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01199&CMPT_CD=P0001
5천 결사대가 탄현을 포기하고 황산벌을 선택한 진짜 이유가 뭘까요?
기사처럼 계백에 대한 평가는 과대 평가된 것일까요? 백제가 망하니 기록도 없어서 백제말 삼대충신이라는
성충,흥수,계백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고... 삼국사기가 유일한 근거인지...
정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혼란 일색이네요. 오마이뉴스 역사 분석은 신뢰가 잘 안되서...
오마이뉴스 기사는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오.
적군을 전선에서 막지 서울에서 막는 등신이 역사에 어딨소?
오천명으로 오만명을 막아야 하면 그게 결사대지 아니고 무엇이오?
제사 삼국사기를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나지만
원래 전선에서 막으려 했는데 김유신이 은밀히 기동해서 백제군이 놓친 걸로 알고 있소.
백제군은 다 변방의 전선에 있고
서울에 있는 병사는 왕을 지켜야 하고 긴급히 동원할 병사가 없었소.
백제군이 못해도 딸딸 긁으면 10만은 될 겁니다. 근데 왜 오천명?
신라군이 5만인데 보통 전쟁을 할 때는 10을 이룬 다음 3을 보내고 7로 서울을 방어하게 합니다.
전선에 군사를 다 보내면 위화도 회군을 하기 때문이지요.
최영도 원래 20만병을 일으켜서 이성계에게 5만을 주었고 나머지는 개성을 지킨 겁니다.
윤관이 16만병을 일으켜서 여진을 정벌했는데 16만이 다 갔다면 중국을 다 정복했을 겁니다.
16만이 다 간게 아니에요.
임진왜란때 일본군 50만이 오사카에 집결했습니다. 다 넘어온거 아닙니다.
흔히 당나라가 백만대군을 일으켰다고 나오는데 백만이 다 왔나요? 천만에.
백만 일으키면 30만 온 겁니다.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다 합쳐도 300만을 겨우 넘었을 거.
추정하면 신라 100만, 백제 80만, 고구려 150만 정도? 100만대군이 오면 고구려 인구만큼 온다는 건지.)
신라는 경주에 10만, 새로 뺏은 서울에 5만 정도 병력이 있었을텐데
신라의 기습은 주로 한산주 도독인 김유신이 관할하던 서울병력일 것이고
경주병력은 왕궁을 지켜야 하므로 조금밖에 안 움직였을 겁니다.
경주병력이 동에서 서로 넘어갔으면 지리산도 못 넘고 백제군에게 딱걸려서 전멸했겠지요.
서울병력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바람에 백제가 단숨에 당한 겁니다.
그쪽으로 올 줄 누가 알았냐고요.
글고 당군은 원래 기벌포에서 막으려 했는데
갯벌에 당나라군사가 빠져서 허우적대면 습격해서 전멸시키려고 했습니다.
근데 당군이 수륙병진정책을 썼어요.
일부는 상륙하고 일부는 배에서 호응하는 형태로
두 개의 뿔 전략을 썼기 때문에 백제군이 공격시기를 놓친 겁니다.
당군이 갯벌에 갈대숲을 베어 던지며 상륙했는데 이런 전개는 의자왕의 무능 때문입니다.
의자왕이 젊었을 때는 잘 했는데 나이 들고 실전감각을 잃었어요.
왕이 늙으면 신하도 늙는데 전성기의 맹장들이 은퇴할 시점인데 세대교체에 실패했다고 봐야죠.
의자왕이 공주로 도망간 것을 보면
전라도쪽 귀족들이 두 손 놓고 구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믿고 피난갈 곳도 없었던 겁니다.
백제군의 패배이유
1) 신라군의 우회기동(프랑스군이 마지노선 지키다 망한 것과 같음)
2) 당군의 수륙병진작전(갯벌상륙 성공함)
3) 남부지역 백제귀족들의 수수방관.(공산성에 고립)
삼국사기에 나오는 성충, 홍수 이런 것도 쓸데없는 야사입니다.
전쟁이 누구의 말 한 마디로 결정되고 어쩌고 이런건 어린애 같은 생각입니다.
결정적으로 백제는 동원할 병사가 없었던 것이며
그 이유는 동부전선과 북부전선 서부전선을 동시에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근데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으면 원래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오래되어서 저의 기억이 헷갈린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기자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보는 근거는
이 양반이 우리나라 지도 한 번 본 적이 없이 소설을 썼다는 겁니다.
금강하구가 좁아지는 부분이 웅포인데 웅포에서 사비까지 직선거리로 17키로입니다.
탄현에서 황산벌까지 대략 30키로입니다.
황산벌에서 사비까지도 30키로입니다.
30키로면 슬슬 걸어가도 7시간이요
군인이 행군속도로 가도 반나절 거리입니다.
발빠른 병사면 걸어도 5시간 안에 도달하는 거리인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내륙 깊숙히 적을 유인하고 자시고입니까?
거기가 거긴데?
고구려처럼 땅이 넓어서 한 800키로 정도 끌어들여야 유인이지.
탄현이 곧 황산벌이고 웅포가 사비성이고 바로 코앞이에요.
거의 평야라서 말 달리면 두시간 거리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 생각할 수 없는 내용.
황산벌 한 번 안 가보고 이런 기사를 쓰다니 참.
신라는 동쪽이고, 백제는 서쪽이고 이 정도 생각하고 소설 썼을 거.
신라군은 북쪽에서 오는데 무슨 동쪽의 탄현?
김유신 생가가 진천인데 대전 위에 청주고 그 바로 위입니다.
김유신이 자기집 생가 마당에서 말 타고 달려도 한나절이면 황산벌에 옵니다.
임진왜란때 신립이 왜 새재에서 막지 않았느냐는 바보같은 말도 많지요.
당시는 현장에서 병력을 모으는 구조인데 문경 새재 산꼭대기에서 무슨 병력을 모아?
상주에서 병사를 모으거나 충주에서 모으거나 둘 중에 하나.
상주는 늦었고 충주에서 병력을 모으면 탄금대 뿐.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
물론 뛰어난 장수라면 별동대로 2000명쯤 보내서 새재를 지키게 할 수 있지만
함경도에서 여진족 막던 장수가 직속부하도 없이 그냥 내려와서 현지 군대를 언제 장악?
부대 장악도 못하는 판에 어떻게 병력을 쪼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당시 백성들이 왜군의 전투력에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집결 자체가 쉽지 않아서
힘깨나 쓸 젊은이는 도망치고 노인이나 어린이를 대신 보내서
'집결지에 가면 어리다고 다시 돌려보낼테니 집으로 오거래이'
이러는 판이었습니다.
병력 분산배치는 곧 도주, 해산으로 되는 판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