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를 움직이는 것은 효율이다. 효율은 1을 투입하여 2를 얻게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의 기본은 대칭이다. 대칭은 시소모양으로 되어 있고 ┻로 나타낼 수 있다. ◎ 존재는 에너지에 의해 작동된다. ◎ 에너지는 효율에 의해 얻어진다. ◎ 효율은 1로 2를 결정하는 대칭구조로 달성된다. ◎ 대칭구조 ┻에서 수직 1이 상부구조, 수평 2가 하부구조다. ◎ 1을 차지하고 방해자를 제거하는 마이너스로 승리한다.
존재는 에너지, 에너지는 효율, 효율은 마이너스다. 마이너스는 방해자의 제거로 가능하다. ┻의 탑 포지션을 차지하고 아래로 딸린 둘 중에서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탑을 차지해야 한다.
탑을 차지하려면 상부구조로 올라서야 한다. 문제는 상부구조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서 1은 잘 보이지 않는다. 2는 잘 보인다. 왜인가? 인간이 이미 ┻에 태워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미 사건에 개입해 있기 때문에 사건의 전개가 보이지 않는다.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이고 가리켜지는 달은 보이지 않는다. 상부구조는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할 수 있다. ◎ 보이지 않는 상부구조를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은 변화를 통하여 사물을 인식한다. 변화가 일어났다면 이미 사건은 탑 1에서 촉발하여 바텀 2로 전개한 다음이다. 인간은 다만 2를 발견할 뿐이다. 단지 하부구조만 볼 수 있다. 전모를 보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인간은 학습과 훈련, 전체과정의 경험 그리고 깨달음에 의해서만 상부구조를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1을 찾아낼 수 있다. 이때 관점의 문제가 제기된다. 관측자가 이미 시소에 올라타고 있다는 문제다. 인간은 변화를 관측하며 인과, 시종, 상하, 음양, 남녀, 우열, 강약 등의 대칭을 포착하여 존재를 이해한다. 이러한 대칭은 이미 2다. 사건이 진행되어 에너지가 작동한 것이며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존재는 에너지를 타고 운동한다. 쏘아진 화살과도 같다. 인간이 화살의 존재를 포착했을 때는 활은 이미 쏘아진 다음이다. 이때 인간의 눈은 화살을 따라가며 과녁을 발견할 뿐 궁수는 보지 못한다. ◎ 원인(궁수) → 현재진행(화살) → 결과(과녁) 결과는 잘 보이지만 원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원인에서 결과로 흐른다. 인간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결과가 나타나고 난 다음이다. 원인은 조용히 과거로 숨어 버렸다. 보이지 않는다. 가을의 수확은 보이는데 봄의 씨앗은 보이지 않는다. 씨앗은 땅 속에서 썩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건은 시간을 타고 전개하는데 인간은 시간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건의 전모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커튼이 내려져 있다면 버스 안의 승객은 버스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버스 밖으로 나와야 버스의 출발을 알아챌 수 있다. 반드시 사건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이것이 관점의 이동이다. 시소모양의 대칭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면 반드시 배후에 1이 숨어있고, 상부구조가 숨어 있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여자와 남자, 음과 양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면 반드시 배후에 무언가 있다.
밤과 낮을 결정하는 태양이 있고, 남과 여를 결정하는 공동체가 있고, 원근을 결정하는 구도가 있고, 주인공과 악역을 결정하는 주제가 있다. 이들은 모두 한 차원 위에 있다. 상부구조로 올라서야 보인다.
자기를 배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이 시소에 올라타고 있으므로 구조를 포착하지 못한다. 사건에서 자기를 배제하는 훈련,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이동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 관점의 이동 –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려면 사건에서 자신을 배제하는 객관화 훈련을 해야 한다. 존재의 작동은 연역이다. 연역은 객관이다. 연역할 수 있어야 구조를 바르게 추적할 수 있다. 자기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연역이다. 움직이는 시소에서 내려버리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진보와 보수가 씨름하는 판에 자신이 진보, 혹은 보수에 가담해 있으면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자기를 사건에 개입시키는 한 이항대립적 사고, 흑백논리의 사고, 선형사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보이지 않는다. 놀이개를 향해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홀리고 만다. 공연에 참여하고 있는 관객은 마술사의 속임수를 보지 못한다.
인간의 판단이 틀리는 이유는 룰이 바뀌기 때문이다. 룰이 바뀌는 이유는 환경이 변하기 때문이다. 상부구조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상부구조는 언제라도 상부구조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을 조정한다.
여야가 대립하여 시소를 이루었다면 국민이 1이다. 수요와 공급이 대립하였다면 시장이 1이다. 모든 것은 상부구조 1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수요와 공급을 희생시키되 시장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도박판에서 누가 돈을 따더라도 고리를 뜯는 하우스장은 손해보지 않고, 경마장에서 누가 돈을 잃더라도 세금을 뜯어가는 마사회는 돈을 잃지 않는다. 복권사업자는 이미 로또를 맞아놓고 있다. 시소 위에 또다른 시소가 있다. 구조는 5회에 걸쳐 중첩되어 있으며 최종단계에서 1은 세력형태로 존재한다. 세력은 조직을 확장, 발전, 진보시킨다. 진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고 멈추면 죽는다. 그것이 시스템이다. 모든 존재는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고 빌붙어 있다. 이를 독립시켜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것이 시스템이다. 인간이 살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일을 해야 한다. 반드시 다른 것에 빌붙어야 한다. 에너지를 조달하기 위해서다. 시스템은 에너지 순환의 전체과정을 책임지는 구조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세력을 이루어야 하며 그 세력은 점점 발전해야 한다. 문제해결의 방향은 마이너스다. 탑포지션을 차지하여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고 대세력의 시스템을 형성한 다음에는 범위를 좁혀가며 목표를 타격하여 구체적인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려면 자기 내부에 상호작용하는 시소를 세팅해야 한다. 대칭의 시소는 음양, 남녀, 노소, 원근, 인과 등으로 존재한다. 대칭에 태워지지 말고 밖으로 빠져나와 자기 내부에 대칭을 세팅시켜야 한다. 논객들은 대칭 2에 머무르며 상대를 치는 바텀포지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정으로 반을 치려 하거나, 혹은 진보로 보수를 치려 하거나, 혹은 남으로 여를 치려 하거나, 양으로 음을 치려 한다.
이들은 시소에 올라탄 존재이며, 다른 것에 빌붙어 사는 존재이며, 독립하지 못한 존재이다. 이들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다. 그들은 시소에 태워져 배후의 보이지 않는 손에 조정되고 있다.
이런 대칭구조를 자기 내부에 세팅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통일된 시선, 곧 주제와 스타일을 만드는 방법으로 인간은 창의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을 내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 내부에 시소를 갖추는 것이다. 자기 안에 진보와 보수, 음과 양을 동시에 갖춘 것이다. 그러한 하나의 도구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저절로 창의가 된다. 그것은 구조를 복제하는 툴이다.
콤파스는 원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같은 크기를 복제하는 도구다. 만화가든 소설가든 화가든 음악가든 모든 작가들은 자기 내부에 밸런스를 조율하는 콤파스 갖추고 있으며 같은 것을 복제한다. 그것을 얻었을 때 무진장한 창의가 가능하다. 정보의 증폭과 복제와 공명이 가능하다. 기하급수적으로 번지게 할 수 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시소가 곧 하나의 콤파스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이미 컴퍼스를 가졌는가? 그것을 가져야 창의할 수 있다. 컴퍼스를 가져야 전투에 승리할 수 있고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표적을 타격할 수 있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저절로 종속되고 만다. 무의식중에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컴퍼스없는 딴나라 알바들처럼 말이다. 스트레스에 조종되어 자기를 마이너스 함으로써 공동체에 기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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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
항상 좋은내용, 감사하게 잘 보고 있읍니다.
결국,
고려의 대상이 되는 界를 정하는것과
상부구조에서 작용할수있는 플러스를 파악하는것이
관건이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또,
보는 '눈'을 가졌는가에서 걸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