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친구가 되고, 프로포즈를 해서, 연인이 되고, 마침내 결혼한다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존재규정에 불과하다. 자연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결혼을 해도 실제로는 남남이나 마찬가지거나, 아니 부부가 아주 웬수로 지내는 일도 있다. 이런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만남은 매일 일어난다. 아침에 깨어나서 만나고 저녁에 퇴근해서 또 만난다. 왜 만날까? 친하기 때문이다. 만나니까 친한 것이 아니고 친하니까 만나는 것이다. 안 친한데 왜 만나? 여기서 친하다는 말의 의미는 넓게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친한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이를 가는 웬수라도 업무로는 친하다. 업무가 친한 거지 사람이 친한건 아니다. 어쨌든 친함이 있으니까 만나는 것이다.
친하다는 것은 같은 일을 하는 동료거나 같은 부대의 전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런 친함이 있으니까 만나는 것이다. 자꾸 만나다 보니 서로 간에 친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친구관계를 공식화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친함은 늦게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늦게 발견되었어도 먼저 와 있었다.
부자유친이라고 한다. 부자간에 안 친해도 근친이다. 구조의 포지션으로 보라는 말이다. 사람이 친한 것이 아니고 포지션이 친한 거다. 친한 정도는 족보에 촌수로 나타나는데 부부는 무촌이라서 가장 가깝다. 0촌이다. 부자는 1촌이고 형제는 2촌이고 아재비는 3촌이다. 사람이 서로 사귄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친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만나다보니 친함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친함이 발견되는 것이다.
동창회 모임에 계속 나오다보니 서로 눈이 맞았다치자. 계속 만나다보니 눈이 맞은게 아니라 친함이 있었으니 모임에 계속 나온 거다. 친하면 프로포즈를 하게 되는데 이는 서로간에 친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상대방에게 확인받는 절차에 불과하다. 뭔가 통하는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소통이다.
이렇게 추구하여 끝까지 가보면 완전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보통 결혼을 완전한 것이라고 믿고 결혼에 골인하는 것으로 드라마를 끝내는 데 이건 3류 동화다. 어린애 동화니까 왕자님과 공주님이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단다 하고 끝내는 거지 본질로 말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맨 먼저 완전성이 온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으며 결혼은 그것을 사회에 선포하여 알리는 일에 불과하다. 결혼이 없던 원시시대에도 완전성은 있었다. 맨 처음 완전성이 있었고 그 안에 갖춤이 나오는데 여기서 스펙이라고 해놨지만 남녀간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칭구조를 성립시키는 장치를 말한다. 예컨대 남자가 고추가 없고 여자가 자궁이 없다면 결혼은 없다. 있을게 없으면 결혼은 안 되는 거다.
예컨대 동성애자라면 남녀관계로는 불완전하다. 갖춤이 없는 거다. 스펙을 물어볼 수 있다. 혹시 동성애자냐고. 혹시 결혼했느냐고. 혹시 쥐박이냐고. 스펙이 어긋나면 남녀간의 구조적 대칭성이 성립하지 않아 관계는 깨진다.
완전성이 앞에 오고 스펙이 다음에 온다. 말하자면 동성애자와도 잠시는 사귈 수 있는 거다. 결혼한 사람과도 사귈수 있고 쥐박이라도 헷갈려서 좋다는 사람 있다. 예수의 마음에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했다는 논리로 보면 관계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 분 관계는 이미 성립한 것이고 그 의미로 이미 결혼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결혼이 가족법의 결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와 인간은 전혀 결혼할 수 없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와는 약간 결혼할 수 있다. 불완전한 가운데도 약간의 완전성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되지 않는다. 동성애자와의 사귐은 프로포즈 단계까지 안 가는 것이다.
완전성>갖춤>소통>친함>만남의 순서로 일은 진행되며 여기서 중간에 깨지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사회적인 공식화는 그 반대로 한다. 실제로는 결혼이 먼저지만 맨 나중에 그것을 공식화 하는 것이다. 예수의 논리대로 가면 1초에 한번씩 이혼해야 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완전한 만큼 갖추고, 갖춘 만큼 통하고, 통한 만큼 친하고, 친한 만큼 만난다. 보는 만큼 아는게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군대 내무반이라면 자꾸 만나다보니 친해진게 아니라 자꾸 만나다보니 웬수가 되어서 칼부림 난다.
구조론은 포지션만을 논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계속 만날 수 있다면 친구, 프로포즈, 연인, 결혼은 없어도 된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만나지 않았어도 친했다. 친하지 않았어도 친했다. 그런 사이가 있고 그런 관계가 있다. 서로에게 보탬이 되고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 경우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공유하는 것이 있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있다. 남진과 나훈아는 안 친하지만 친하고, 태진아와 송대관은 친하지만 안 친하다.
김제동과 이효리는 결혼을 하든 말든 결혼한 부부 이상으로 서로에게서 얻어내고 있다. 각자 두둑하게 챙겨가고 있다. 친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만나는 것이며 오프라인에서 안 만나도 이미 만난 것이다. 구조론의 논리대로면 둘은 이미 결혼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가 마음으로 결혼해도 결혼한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유해진과 김혜수의 교제 기간은 짧았지만 보통 부부가 100년 동안 결혼해서 서로에게서 취한 것 이상으로 이미 챙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레벨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는냐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정신의 소통(친연이라 해야하나?)이 먼저다.라는 말씀이신지요?
보통 일반적인 절차는 친함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고...
너랑나랑은 친구야 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친연을 확인하는 거고,
너랑나랑 사랑하는 사이야 하는 것도 나중에 친연을 확인하는 것이고,
너랑나랑 결혼하자.라는 것도 나중에 친연을 확인하는 거고.
그리고 결혼이란 의미를 반드시 일반적인 제도적인 것만으로 인식하여 거기다가 억지로 끼워맞출 필요는 없다라는 것. 정신적인 친연이 있으면 이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므로....,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라는 것이고,
이것을 솔메이트와 비슷하게 보아도 되는 것인지요?
친연이 있는 사람 중에서 그중에 한 사람과 제도적인 결혼은 한다. 라는 것이고...
하여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연이라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기는 하지만 인연속에 친연이 포개져 있다.라는 의미인듯도 하구요.
이말이 맞다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해주곤 하는데....나는 왜 그렇게 헤맸을까....?
구조론은 건조하게 사건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친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의도가 들어가면
그게 벌써 웃기는 소리가 되는 거지요.
냉정하게 사건 그 자체를 들여다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소통하고 난 다음에 친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통한 만큼만 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영혼이 통하는 소울메이트가 되고 다음 만나라는게 아니라
통한만큼 만난다는 거죠.
이건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알고 난 다음에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연만큼 만나진다는 거죠.
배고픈만큼 맛있다는 말이
배고플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어라는 말은 아니지요.
인연이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하다가는 도리어 실패할 것입니다.
소울메이트가 되려고 하다가는 도리어 실패할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츤데레가 그렇지요.
츤데레는 '좋은데 싫은척 한다'가 아니라
싫은데 자꾸 신경쓰인다면 이미 통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사실을 자기도 몰랐는데 나중 알게된다는 거죠.
츤츤(싫어하는 행동) 데레데레(신경쓰며 챙겨주는 행동)
보통 츤데레 만화에서는 본인은 싫어하는데
제 3자가 '너 사실은 그게 좋아하는 거야' 하고 알려주죠.
건조함과 완전성.
굉장히 공감이 가는데요.
갑자기 옛날 기억의 어느 한순간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아주 오래전 인연과 만남이 주는 피곤함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워할 때,
어느 불교달력에 '인연이란 같은 층차에서 만나는 것이다'(똑같은 문구는 아니었지만)
라는 글귀를 보고 마음이 굉장히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죠.
운명적 만남이란 사실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거죠.
이미 일이나 존재 자체의 완전성이 작동하고 있으니까.
결혼이라는 제도적 완전성이 사랑이란 완전성과 반드시 등가는 아니죠.
부모형제는 자기의지의 선택권이 없었다고 해도,
결혼이란걸 하느냐 마느냐 그게 누구냐는 이미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자기존재의 완전성에 의해 결정되죠.
필요없다면 안해도 되는거고.
ㅋㅋ...늘 그런 생각들이 있었는데...
통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으로 많은 사람들과 그 통하는 만큼만 소통할 수는 있다.라는 생각도 든다.
만난다고 다 통해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친근함 만큼 만나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허전하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이 병이 드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소외감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정작 완벽하게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데 그런 외로움이나 고독감 소외감을 상쇄시키는 것들이 있는데, 결국 그것은 정신의 충만함이라고 할까? 혹은 영적상승이라고도 하고 , 깨달음이라고도 하는데, 결국 불만족 불완전함을 욕망의 단위를 상승시키면서 그런 불만족을 털어내려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본질적으로 이러한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외로움 혹은 고독감 늘 뭔가 조금은 허전한 그런 느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부분에서 보자면 이미 인간은 그런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통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건 정신적인 부분에서 이다.
한편으로 더 생각해 본다면...
인간이 가지는 친연은 결국 주파수가 맞는 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인간은 인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는 상태에서 인연을 만나므로 인연이 있는 만큼 만나는데,
그런 인연들이 그리 흔한 것만은 아니다.
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수월해졌는데,
이것도 인터넷을 통해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친연의 차등을 피해갈 수는 없다.
부모 형제로 맺어졌다고 하나, 정신적으로 반드시 가까운 것은 아니다.
즉 주파수가 비슷해도 더 섬세한 주파수끼리 맞는 것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같은 주파수를 쓴다해도 그 주파수의 파장이 미치는 범위가 가까워질수록 더 섬세한 친연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결코 완전히 같은 주파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이고, 서로 보내는 주파수의 겹칩이 많아질수록 친연관계가 더 밀접하게 성립된다고 생각되고, 결국 이것은 정신의 파장과 같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하여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고유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담으로 그렇다면 중매나, 맞선, 혹은 그냥 만나는 것 자체는 서로 친연이 있어서 만난다기 보다는 의무적, 법적제도로 편입하기 위해, 또는 물질적인 것 때문이라고 보이는데... 이것은 상당히 비인간적이라는 익히 알고 있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인터넷으로 자신과 비슷한 주파수를 찾아가듯이, 중매나 맞선 등으로 자신과 맞는 주파수를 찾을 확률도 있다라고 보이지만, 이는 극히 확률이 낮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광범위하게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있고, 조금 더 섬세하게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도 있다.
비유해보자면...범진보 통합은 광범위한 주파수를 모집하는 것과 같고, 그냥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자고 하는 곳은 더 섬세한 주파수를 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여 광의의 주파수 영역은 주파수가 더 멀리까지 영향을 최대한 미치는 범위까지이고, 더 섬세한 주파수 영역은 그 영역을 제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인가 변화를 하여야 한다면 광의의 주파수가 맞고, 무엇인가를 지키려 한다면 섬세한 주파수 영역이 맞을 것 같다.
광의의 주파수를 공유하려면 섬세한 주파수에 대한 집착을 조금은 버려야 하고, 보편성이 있어야 할 듯 하다.
일반적 삶에서도 광의의 주파수로 얘기하면 별로 부딪힘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주파수 영역을 더 섬세하게 끌어 올리고, 얘기하면 반드시 부딪힘이 생긴다.
거기에서 부딪힘 보다는 서로 공감하는 형태가 생기면 그것이 주파수 영역이 맞는 것이 된다.
확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미 자주 만나는 사이이거나, 혹은 만나지 않아도 잘 통하는 사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광의의 주파수 영역은 섬세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에게 메세지 전달을 할 수 있다.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세한 주파수 영역은 차별, 혹은 뭔가를 가려내기 위해 사용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어차피 하나의 주파수가 퍼져가는 것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주파수 대를 선호한다고 생각된다.
자신과 가까운 것이 섬세한 것이고, 멀리 가면 광의적인 것이 된다.
지금 이러한 것이 사회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광의의 주파수가 보내는 메세지에 쉽게 반응한다고 생각된다.
멀리 있어도 자신과 무엇인가는 겹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겹치는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여 인연이 광의의 주파수라면 친연은 섬세한 주파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한 사람이 보내는 주파수는 모두 하나다.
이런 구분은 가까이서 섬세하게 통하느냐, 멀리서 겹치는 부분만에 반응을 하느냐 하는 차이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과 통하는 사람을 섬세한 주파수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고 보이고,
그럴때 더 친근감을 느끼고, 덜 외로워 하며, 어느정도 만족해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진리는 보편적이듯이...
이념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일 수는 있어도 전체가 하나로 가는 것은 보편성이 있어야 하고,
보편성이 없는 것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보편성은 이미 있는 것이지만, 사회에 보편성으로 남으려면 보편화 시키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럴때 사회에 보편적인 것들이 자리를 잘 잡을 때, 진리가 사회에 잘 녹아 들어 있을 때...진리가 사회에 반영이 잘 되어 있을 때...수준 높은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서로 공유하는 것들이 보편성을 가질 때, 사회는 소통이 잘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서 써 보았네요.^^;
글 지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매너가 없는거죠.
그렇군요 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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