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확인이면 닥쳐! 사람들은 태연히 ‘해가 뜬다’고 말하곤 한다. 지동설에 따르면 해가 뜨는 일은 없다. 이 정도는 약과다. 심지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미확인비행물체’ 어쩌구 하는 사람도 있더라. 왜 ‘미확인이면 닥쳐!’라고 말하지 않나? 지구에 70억 인간이 산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목숨걸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윤리, 도덕을 좇아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많다. 그래봤자 남에게 잘 보이려는 짓에 불과하다. 진리로 바른 길을 가야 진짜다. 어렵지 않다. 단지 ‘1+1=2’라고 말하면 된다. 열여섯살 무렵의 일이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철학책을 빼보고 내린 결론은 ‘1+1=2’라고 말하는 사람이 지구에 단 한 명도 없더라는 거다. 대개 ‘얼마로 해드릴까요?’ 이러고 나자빠져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실망하여 떠났고 무기를 만들어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내가 찾는 사람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사람이다. 달마 앞에서 단숨에 왼팔을 잘라 돌아앉게 만든 혜가처럼, 문자가 불필요함을 깨닫고 그 길로 곧장 간 혜능처럼, 숲으로 슬금슬금 걸어간 소로처럼, 갑자기 필 받아서 태산같이 그려냈던 고흐처럼 확신을 가지고 제 길을 가는 사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 말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필 받아서 제 길을 갔다. 그런데 진리의 길을 그렇게 가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1+1=2’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다. 별 수 없이 내가 그 일을 하기로 하는 거다. 구조론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자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최초의 기획이다. 처음 0을 발견한 사람은 고민되었을 거다. 이제껏 쌓아온 것이 있는데 다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를 외쳐야 한다. 어찌 그 한 사람만 0을 생각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0의 개념에 근접했겠지만 ‘뭐야? 왜 골치아픈 일을 벌여?’ 하고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과 씨름하기 힘들어 관둬버린 것이다. 문제가 있다는건 누구나 알았을 거다. 다만 개의치 않은 거다. 포기한 거다. 0은 크기가 아니라 자릿수다. 크기도 없는게 어째서 숫자냐고 따지면 할말없다. 그래서 계속 밀어붙이지 못하고 중도에 주저앉아 버린다. 다만 어떤 인도사람이 끝까지 갔다. 세상에 사람이 많은데 끝까지 가기로는 그가 유일했다. 0은 포지션이다. 구조는 포지션이다. 0이 하나 붙으면 단자리고, 둘 붙으면 십자리고, 셋 붙으면 백자리다. 그러나 10진법은 인간이 작위하여 만들어낸 것이고 자연에는 없다. 자연에 10진법은 없어도 진법은 있다. 구조론이다. 구조의 자리값은 하나면 ‘양’자리, 둘이면 ‘운동’자리, 셋이면 ‘힘’자리, 넷이면 ‘입자’자리, 다섯이면 ‘질’자리며 그 이상은 없다. 하나의 사건은 기승전결로 끝나고 구조는 다섯 자리로 입력에서 출력까지 완성된다. 구조론은 인간의 10진법을 대체하는 자연의 진법이다. 자연에서는 결이다. 결은 길이다. 길은 route다. route는 법(法)이다. 法은 水+去다. 물이 가는 길이다. 그것은 리다. 리(理)는 玉+里로 옥의 결이다. 장인이 결따라 옥을 갈았던 거다. 물이 아래로 가고 옥을 결따라 깎는 이치는 정해져 있다. 정해진건 질서다. 질서는 시간의 차례를 공간에 늘어세운 것이다. 시간은 인과다. 공간은 작용반작용이다. 인과는 순서, 작용반작용은 방향인데 둘을 합치면 나이테가 된다. 나이테는 나무가 자라는 시간순서를 반영하면서 공간의 방향으로 배치된다. 한자어로는 목리(木理)다. 다른 시간대에 속하는 것을 하나의 공간에 집어넣은 것이다. 마차의 바퀴살과도 같다. 바퀴살은 시간순서로 지면과 접촉하지만 하나의 축에 꿰어져 공존한다. 순서대로 갈 것을 한 공간에 붙잡아놓은 것이 구조다. 에너지를 투입하면 다시 순서대로 정렬한다. 결따라 간다. 0은 순서대로 가면서 공존한다. 2는 1 다음에 오지만 0은 모든 곳에 숨어 있다가 임자가 자리를 비우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포지션이다. 포지션은 모든 곳에 있지만 임자가 있을 때는 모습을 감춘다. 임자가 있을 때는 이동국이나 박주영이라고 선수 이름을 부른다. 임자가 없을 때는 원톱이니 투톱이니 하면서 포지션이 모습을 드러낸다. 임자가 있을 때는 7이나 8이라고 숫자를 쓴다. 임자가 없을 때는 그 빈 칸에 숨어 있던 0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주의 근본은 포지션이다. 포지션이 모여서 포메이션 되고 플랫폼을 구성한다. 구조론은 만유가 공유하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그것은 자연의 진법이며 자릿값 0이다. 0이 없을 때는 각자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곤란하다. 임자가 자리를 비우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는 상대어가 아닌 절대어를 써야 한다. 이름 말고 직책을 대야 한다. 포지션을 말해야 한다. 심판이 ‘당신 뭐야?’ 하면 ‘이대호인데요.’ 하면 곤란하다. ‘4번타자요.’ 해야 한다. 이름은 상대적이고 포지션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한자어 十이나 라틴숫자 X로 쓰던 것을 10으로 쓰자는 거다. 자릿값으로 나타내는게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낱낱이 따지자면 잘못된거 매우 많다. ‘위하여’는 인과율과 맞지 않으므로 과학이 쓸 수 없다. 그런데 명색이 과학자라는 양반들이 태연히 ‘위하여’라고 해버린다. 이후 모두 틀어지고 만다. 과학이 통째로 붕괴되고 만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거나 ‘먹기 위해서 산다’거나 모두 잘못된 말이다. 배가 고파서 먹는 거다. ‘의하여’가 정답이다. 결과가 원인 앞에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간단한 규칙인데 사람들이 도무지 규칙을 안 지킨다. 1+1=2를 안 지킨다. 해는 뜨지 않는데 ‘뜬다’고 하고, 미확인이면 닥쳐야 하는데 ‘UFO’라고 한다. 반칙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자세가 아니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물음은 잘못된 질문이다. 닭이 상부구조냐 아니면 달걀이 상부구조냐고 물어야 한다. 당연히 닭이 상부구조다. ‘인력’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말이다. 잡아당기는게 인력인데 거기 누군가 와서 잡고 당기고 하려면 벌써 단계가 복잡해진다. 단계가 있으면 퍼즐의 원소가 아니고 과학이 아니다. 우주에는 척력밖에 없으며 척력 하나로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플러스 마이너스 개념도 잘못 이해된다. 전기는 마이너스다. 음전자가 양공을 찾아가는 것이며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는 것이다. 마이너스는 화살이고 플러스는 과녁인데 궁수는 화살을 쓸 뿐 과녁을 들고다니지는 않는다. 우주 안에 마이너스는 있어도 플러스는 없다. 플러스가 있다고 여긴다면 ‘1+1=2’의 부정이다. 영어에 ‘가다’는 있어도 ‘오다’는 없다. come은 모인다는 뜻이며 갈때도 come이다. 플러스는 마이너스를 반대편에서 본 것이며, ‘오다’는 ‘가다’를 반대쪽에서 본 것이다. 사실이 다른게 아니라 눈이 달라진 것이다. 눈을 바꾸면 ‘1+1=2’에서 어긋나고 만다. 누가 눈 바꾸라고 했느냐 말이다.
마이너스를 지동설로 보고 플러스를 천동설로 보면 과학자들은 양동설을 쓰는 셈이다. 말도 안 되는 수작을 태연하게 저지른다. 과학자들의 잘못된 언어사용은 따지자면 한이 없다. 상대어가 아닌 절대어를 써야 한다. 허락없이 눈 바꾸지 말아야 한다. 근거없는 양동설 쓰지 말고 마이너스 하나로 통일하라는 말이다.
인과율에 맞는 표현을 써야 한다. 대개는 어떤가? 개의치 않는다. 진실을 보고 끝까지 갈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잘못이 확실하다면 과감하게 ‘처음부터 다시’를 외쳐야 한다. 수 천년간 무리없이 라틴숫자 써왔더라도 아닌 것을 알았으면 결단하여 아라비아 숫자로 바꿔야 한다. 자연은 한 개, 아니면 한 마리, 아니면 한 그루 하는 씩으로 덩어리를 이루었다. 그것이 자연의 진법이다. 기승전결이 한 덩어리 되는 것, 원인에서 결과까지, 입력에서 출력까지, 시작에서 끝까지, 작용에서 반작용까지 모두 한 덩어리를 이루는 자연의 덩어리 법칙은 시간의 순서를 공간의 방향으로 변환하는 것이며 여기에 일을 투입하여 이를 다시 시간으로 풀어내면 결이다. 결을 읽는 법을 배우고 결따라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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