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형 인간 완전성형 인간 세상을 근원에서 뒷받침하는 법칙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다. 사람의 인생 역시 작용반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삶의 작용은 동기부여고 인생은 그 반작용이다. 동기부여가 삶의 에너지를 퍼올려 공급하면 인생은 그 에너지를 소비한다. 두 종류의 동기부여가 있다. 하나는 완전성이며 하나는 불완전성이다. 완전성은 내 안에 가치판단의 시소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그 시소를 가동하여 내 안의 것을 밖으로 표현하려는 것이고, 불완전성은 시소가 나의 바깥에 있고, 상부구조에 있고, 공동체에 있어서 그 시소에 매달려 엉기려는 것이다. 내 바깥의 시소에 올라탐으로써 외부로부터 삶의 목표를 조달하는 것이 콤플렉스다. 스스로는 삶의 목표를 조달할 수 없으므로 누군가와 대척점을 세운 다음 상대의 행동을 보고 거기에 연동시켜 나의 행동을 결정하려는 본능이다. ◎ 완전성의 동기부여 – 내 안의 시소를 가동시켜 표현한다. ◎ 콤플렉스 동기부여 – 외부의 시소에 올라타려 엉겨붙는다. 각인효과가 있다. 닭이나 오리는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알고 평생 따라다닌다. 한 번 콤플렉스의 길로 방향을 잡은 사람은 그 방향으로 계속 간다. 완전성의 길로 방향을 잡은 사람 역시 그 방향으로 계속간다. 완전성의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스스로 완전해질 때 반응할 수 있다. 타인과 수평적으로 반응할 때 친구를 얻게 된다. 친구에서 팀으로 발전하고, 팀에서 세력으로 발전하고, 세력에서 세상을 다 바꾸는 혁명으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 방향성이다. 널리 상호작용 하는 것이다. 어원으로 보면 ‘Social’은 사귄다는 뜻이다. 사귄다는 것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역시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 사귐이 사람과의 사귐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역사와 사귀고, 자연과 사귀고, 진리와 사귀어야 한다. 역사와, 자연과, 진리와 팀을 이루어야 한다. 크게 세력을 이루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인류를 진보시켜야 한다. 인류의 문제해결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전성 그 자체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신이 아닌데 뭐가 완전하다는 말인가?’ ←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 많다. 완전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개에게는 개의 완전이 있고, 닭에게는 닭의 완전이 있다. 개는 도둑을 지켜야 완전하고, 닭은 알을 낳아야 완전하다. 사람은 소통하여 집단지성에 참여함으로써 제 안의 가능성을 드러내야 완전하다. 무엇이 완전한가? 친구와 상호작용하고 친구와 반응하는 것이 완전하다. 그렇게 팀을 이루고 세를 이루는 것이 완전하다. 우일신 하는 것이 완전하다.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진도나가주는 것이 완전하다. 완전한가 불완전한가가 아니라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세상의 어느 방향을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다. 중요한건 방향이다. 콤플렉스에 의해 동기부여 되는 사람들은 대개 마음 속의 라이벌을 정해놓고 있으며, 그 상대를 꺾는데서 인생의 의미를 얻는다. 혹은 특정한 국가를 미워하여 가상적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들은 반북이든 반미든 누군가를 반대하는 방법으로만 자기의 목표를 세울 수 있다. 무형의 라이벌도 있다. 돈을 라이벌로 삼기도 하고 출세를 라이벌로 삼기도 한다. 그들은 결국 실패한다. 왜? 인간에게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삶의 동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기가 없다. 인생의 허무다. 돈으로 목표를 삼은 사람은 돈을 벌어도 계속 돈이 부족하다. 왜? 돈이 필요해서 돈이 목표가 된게 아니고, 실은 삶의 목표가 필요한데 그 목표가 없으므로 돈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스스로 납득이 되는 삶의 목표를 만들어 낼 때까지 콤플렉스라는 망령은 떨어지지 않고 계속 괴롭힌다. 콤플렉스란 결국 삶의 분명한 목표를 만들어내라는 본능의 압박이다. 콤플렉스란 어디엔가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왜 화가 났을까? 그 화를 낼 분명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화가 나 있다. 노숙자 관련 기사에 많은 네티즌들이 악플을 달고 있다. 그들은 왜 화를 낼까? 원래 마음 속에 화가 가득 들어차 있는 판에 마침 화를 터뜨려도 뒷탈이 없는 만만한 상대로 노숙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 사람의 내부에 1만 기압의 화가 팽팽하게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 콤플렉스 - 내게 없는 것을 채운다. ◎ 완전성 – 내 안에 가득찬 것을 터뜨려 표현한다. 완전하면 통하고, 통하면 낳고, 낳으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허무를 극복한다. 허무를 극복하면 더 이상 콤플렉스에서 동기가 부여 되지 않는다. 그 경우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가 된다. 내게 없는 것을 채우려는 욕망이, 내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는 욕망으로 대체된다. 인생의 태도와 자세가 바뀐다. 가는 길이 바뀐다. 목표가 바뀌고 동기가 바뀐다. 삶이 바뀐다.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 반응이다. 사람들이 화가 나 있는 이유는 상대가 내게 반응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프로포즈에 상대가 응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이력서에 회사가 답신을 보내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성공을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콤플렉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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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를 타는 서퍼는 물 위에서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실제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물의 치고나가는 힘이다. 그 치고나가는 기세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파도를 노는 것이 아니라 물이 서퍼를 놀리는 것이다.
완전성의 문제는 인간이 완전한가 불완전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의 문제이다. 불완전성에 초점을 맞추면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므로 계속 나빠지고 만다. 파도를 타면서 물과 친하지 않은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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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러하듯 감탄과 함께 또 한 번 크게 깨우치고 갑니다.
인간이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오만인인지ㅎ~ 질문하고 싶네요.
질문이 이상하다면 ...상관없이 답을 듣고 싶네요.
질문이 이상하군요.
'짝을 맺을'->결혼?
구조론의 짝짓기는 '사건의 유발'을 말하는 것이오.
'오만'이라는 표현은 상대어이므로 구조론에서는 안 쓰는 용어이오.
현실을 벗어난다는 것? 그게 어쨌다는 건지?
중요한건 사건이오.
사건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오.
진리와 친구를 맺는다는 것은 역시 사건을 일으킨다는 의미이오.
현실 속에서 세력에 가담해야 하고 사건의 중심에 서야 하오.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진리와 친구를 맺어봤자 의미는 없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수한 발명품들 중에 실제로 제작된 것은 하나도 없소.
그 시대와 짝을 짓지 못한 것이오.
그래도 다빈치는 노트 한 권을 남겼지만
무수한 다빈치들은 노트 한 권 못 남기고 사라져갔을 것이오.
19세기 유럽인들은 매주 무도회를 열어서 짝짓기를 시도했소.
99프로는 쓸데없는 시간낭비였지만 그래도 무언가 확률은 높였소.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남부지방의 부유한 농장주들도 이를 따라한답시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매주 무도회를 열어 짝짓기를 시도했지만 단지 인종차별제도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을 뿐이오.
19세기 프랑스 부르조아 계급의 무도회는
예술가들이나 발명가들 모험가들 작가들이 참여하여 그들을 후원하는 귀족들과 어울리면서
뭔가 의미있는, 생산성 있는 시대의 트렌드를 생산했소.
끝없이 새로운 유행과 문화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었소.
미국 농장주들의 무도회는 그냥 KKK 양성소에 지나지 않았소.
그들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지도 못했고 발명가나 모험가 예술가를 키우지도 못했소.
유일한 성취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 그것 뿐.
그냥 시대에 뒤쳐진 시골 졸부들의 자위파티였던 것이오.
그것은 요즘 공화당에 유행하는 딴나라 인간들의 티파티 비슷한 배설장소.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오.
유태인은 세계를 떠돌면서 부를 이루었소.
그러나 그건 전체 유태인의 극소수가 그러할 뿐.
러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일부 유태인은 아직도 2천년전의 히브리어를 쓰면서
눈꼽만큼의 진보도 이루지 못했소.
오늘날 이스라엘이 개떡된 상황은 그 러시아 지역의 시대착오적인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려 놓았기 때문이오.
동남아 지역의 화교공동체는 유명한데
그들중 일부는 아직도 19세기에 머물러 있소.
건물이나 옷이나 음식이나 가구나 유행이나
그 모든 것이 본토에서 이주하던 아편전쟁 시대에서 올스톱.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해 가지는 편견은
일본에서 볼수있는 재일교포에 대한 이미지와 정확히 같소.
그 이미지는 한국인들의 구로동에 몰려 있는 조선족에 대한 시선과 같소.
갑자기 일본에 한류가 전해져서 일본인들이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고 있는데
재일교포를 보면서 얻은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와
한류스타를 보고 얻은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의 차이는
유럽 중심부를 장악한 유태인 부자들에 대한 이미지와
러시아 시골에서 2천년전 유태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시골 유태인에 대한 이미지와의 차이만큼 크다는 거.
이런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눈을 얻어야 하오.
두 얼굴의 유태인
두 얼굴의 한국인
두 얼굴의 중국인
두 얼굴의 무도회.
모여서 짝짓기를 열심히 한 결과 더 퇴행하는 현상과 그 반대의 현상.
한나라는 모일수록 퇴행하고 우리는 모일수록 진보하오.
진리와 짝을 짓는다는게 모일수록 퇴행하는 현상일 확률은 매우 높소.
무뇌좌파들은 한 곳에 모여있으면 더 퇴행하고 이 현상은 수구꼴통도 마찬가지이오.
서울대 출신 중에 유난히 또라이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소.
지방대나 비서울대라면 그 중에서 똑똑한 1프로가 사회적 발언을 하는데
서울대 출신은 그 중에서 제일 멍청한 넘이 사회적 발언을 하오.
그 이유는?
외부와 짝을 짓느냐 내부와 짝을 짓느냐.
모여서 짝짓기를 열심히 하면 최악으로 가는 현상이 있소.
그것은 진리에 대한 배반이오.
'현실을 벗어난다'는 표현이
모여서 짝짓기한 결과 최악으로 퇴행하는 현상을 말하는건 아닌지?
그 반대이길 바라오.
진리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오.
하루종일 찜질방에 모여 수다 떠는 아줌마들처럼 분리수거로 가기 쉽소.
짝을 맺을 사람이 없다고...
인간이 현실을 벗어난다는 것....
이러한 태도가 오만인가?에 대한 답은...
오만이라는 표현은 상대어이기 때문에 써서는 안되고, 절대어를 써야 한다.
진리는 사귐이어야 하고, 짝을 지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세력에 가담해야 하고, 사건의 중심에 서야 한다. 사건이 없이 홀로 갖히거나 고립되면 진리와 짝을 맺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퇴행만 일어날 뿐이다.... 이리 정리 해 봅니다.
질문이 잘못된 것과 상관없이 그저 이런 답변을 내놓을 이가 몇이나 될까? 그자체에 흐뭇하여 만족감이 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글과 답변이 언제나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하나에서 계속 글과 답변들이 복제되고 있는데도, 때로는 제대로 잘 알아듣지 못한것도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드네요.
지적 호기심이 무진장 쏟아져 내리는 구조론.
무엇보다 즐거운 그 두뇌 게임에 빠져놀다가, 이번 글은 숨 막히는 화두를 제게 던지는 군여.
구조론 좀 안다고, 전략가인양 설쳐왔는데, 결국 남의 시소에 빌 붙어 지낸 신세였나 봅니다.
처음 부터 다시 써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콤플렉스으..
실패한 교사 - 문제행동보고 문제아 취급하여 문제행동 교정에 매달리는 교사
보통의 교사 - 문제행동이 발생하는 원인을 찾아 문제행동을 줄이려는 교사
훌륭한 교사 - 문제행동에 숨겨진 잠재력을 찾아 성장으로 이끌어 자연스럽게 반에 기여토록 하는 교사
세얼간이, 완득이가 생각나오. 수준은 완득이가 한 수 위.
이제 짝짓기가 같이 직접만나서 대화도 있겠지만 골방에서도 짝짓기가 되는 세상 아닌가요. 인터넷카페나 동호회 보면 정말 그냥 흔한말로 수준높은 정보나 사고를 공유하는곳도 많더군요. 이곳처럼.. 그런곳에서 글 남기고 의견듣는것도 세력에 참여하는 한 방편아닐까 하네요.
“…사귄다는 것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사귐이 사람과의 사귐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역사와 사귀고, 자연과 사귀고, 진리와 사귀어야 한다...팀을 이루어… 크게 세력을 이루어… 인류를 진보시켜야 한다. 인류의 문제해결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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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 “이해하지 말고 반응하라”에서 ‘짝지을 조건이 갖춰지면 완전한 상태다’를 보고, 본 강론의
이 대목에 와서 한 인간에게 격한 반응으로 다가오다!
내 맘 속속들이 모두 거울에 비추어진 기분. ‘다음 단계의 할 일’ 발견. 갈증해소!
이건 초진보?의 언어. 에너지가 실린 절대어! 기승전결의 그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