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질문 다섯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이에 답할 수 있어야 스승의 자격이 있다. 세상 앞에서 발언할 자격이 있다. 1) 나는 인간을 믿는가? 2) 나는 죽음을 극복했는가? 3) 나는 미추를 구분할 수 있는가? 4) 나는 역사의 흐름을 느끼는가? 5) 나는 자기다움을 얻었는가?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는 많은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바퀴벌레도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미 70억을 낳아서 지구가 비좁은 판이다. 거기에 참다운 의미는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문명인의 답을 말해야 한다. 생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고 이제 그 강을 건너야 한다.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어쩔 것인가? 구조로 보면 답은 언제라도 상부구조에 있다. 한 개인에게 인생의 정답은 없다. 날아가는 화살의 정답은 쏘아보낸 활에 있다.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지만 정작 과녁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냥개는 토끼를 쫓지만 실제로 보상을 주는 사람은 그 개를 부리는 포수다. 화살이 과녁을 맞혀도 칭찬은 궁수에게 듣는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표적을 쫓아가지만 허상일 뿐이다. 진짜는 따로 있다. 누가 내게 보상하는가? 누가 나를 칭찬하는가? 행복은 결과다. 사건의 원인측을 보아야 한다. 원인은 상부구조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위에 무엇이 있는가? 천국? 하느님? 관세음보살? 옥황상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생의 화살을 쏘는 활은 공동체다. 그 활을 잡당기는 힘은 공동체의 진보에서 나온다. 공동체라는 활이 공동체의 진보라는 시위를 당겨 인생이라는 화살을 쏘아보낸다. ◎ 존엄 – 세계관 – 나는 인간과 그 공동체를 믿는가? ◎ 자유 – 정체성 – 나는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강한 개인인가? ◎ 사랑 – 가치관 –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가? ◎ 성취 – 역사관 – 나는 적의 편에 봉사하지 않는가? ◎ 행복 – 인생관 – 나는 자기다움을 얻었는가? 그 활의 실상이 이러하다. 단어와 표현은 바꿔도 좋다.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다. 전개하는 순서와 방향이다. 언제라도 상부구조, 원인측, 공동체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상부구조에서 집단 무의식이 작동한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도 실제로는 공동체를 자극하여 긴장시키는 방법으로 잠복된 리스크를 드러냄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공동체를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자연에서 특정 종이 지나치게 번식하여 생태계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확률이 작용하여 균형을 찾아가듯이 인간의 잘못된 행동도 장기적으로는 확률이 작동하여 공동체를 진보시킨다. 무의식은 스트레스 형태로 나타난다. 개가 짖는 이유는 도둑을 쫓을 목적에서가 아니라 낯선 냄새에 스트레스 받기 때문이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도 스트레스에 의해 조종되기 때문이다. 악은 사회를 해치지만 동시에 그 악 자체도 해친다. 바이러스가 일시에 창궐하다가 너무 빨리 숙주를 해쳐서 사멸하게 되듯이 악은 사회를 파괴하는 속도로 자기파괴를 행하여 도리어 자멸하게 된다. 그렇다. 인간은 무의식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개인의 판단에 의한 행동으로 믿지만 실제로는 스트레스 형태로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상부구조에서 보이지 않는 활이 그대를 쏘아보내고 있다.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을 알고, 실상을 알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허수아비가 되지 말아야 한다. 헛살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가더라도 알고가야 한다. 스승이 되려면 말이다. 1) 존엄의 문제.. 무의식의 조종에서 벗어나라. 존엄의 문제, 곧 세계관의 문제,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시스템을 믿고, 세력을 믿고 방향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시야가 있어야 한다. ◎ 유태인이 세계정복 음모를 꾸민다. ◎ 살인자나 유괴범은 때려죽어야 한다. ◎ 경상도 지역이나 전라도 지역 사람은 어떻다. ◎ 가난뱅이가 가난한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이다. ◎ 조선족과 외국인 노동자가 못된 짓을 하고 있다. ◎ 빨갱이들이 준동하여 나라를 망치고 있다. ◎ 여자 혹은 남자들은 하여간 어떻다. ◎ 양아치나 거지, 깡패들이 문제다. 이러한 편견들이 인간에 대한 불신이다. 이는 시스템의 존재, 세력의 존재, 방향성의 존재, 공동체의 존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에 집착하고 부분에 집착하는 소승적 태도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마지막 장면을 참고할 수 있다. 엄석대가 감옥에 달려가는 내용이다. 이는 이문열이 인간에 대한 저급한 증오와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들킨 것이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유아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을 비하하는 것은 공동체를 비하하는 것이며, 그 공동체의 일원인 자기부모를 비하하는 것이고, 곧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인간과 공동체의 작동원리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를 가져야 한다. 거기서 신뢰가 얻어지며 거기서부터 진짜 게임은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편견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무의식에 조종된 거다. ◎ 왜 인간은 편견을 갖는가? - 무의식이 배후에서 조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적을 발견하려 한다. 적을 찾아내서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는 무의식에 조종되어, 없는 적을 만들다가 자신이 공동체의 적이 되어버리는 형태로 악역을 맡아서 공동체를 단련시킨다. 2) 자유의 문제.. 생물학적 본능을 극복하라. 무의식의 조종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공동체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존엄이며 존엄을 얻고서야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강한 개인이 된다. 그것이 자유다. 이 단계에서 죽음의 극복이 문제가 된다. 죽음의 극복은 단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개인적 허무의 극복, 집단적 부조리의 극복이어야 한다. 타자에 의해 조종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며 삶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왜 사는지 알고 사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지금 어디까지 와 있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는지 아는 것이다. 확실한 삶의 목표를 가지는 것이다. 그럴 때 이성이 본능을 대체하게 된다. 죽음의 두려움 뿐 아니라 일체의 생물학적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감정조절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결단할 때 결단할 수 있는 것이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자유롭다. 3) 사랑의 문제.. 에너지의 흐름에 올라타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대상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친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상호관계 안에 들어와 있다. 얼굴이 예쁘다거나 혹은 맘씨가 좋다거나 한다면 몰라서 적당히 둘러대는 거다. 미추판단 뿐 아니라 일체의 가치판단이 그러하다. 친연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상호관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예쁘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것이고, 멋있다는 것은 관계 안에 살아있는 것이다. 대상에 매몰되지 말고 관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노련한 선장이 파도와 싸우지 않고 그 파도를 타고넘듯이 말이다. 미추든 선악이든 진위든 정사든 일체의 가치판단이 그러하다. 일체의 가치는 상호관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조정된다. 에너지를 태우고 방향을 잡아가며 조금씩 조율하는 것이다. 반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식이라면 유아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리듬을 찾고 박자를 찾아서 강약과 고저와 장단 안에서 밀고 당기며 균형을 찾아가며 속도를 올려가고 방향을 잡는다. 반면 약을 버리면 강도 죽고, 저를 버리면 고도 죽고, 단을 버리면 장도 죽는다. 내 입에 맞는 떡을 먹는다는 발상은 유아적이다. 진정한 것은 내 입맛과 음식의 상호관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난 이게 좋아.’ ‘난 명품백이 좋아.’ 한다면 어린애답다. 좋든 싫든 그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진보하였는지, 우일신 하였는지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랑이다. 4) 성취의 문제.. 자기편을 찾아가라. 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신을 진보시켜 가는 존재이다. 밀고 당기고 하지만 결국은 진보 하나로 귀결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를 배척하고 진보를 선택한다 해서 진보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상호작용 안에서 진보가 단련된다. 진보하기 위해서 보수해야 하는 역설이 작용할 때도 있다. 밀고 당기며 상호작용은 계속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보다. 보수는 진보를 위해 기능한다. 적의 편에 가담하여 적을 위해 봉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일관되게 역사의 편, 진리의 편, 공동체의 편, 문명의 편, 인간의 편에 서야 한다. 개인의 성취는 그 안에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돈을 벌었거나, 명성을 얻었거나 해서 우쭐한다 해도 진보의 편이 아니면, 역사의 편이 아니면, 진리의 편이 아니면, 신의 편이 아니면 헛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를 배반하는 것이다. 돈이든 명성이든 성공이든 출세든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는 범위 안에서만 의미있다. 아니면 성취해봤자 적을 위해 봉사하는 성공적인 사냥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친일파는 성공할수록 실패가 된다. 5) 행복의 문제.. 자기다움에 도달하라. 행복은 자기다움에 있다. 그럴 때 인생의 진정한 친구를 얻는다. 참된 친구를 가진 자가 가장 행복한 것이며 나머지는 쓰레기다. 돈을 벌어도 명성을 얻어도 연속극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손에 땀을 쥐며 흥분하고 기뻐하고 탄식하지만 드라마가 끝나면 발 닦고 자야 한다. 남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며 지어낸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내 손에 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생물은 어미로 성장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지만 인간은 자기다움으로 성장하여 진정한 친구를 얻는 것으로 의무를 다 한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나머지는 연속극에 불과하다. ‘친구’라고 표현했지만 가족과 연인과 이웃과 동지와 포함하여 공동체 안에서 사회관계의 밀도를 높여가는 것을 의미한다. 돈이나 명성은 친구를 얻을 확률, 그렇게 공동체에서 기능할 확률을 높일 뿐이다. 공동체 안에서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성공을 얻었더라도 실제로는 연속극을 보고 있는 것이다. 스크루우지 영감의 성공과 같다. 어리석은 자기위안일 뿐이며 유아적인 자기만족일 뿐이다.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지만 정작 과녁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행복을 향해 달려가지만 연속극을 보고 있다. 그 TV 꺼야 한다. 남는 것은 없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낸 궁수를 찾아야 한다. 공자는 인의를 말했고, 노자는 무위를 말했고, 석가는 해탈을 말했고, 예수는 사랑을 말했다. 그 사용한 단어가 다르고, 가리키는 손가락이 다르지만, 가리켜지는 방향은 같고 가리켜지는 달은 같다. ◎ 공자 - 개인보다 시스템 ◎ 노자 – 이성보다 무의식 ◎ 석가 – 분별보다 깨달음 ◎ 예수 – 개인보다 공동체 ◎ 소크라테스 – 지식보다 지혜 공자의 인의는 개인 위에 공동체의 세력과 방향성이라는 상부구조를 드러내려 했고, 노자의 무위는 인간의 목적 위에 무의식과 집단지성이라는 상부구조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같은 달을 가리킨다.
배후에서 나를 쏘아보낸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궁수를 찾으려 한 것이다. 석가의 해탈은 지식의 상부구조를 말한 것이며, 예수의 사랑 또한 공동체의 무의식이 개인을 이끌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소피스트의 지식을 하부구조로 보고 상부구조를 찾은 것이다. 화살은 과녁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궁수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누가 자기를 쏘아보냈는지 생각해야 한다. 답은 공동체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기 안의 가능성을 쏟아내는 것이다. 인간을 신뢰할 수 있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면,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면, 자기편을 찾아갈 수 있다면, 자기다움에 이를 수 있다면 삶은 성공이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 안에 다 있다.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존엄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자유를, 미추의 판단으로 사랑을, 역사의 편에 섬으로써 성취를, 자기다움에 이르러 진정한 친구를 얻음으로써 행복에 이르기가 인생의 정답이다. 진술된 단어나 표현에 매몰되지 말고 건조하게 구조를 봐야 한다. 뭐가 먼저고 뭐가 나중인지 순서와 방향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1번을 얻으면 그 이하는 저절로 술술 풀린다.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이를 하나의 입체적 모형으로 세팅해야 한다.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먼저 전체를 얻은 다음 점차 범위를 압축하여 가는 방향이 정답이다. 인간 위에 상부구조가 있고 거기에 에너지의 밸런스가 있다. 배가 흔들리면 선원은 위태롭다. 상부구조가 흔들리면 밸런스가 작동하여 그대를 흔들어댄다.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배후에서 무의식의 밸런스가 그대를 조정한 것이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조정되지 않으려면, 휩쓸리지 않으려면, 버리는 카드로 이용되지 않으려면, 무심해져야 한다. 쿨해져야 한다. 도구를 손에 쥐어야 한다. 마음이 가는대로 판단하지 말고 무심하게 나침반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존엄 - 무의식에 조종되지 않기, 자유 - 본능에 휘둘리지 않기, 사랑 - 에너지의 흐름을 타기, 성취 - 자기편을 찾아가기, 행복 - 자기다움에 도달하기 이 다섯 나침반으로 삶의 대양을 건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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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지하
정답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그대가 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