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 반복한 내용이지만 아래글의 리플과 관련하여 몇 마디 보충합니다. 구조론이 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들이 피상적으로 알고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은 구조론이 어려운게 아니고 뭐든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으면 원래 이렇게 됩니다. 구한말 조선의 선비들이 서양 학문을 귀동냥으로 제법 배웠는데 제대로 익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중일전쟁때 미국이 중국인을 전투기 조종사로 양성했는데 다 실패하고 할 수 없이 미국인 퇴역군인을 용병으로 선발하여 버마공로를 막게 했습니다. 그때 미국인들이 뭐랬는지 아세요? “중국인들은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우수한 전투기 조종사가 될 수 없다.” 미국은 표면적으로 중일전쟁에 불개입한다는 원칙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근데 미국인은 왜 중국인은 열등해서 비행기 조종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말귀를 못알아먹어서입니다. 왜 중국인들은 말을 못 알아먹었을까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서당에서 한문 배우던 사람을 비행기 조종사로 양성하기는 불능입니다. 그건 원래 안 되는 거에요. 구조론이 어려운게 아닙니다. 학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은 사람은 역사적으로 없습니다. 진짜 학문은 원래 그렇습니다. ### 구조론은 질=양입니다. 어디가 질이고 어디가 양이냐고 따지는건 넌센스죠. 어디가 축이고 어디가 대칭이냐고 묻는 것도 넌센스입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질이 양이고 양이 질입니다. 그런데 왜 질은 질이고 양은 양이냐? 역할이 다른 거죠. 그 역할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로 결정됩니다. 즉 질=양이지만 그 집에 누가 방문하느냐에 따라 질도 되고 양도 됩니다. 흥부네 가족이 기차표를 사러 갔는데 흥부가 대표로 26장의 표를 끊습니다. 근데 막내가 ‘난 중간에 내릴래’ 하면 골치아프죠. 흥부가 26장의 표를 끊으면 질이고 한명씩 따로 끊으면 양입니다. 5=질이고 (1+1+1+1+1)=양이라는 말이지요. 퍼즐을 조립해 놓으면 질이고 분해해 놓으면 양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겁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질=양인데 아닙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질이 양으로 가면 포지션을 손실합니다. 질은 양보다 큽니다. 질은 포지션이 있고 양은 없어요. 그러므로 질=양은 아닙니다. 근데 에너지로 보면 질=양입니다. 근데 정보로 보면 아니에요. 즉 에너지보다 큰 개념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에너지 개념은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아닌 거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은 에너지 개념인데 엔트로피의 법칙과 충돌하므로 기존의 수학을 버리고 구조론을 배워야 합니다. 구조론 몰라도 대충 살 수 있고 미적분 몰라도 대충 산수할 수 있지만 우주선을 달에 보내려면 미적분 알아야 하고 현대과학계의 총아인 빅 데이터 문제를 해결하려면 구조론을 알아야 해요. 빅 데이터를 처리하려면 첨단 컴퓨터가 있어야 하는게 아니고 모듈화를 통한 일 줄이기 방법을 써야 합니다. 빅데이터를 간소화 시켜 적은 데이터로 압축해야 해요. 구조론을 모르므로 빅 데이터에 걸리는 거죠. 질=양이지만 질과 양을 떠나 그 집에 온 손님 입장에서 질은 집안 전체에 볼일이 있는거고 양은 부분에 볼일이 있는 거에요. 즉 질이냐 양이냐는 그 대상의 문제가 아니고 손님의 사정입니다. 가장을 만나러 온 사람은 질이고 꼬맹이를 만나러 온 사람은 양입니다. 그러므로 질과 양을 구분하는 것은 그 대상을 보는게 아니고 그 대상을 다루는 반대편의 상대를 보는 겁니다. 질=양이지만 질이 양보다 큽니다. 그리고 질은 1이고 양은 많습니다. 여기서 질이 양보다 큰데 왜 질은 1이고 양은 많은가? 질이 1이라는 것은 그 질을 만나러 온 상대방이 1이라는 겁니다. 질은 인구센서스를 하러 온 알바생 1이고 양은 흥부아들 24명과 각각 따로 놀러온 24명의 동네꼬마들입니다. 질은 한 명이 전체를 대표하고 양은 각각 따로논다는 거죠. 그러므로 질이 양보다 크지만 질이 양보다 간소화 되어 질은 1입니다. 질은 전체인데 실제로는 질은 1입니다. 왜냐? 엄마곰이 질이고 새끼곰도 질인데 엄마곰을 묶어놓으면 새끼곰이 도망을 안 가므로 엄마곰을 질이라고 하는 거에요. ◎ 질 – 곰 가족 전체에 볼일이 있지만 실제로는 엄마곰 하나만 상대한다. ◎ 양 – 새끼곰에게만 볼 일이 있는데 새끼곰이 많아서 상대할 게 많다. 질따로 양따로가 아니고 질이 양이지만 질만 통제하면 양은 저절로 통제되므로 질을 별도로 구분하는 겁니다. 자동차 전체가 질이지만 키만 빼놓으면 자동차가 어디로 도망을 안가므로 키를 질이라 부르는 거에요. ◎ 자동차 전체가 질이다. ◎ 자동차 키가 질이다. 이거 헷갈리면 안 됩니다. 구조를 논할때는 자동차 키를 질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자동차 전체가 질이지만 자동차 키가 전체를 통제할 수 있으므로 키만 있으면 사실상 질이 확보된 거에요. 그러므로 어디가 질이고 어디가 입자고 어디가 축이고 어디가 대칭이냐는 착각할 수 있습니다. 축 속에 대칭이 포함됩니다. 축은 몸통이고 대칭은 날개인데 날개는 몸통에 붙었으니 포함됩니다. 별도가 아니에요. 근데 구분이 가능합니다. 천칭저울은 접시가 둘입니다. 대칭이지요. 그런데 물체를 접시에 올릴 때는 한쪽에만 올립니다. 사과의 무게를 달고자 한다면 한쪽에는 추를, 한쪽에는 사과를 놓습니다. 실제로는 둘 중 하나만 씁니다. 대저울과 같습니다. 대저울은 추를 움직이는데 운동입니다. 한쪽은 계량할 곡물을 매달고 한쪽은 추를 운동시킵니다. 힘 대 운동*2이죠. 구조의 작동은 질 하나에 입자 둘, 입자 하나에 힘 둘, 힘 하나에 운동 둘로 전개하며 그 중에서 하나를 마이너스 시킵니다. 시소의 두 날개 중에서 하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만 일을 합니다. 즉 대칭을 이룬 둘 중 하나를 소거하는 것이 일인 것이며 그 나머지는 에너지가 채우는 것입니다. 콤파스는 다리가 둘이지만 하나만 일을 합니다. 로켓포는 양쪽에 구멍이 있는데 대포알은 한쪽으로만 날아갑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리는 형태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함관계를 정확히 아는게 중요합니다. ◎ 질은 양이다. ◎ 질은 양보다 크다. ◎ 질은 전체다. ◎ 질은 그 전체의 우두머리다. ◎ 대칭은 둘이다. ◎ 일은 대칭 둘 중 하나를 버린다. ◎ 질과 양에 대한 논의는 그 반대편에서 역할을 주는 상대방이 결정한다. 흔히 착각하는데 질이 어떻고 양이 어떻고 하는건 다 그 질이나 양을 면회하러 온 상대방의 용무를 말합니다. 질이냐 양이냐를 논할거 없이 어떤 볼 일이 있느냐를 봐야 합니다. 국가 전체가 질이지만 왕만 잡으면 다 항복할테니까 왕을 질이라고 하며, 그것은 그 왕을 잡으려는 적군의 생각입니다. 왕이 잽싸게 왕자에게 왕관을 넘겨버리면 왕을 잡아봤자 소용없습니다. 어떻든 질=입자=힘=운동=량이지만 그 대상에 용건이 있는 상대방에 의하여 질과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걸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어떻든 어떤 물건을 에너지로 때리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합니다. 접이식 안테나 빼듯이 안에서 빠져나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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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