 오유인이 차이는 그 전체의 규모차이다. 매슬로우는 이를 뒤섞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평천하치국제가수신’한다. 20대~30대는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고, 30대~40대는 마누라를 상대하려고 하고, 40대~50대는 자식을 지배하려고 하고, 50대를 넘어가면 자기 한 몸 건사하려고 한다. 점점 범위가 좁아지는 것이다. 점점 꼴통이 된다.


    다만 성인은 제자들과 연동시키므로 평생을 평천하에 바친다. 스승이 평천하를 하면 제자들은 치국을 하고 그 후손들은 제가를 하며 세월이 아득하게 흐르면 수신도 버겁게 된다. 노무현은 평천하로 뜻을 세우고 친노그룹은 치국을 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범위가 좁아진다.


    봄에 씨앗 백개를 뿌리면 여름까지 자라는 것은 50개요 가을에 수확을 남기는 것은 열 개도 안 된다. 나머지는 솎아주기, 가지치기, 병충해 피해, 낙과피해로 중간과정에서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은 나빠진다. 마이너스다.


    1) 존엄 – 타자와 관계를 설정한다.
    2) 자유 – 관계 안에서 내가 작용한다.
    3) 사랑 – 나와 타자의 상호작용을 전개한다.
    4) 성취 – 이를 다양한 외부환경에 적용한다.
    5) 행복 – 사건을 종결하고 결과물을 획득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돈 보고 결혼했을 경우 돈과의 상호작용에 열중할 뿐 이성과의 상호작용은 없다. 혹은 자식에게만 눈길을 줄 뿐 파트너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결혼이 목적이었던 거다.


    이는 애초에 존엄이 깨졌기 때문이다. 눈높이가 다른 사람이 결혼하면 그렇게 된다. 삼성 집안에 시집간 탤런트가 원심분리기에 의해 불거져 나온 것이 그러하다. 존엄이 깨지면 사건은 기승전결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건 사기다.


    수구꼴통들은 대개 이런 사기에 관심이 많다. 정략결혼과 같다. 도지사들 중에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데 이들은 실제로 사대강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예산 따오는데 관심이 있다. 이게 속임수다.


    수구꼴통들은 안전을 중시한다면서 실제로는 안전을 해친다. 사실은 안전에 관심이 있는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역시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 예산 따오는데 관심이 있다. 속임수다.


    이런 논리학의 오류를 이용한 속임수는 일의적 결정을 깨는 형태로 일어난다. 사건 1과 사건 2가 있으며 사건 1에서 답을 찾지 않고 1의 결과로 2을 촉발하여 질에 서려는 것이다.


    사건 1의 양이 사건 2의 질이 되는 수가 있는데 이러한 착각을 이용한다. 문제는 이 사이에 반드시 에너지가 추가투입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을 속인다. 에너지가 없이 자동으로 사건 2가 될 듯이 속인다.


    예컨대 탈북자들이 반통일에 앞서는 이유는 북한정권이 붕괴되면 자기네가 북한정권을 장악할 의도인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꿈 꾸는 통일과 무관하게 자기네의 사건 2가 있다. 여기에는 추가비용이 소용되는데 그 부분은 감춘다.


    매슬로우의 오류는 사건 1과 사건 2를 무분별하게 연쇄한데 따른 것이며 생존≫안전≫애정은 사건 1이고 구조론과 맞으나 존경과 자기실현은 사건 2다. 사건 2는 영감들에게만 해당된다. 사건 1은 공간이고 사건 2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궤변은 이러한 속임수를 쓴다.

 

   

 

    ###

 

   총균쇠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에 의하몬 폴리네시아의 모든 부족민은 잠재적 전쟁상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 이는 안전욕이 아니라 위험욕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인디언을 비롯한 모든 부족민은 이웃에 적대부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미국이 중국, 러시아를 가상 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나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적대하는 것이나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와 같은 것으로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다. 인간은 긴장상태를 원한다.

 

   부족민은 식인으로 그 본능을 드러내고 현대인은 경쟁으로 그 본능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긴장하려고 하며 그 배경에는 타자와의 상호작용 레벨을 정하려는 존엄동기가 작동하고 있다.

 

    이를 잘못 풀어내면 나치의 전쟁이 되고 잘 풀어내면 예술가의 미학적 이상주의가 된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비난을 퍼붓는 것이나, 히틀러가 광기를 부리는 것이나, 필자가 현대차 디자인을 꾸짖는 것이나, 성철이 3천배를 요구하는 것이나,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 디자인을 정의하는 것이나 본질은 같다. 존엄으로 공동체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예술이거나 전쟁이거나. 인간이거나 벌레이거나. 오유인이거나 일베충이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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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와 나의 만남을 어느 레벨에 둘 것인가입니다. 신과의 만남이 아니면 그대는 아직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2.17 (18:51:26)

어색하지 않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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