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이것을 욕망과 공포라 생각한다.
완전성에 데미지를 입은 자가 영웅이 된다. 하지만, 그냥 데미지만 입고 죽어나간 사람, 부지기수다. 난 이것을 "공포에 대한 대면" 이라 표현한다. 공포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대면'이라 표현한 것은, 실제 이것이 극복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처럼 운명적으로 그런 역경이 닦처오면 대부분 그 과정에서 죽는다. 운좋게(?) 살아남은 징기스칸은 이 공포를 직시할 수 있게 됐다.
공포를 대면한 자만이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 욕망이 때론 강력해 보이고, 때론 허무해 보이는 이유는, 이 공포의 크기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기합리화 하지만 욕망을 포기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 공포 때문이다. 또 이 공포 때문에 범인들은 생명유지도 되는거다. (이명박의 이 말도 안되는 상황, 바로 공포를 대면한 자의 무서움이다, 그것이 운이든 타고난 병이든)
2. 인과론적 사고의 폐해
인과론적 사고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이 공포가 점점 커진다는 데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그냥 운이다. 마주침이다. 비가 오는 원인은 대기중 습기가, 이슬점이, 등등 원인이 분명이 있다. 그러나 내일 비가 오는 그 사건 자체는 운이다. 인과론적 사고가 깊어지면, 비 오는 사건과 기우제 사이의 인과관계가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모든 사건을 분석하려 든다. 오늘 지낸 기우제와 내일 올 지 모르는 비와는 아무리 분석해도, 그냥 독립된 두개의 사건이다. 이것을 연결하려는 시도, 그것이 공포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분석을 통해서 예측하고 대비해서 공포를 줄여보자는 거다. 그러나, 결코 이 불확실성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공포가 극복되지 않는 것처럼
불확실성, 공포, 그 자체를 인생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한다. 회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새로운 연인, 새로운 사업이 예측가능한가? 분석한다고 분석이 되던가? 그 연인에게 상처받을 가능성, 그 사업으로 쫄딱 망할 가능성, 이거 예측한다고 줄일 수 없다. 이런 분석들 대부분 그 연인,그 사업을 포기할 때 구구절절 변명으로 써 먹는다. 그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하면서,
그러나, 이런 사고로 인한 폐혜는 심각하다. 영원히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점 커진다. 구멍가게도 못한다. 사표? 거의 발작한다. 구멍가게 해서 망해봤자다. 사표 쓴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쉽지 않다. 점점 이게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 간다. 예기가 길어지는데, 이거 우파들의 함정이다. 좌파들의 지성을 공격하는, 아주 쉬운,
연예의 본질은 이 불확실성이다. 인생의 본질도 이 불확실성이다. 내일의 불확실성을 무서워 하지 말고, 내일 어떤 새로움이 나와 대면할까를 기대하라. 공포, 이것과 대면하는 그 크기만큼의 욕망, 그것은 철저히 당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