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문제는 자부심의 결핍 세상은 마이너스다. 마이너스는 사건의 원인측을 결정하고 플러스는 결과측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다. for가 아니라 of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형으로부터의 데미지에 의해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이것이 필자의 구조론이 말하는 바 결론이다. ◎ 위하여(for) – 욕망, 금전 등의 플러스적 요소. ◎ 의하여(of) – 영역침해 등의 마이너스적 요소. 행복이나 미인이나 돈이나 성공이나 뭔가 달콤한 유혹이 동기부여가 되어 인간을 이끈다는 일반의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일억을 그냥 준다면 눈 뜨고 쳐다보지만, 일억 벌게 해줄테니 일이나 하라면 쳐다보지도 않는게 인간이다. 인간은 일억원에 진정한 관심이 없다. 약은게 인간이다. 호주의 애보리진을 문명사회에 동참시키려는 백인들의 노력은 실패했다. 애보리진들은 집도 절도 없이 건조지대의 메마른 강바닥에서 그냥 잔다. 하긴 그곳에는 밤중에 물어갈 호랑이도 없으니 집이 필요하지도 않다. 아침이면 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로드킬로 죽은 캥거루라도 발견하면 하루 일과는 끝이다. 저녁이 되면 백인에게 얻은 술을 마시며 밤새 모닥불을 쬐다가 그냥 쓰러져서 잔다. 그들은 백인들이 준 옷을 삭아서 가루가 될 때까지 입는다. 더 이상 가난해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그들은 머물러 있다. 백인들이 당황한 것은 그들이 백인들에게 아무 것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츄잉껌 기브미. 초콜레또 기브미.’ 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이야기가 되는데, 애보리진들은 초컬릿이건 츄잉껌이건 도무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거듭된 실패로 약이 오른 백인들은 애보리진들이 성인식 때 소년을 혼자 초원으로 보내는 풍습을 구실삼아 소년들을 납치하여 시설에 수용하거나 백인 가정에 입양시켰다. ‘아이를 버렸다’는 구실로 강제로 부모로부터 격리한 것이다. 이 추악한 만행은 1969년까지 계속되었는데 2008년에야 호주 정부와 의회가 공식 사과했다고 한다. 원주민 소년의 1/3이 납치되어 교회 등의 시설에 보내졌다고. 이 내용은 영화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일부 묘사된다. 과연 인간은 돈과 명성과 미인을 원하는가? 천만에. 우리가 인류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소상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을 안다고? 전혀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 인간이 강해지는 때는 데미지를 입었을 때다. ‘원형의 완전성’이 훼손되었을 때의 데미지에 의해 인간은 처음 동기부여 된다. 마이너스가 인간을 일으켜 세운다. 플러스에는 그다지 관심없다. 플러스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징기스칸의 공통점은? 출생에 의문부호가 붙은 사생아(?) 출신이라는 점이다. 징기스칸이 사생아(?)라는 설정은 허영만 화백의 다음 웹툰 말무사에 나온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사생아라기 보다는, 어머니 허엘룬이 자신을 납치한 아버지 예수게이와의 동침을 거부했기 때문에, 예수게이가 수치겔을 둘째부인으로 맞이하여 먼저 벡테르를 낳았고 테무친은 차남이 되었는데, 누가 가문의 적장자냐 하는 문제로 갈등하다 테무친이 벡테르를 죽였고, 그 죄를 추궁당해 포로생활을 하며 고생하다가 어렵게 탈출하여 징기스칸이 된 것이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된 후 허엘룬과 아이들은 부족에서 내쳐졌다. 그 이유는 허엘룬의 옹기라트족이 원래는 황금씨족인 몽골족과 결혼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몽골족이 금나라에 의해 토벌되어 2대 암바카이칸의 사후 칸의 대가 끊어지고 몰락하자 대신 메르키트족을 선택했기 때문에 배신자로 간주하여 몽골 정통귀족들이 허엘룬과 그 식구들을 거부한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된 데는 허엘룬의 높은 콧대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이런건 야사라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옹기라트족이 나중에 자무카 편에 붙는 것을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다. 이 일은 징기스칸에게 커다란 데미지가 되었다. 그의 장남 조치가 유럽을 정벌한 것도 비슷하다. 조치 역시 어머니 부르테가 한때 메르키트족에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조치는 징기스칸의 친아들이 아니다. 진왕 정은 여불위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정복자가 되어 시황제로 등극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는 중도에 멈추지 않았을까? 춘추오패와 전국칠웅들은 패자의 지위에 오르려 했을 뿐 중국을 통일하려 하지 않았다. 고대사회에서 왕가는 일종의 종교적 숭배대상이기 때문에 각국을 정복하고 왕실을 없애버리면 왕권의 신성성이 훼손되어 하극상이 만연하게 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지며 결국 자신의 왕조도 타도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끝내 진시황이 6국을 멸한 결과로 왕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생겨나서 진나라도 망했다. 고려의 무신정치나 일본의 전국시대에 신하가 왕을 범한 결과 전국적으로 하극상이 만연해서 나라가 개판된 예와 같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콤플렉스가 있다. 아버지 필립포스가 후궁을 총애한 이유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고, 필립포스왕이 암살되었을 때 혐의는 어머니 올림피아에게로 향해졌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역시 변방인 코르시카 촌놈으로 폼나는 기병에 들지 못하고 뺑뺑이 치는 포병이 되었다. 무거운 포를 끌고다녀야 하는 포병은 하층민이 맡았고 장교로 출세하려면 기병이 되어야 했는데, 혁명이후 전쟁이 터져 포병이 크게 활약을 하자 포병의 위신이 높아져서 나폴레옹이 출세길을 달리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하사관 출신으로 당시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프로이센 명문귀족 출신의 장군들에게 경멸받았다. 장군은 귀족들이 세습하는 판인데 그들이 히틀러를 깔보았기 때문에 열받아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스탈린은 러시아가 점령한 식민지 그루지야 출신이다. 그루지야는 지금도 미국편에 붙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 스탈린은 박정희와 같은 민족의 배신자였다. 오바마와 클린턴과 잡스의 공통점은 친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비슷한 거다. 9살 때 아버지를 잃은 징기스칸이나, 13살에 아버지를 잃은 진시황이나, 아버지가 농구공 하나 주고 떠나버린 오바마나, 아버지가 넷이나 되는 클린턴이나, 죽기 직전에야 친부의 존재가 알려진 스티브 잡스나 신세가 비슷하다. 문제는 인간이 왕이 되고 싶냐다. 왕잡고 싶나? 모든 사람이 왕잡고 싶어한다면 진작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었을 것이다. 대개 왕은 왕가에서 세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왕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게 문제다. 반대로 왕좌를 뺏긴 자들은 어떻게든 왕자리를 되찾으려고 해서 왕국이 이어진다. 신라는 천년이나 해먹었고, 일본은 나라가 생긴 이후 왕의 씨족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일본에 왕을 꿈꾸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다. 신라왕족이 고려귀족으로 해먹었고 조선시대 영남남인 퇴계학파로 해먹었다. 계속 통이 이어진 거다. 왜 그들 영웅들은 정복을 일삼았을까? 그냥 편하게 살면 될 텐데 말이다. 데미지 때문이다. 영조는 궁녀들에게 세숫물을 떠다바치는 일을 하던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적서를 차별하는 유교주의 시대에 상처받았다. 드라마 ‘동이’로 알려졌는데 동이는 본래 인현왕후가 불쌍하다고 주워온 거리의 아이였다. 더구나 영조는 경종을 독살한 혐의까지 받았으니 최악이었다. 세종 역시 태종에 의해 장인 심온이 처형되는 등 무수한 수난을 겪었다. 데미지가 인간을 일으켜 세운다. 그냥 데미지가 아니라 완전성으로부터의 데미지라야 한다. 애초에 세팅된 완전성이 없는 그냥 데미지는 열등감에 불과하다. 그들은 가다가 중간에 멈춘다.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히딩크가 한국축구를 월드컵 사강에 올려놓았다. 잘나빠진 한국인들은 바로 히딩크를 내쳤다. 왜 한국인들은 히딩크를 버렸을까? 월드컵 사강? 월드컵 우승? 사실 그건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왕이 되는 것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원래 왕족출신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완전성의 문제다. 월드컵 사강보다 좋은 것은 원래 월드컵 사강을 할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보겠다고 히딩크를 내보냈다. 업어키운 4강보다 제발로 선 8강이 낫다. 왜 징기스칸은 중도에 멈추지 않고 계속 가서 세계를 정복했을까? 금나라와 타타르의 계략에 의해 몽골족은 해체되었으며, 한동안 몽골족은 칸을 배출하지 못했고 아버지 예수게이는 케레이트족과 결탁했다는 이유로 몽골족 직계로부터 경원되었고, 어머니 허엘룬은 몽골족이 망하자 메르키트족에 붙었기 때문에 몽골족으로부터 내쳐져서, 한동안 테무친 일가는 강변에서 나무열매와 물고기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몽골족은 일부 모계적인 습속이 남아있기 때문에 집안에서 여성의 비중이 크다. 어머니 가계를 상당히 따지기 때문에, 몽골귀족들이 어머니쪽을 보고 테무친 가계를 자기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정통 몽골귀족인 주르킨씨들은 테무친이 옹칸의 케레이트족과 동맹하고 자댜란족의 자무카와도 안다(의형제)관계를 맺어 일약 초원의 강자로 떠오르자 쫄아서 칸으로 선출해놓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그들은 테무친에게 충성서약을 했으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무카편에 가담했다. 심지어 케레이트의 옹칸도 테무친이 자녀들간의 정략결혼을 제의하자, 테무친의 가문이 천해서 격이 떨어진다며 거부했다. 그 일로 테무친에게 정복당하여 케레이트족은 몽골족에 흡수되었다. 무엇인가? king이라는 말의 어원은 genius인데 genius의 어원은 genus로 갈래를 뜻한다. 조상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기둥줄기라는 뜻이다. 가문의 정통 주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월한 종족이라는 뜻이다. genius가 천재인 이유도 조상신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근데 징기스칸은 족보로 볼 때 정통이 아니라서 흰뼈(성골)가 아니라 검은뼈(진골이나 6두품쯤?)로 취급받았다. 성골귀족으로 대접받지 못하자 조상신의 정기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제 힘으로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정복한 것이다. “봐라. 나는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조상신의 가호 덕분에 아직 살아있다. 이래도 내가 조상신의 정기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냐?” 실제로 징기스칸은 이런 식으로 떠벌이고 다녔다고 몽골비사에 전한다. 어릴 때는 형을 살해한 죄로 잡혀가서 죽을 뻔 했고, 커서는 메르키트족의 습격을 받아서 죽을뻔 했고, 전투 중에 화살을 맞아 턱이 부러진 적도 있고, 독화살을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있다. 그래도 살아난 것은 신의 가호를 받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거고, 몽골족이 그걸 믿었기에 유목민 특유의 분열습성을 극복하고 고원을 통일한 것이다. 괴벨스 무당들이 그걸 선전하고 다니기도 했고.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이유도 여불위의 자식이 아니라 원래 왕의 핏줄을 타고난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 하기를 원했다. 나중에는 신선술을 익혀 아주 신이 되려고 했다. 어린이의 동화도 그렇다. 가장 인기있는 설화는 원래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궁궐에서 쫓겨나서 천하를 유랑하며 백성을 만나다가 백성의 도움으로 결국 왕의 자리를 되찾는다는 설정이다. 물론 백성의 도움보다 신의 도움이 더 낫다. 어린이들은 노력하여 왕잡기보다 원래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는데 관심이 있다. 백설공주든 신데렐라든 어린이 관점에서는 원래 왕자이고 공주이길 원한다. 노력해서 왕되는건 별로다. 자부심을 원하고 완전성의 이미지를 원하는 것이다. 출세를 원하는게 아니라. 원래 특별한 존재이길 원하고 그만큼 대접받기 원한다. 스티브 잡스 안티도 많던데 그가 워즈니악의 것을 훔쳤다거나, 혹은 워즈니악을 사기쳐서 5천달라 떼먹었다거나, 혹은 남의 기술을 태연히 도용하였다거나 하는 소소한 것을 가지고 시비한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시비는 유치한 것이다. 잡스의 위대함은 발명품들에 있는게 아니라 그가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하고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웠다는데 있다. 그냥 컴퓨터만 만든게 아니고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무수히 양성했다. 그래서 위대하다. ◎ 제품발명 – 가치 별로. ◎ 방향제시 – 가치 충분. 제품은 잠시의 만족을 줄 뿐이다. 방향제시는 인간에게 역할과 포지션과 기회와 동기를 준다. 영원한 길을 제공한다. 그래서 진짜배기다. 스티브 잡스를 기업가로 볼 것이냐 구루로 볼것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이 정해진다. 왜 스티브 잡스는 중도에 멈추지 않았을까? 그는 해고도 잘했고 독하게 경영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아버지의 부재 혹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겪고 있다. 아버지 이방원이 자식을 아주 잡아먹을 듯이 괴롭혔던 세종, 아버지의 적장자가 아닌 서얼출신 영조, 진작에 아버지를 잃은 정조가 조선왕조사에서 유독 빛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 많은 황금, 미모의 여인, 세상에 자자한 명성이 그다지 인간에게 그다지 동기가 되지 못한다. 구조론이 말하는 바 세상은 마이너스다. 보물을 획득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완전성으로부터의 데미지에 의하여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원형이 훼손되었을 때 그 원형의 찬란한 빛에 의하여 인간은 동기부여된다. 월드컵 우승이 중요한게 아니라 한국이 원래 우승할만한 나라임을 확인하는게 중요한 거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확인하는게 중요하다. 남이 머리쓰다듬어 주기를 바란다면 어설픈 열등감에 불과한 거다. 자기 내부로부터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 ◎ 조중동의 열등감 보상 - 4강 가고 싶다. ◎ 젊은세대 자부심 확인 - 원래 사강실력임을 확인하고 싶다. 박근혜를 미는 조중동과 안철수를 지지하는 젊은 세대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조중동은 박정희나 추종하며 식민지 시대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자기네의 열등감을 보상받기를 원한다. 조중동 기사들에는 미국의 어느 무명 지식인이 한국의 실력을 인정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식의 조잡한 이야기가 많다. 그들은 왕잡고 싶은 것이다. 타인에게 이보란 듯이 과시하고 싶어하고, 남이 자기 머리 쓰다듬어주기를 원한다. 부시가 머리 쓰다듬어주면 헤헤거리는 이명박처럼 말이다. 젊은이들은 왕잡는데 관심없다. 대신 원래 왕이 될만한 자질을 갖춘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잡고자 노력하지는 않는다. 외국인의 인정을 받는데는 관심이 없다. 젊은이들은 다만 자신의 힘으로 세계사를 주도하고 싶어한다. 남이 인정하면 가짜고 자기 내부의 결을 따라 자기가 만족해야 진짜다. 열심히 공부해서 턱걸이 합격보다, 놀았는데도 수시모집으로 당연히 합격.. 이걸 원하는 거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싶어 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을 바꾸고 싶어 했다. 무언가 되려는 사람과, 무언가 하려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되는건 기승전결의 결이고, 하는건 기승전결의 기다.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는게 아니라 봄에 씨를 뿌려야 진짜다. 일회성 성공은 의미없고 계통이 계속 이어가야 진짜다. 꼼수로 이기는건 가치없고, 정정당당한 승리도 관심없고, 오직 승리할 실력이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느냐만 확인하고자 한다. 승부에 이기기보다는 한 판의 완벽한 게임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남에게 박수받는 무대보다는 자신이 납득하는 연주를 원한다. 그것은 타인의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의 갈증 때문이다. 무언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열등감의 보상심리 때문이고,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이유는 자부심의 확인심리 때문이다. 데미지에 의해 인간은 동기부여 되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운다. 다음 단계의 계획이 있어야 진짜다. 그것이 되다가 아닌 하다이다. 그게 없으면 그냥 열등의식의 표출이다. 실력없는 사람은 왕잡고 싶을 뿐이고, 실력이 있는 사람은 그 다음 단계의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기승전결의 기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근원의 완전성에 의해 그것은 가능하다. ◎ 조중동의 결 – 남이 차려놓은 식탁에 숟가락 들고 끼어앉고 싶다. ◎ 젊은이의 기 – 새로 나의 식탁을 차리고 싶다. 노무현 세력과 조중동 세력의 차이가 그러하다. 동북아 중심국가의 비전은 자기 자신의 식탁을 차리려는 것이고, 조중동의 친일친미나 무뇌좌파의 서구추종은 차려진 남의 식탁에 끼어앉고 싶은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한국의 문제는 열등의식이다. 자부심의 결핍이다. 서구인의 자산은 첫째 우월의식이고, 둘째 그 우월의식을 겉으로 저렴하게 드러내지 않는 마음의 여유로움이다. 그러나 누가 더 쌓아놓은 지적 자산이 많은가를 보라. 제대로 된 미학적 완전성의 개념,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원형의 이데아 개념, 깨달음의 개념은 아시아에만 있고 한국에만 있다. 서구에는 아주 깨달음의 개념이 없는 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중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일부 수피즘의 영향이 있으나 수준이 낮다. 대신 그리스의 미학이나 근대 인상주의 회화나 낭만주의 전통에 약간의 그림자가 있다. 서구가 아시아에 관심을 가져도 까르마니 환생이니 하며 헛소리나 하고 있다. 그건 바라문교 사상이지 불교사상은 아니다. 제대로 된 깨달음의 개념은 불교에 있고 그 중에도 한국의 선종불교에만 제대로 된 원형의 모습이 남아있다. 일본의 젠 스타일이 프랑스 등에서 맹위를 떨치는 것은 선종불교 덕분인데 거기서 일부 진도를 더 나간 것이 유교합리주의 개념이다. 인도는 진작에 대승불교를 일으켰으나 곧 힌두교로 퇴행했고, 중국은 일찍이 선종불교를 일으켰고 그 여파로 유교합리주의를 일으켰으나 다시 도교 등으로 퇴행했다. 유교의 왕도 개념, 도교의 도 개념, 무위자연 개념, 주자학의 성리학 개념, 불교의 깨달음, 선종불교의 인상주의적 미학(선문답은 일종의 언어적인 인상주의다.)은 모두 그 완전성의 원형으로부터 비추어진 것이다. 서구의 장점은 단지 쪽수가 많다는 거 뿐이다. 한중일은 서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서로가 보탬이 되지 않는다. 중국이나 일본에 뛰어난 인물이 있어봤자 한국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 그들이 구조론을 읽어볼 일도 없고. 반면 서구는 15억 백인인구 전체가 하나의 단일시장이 되어 있다. 미국이 뛰어난 것은 세계의 천재들을 모아 큰 시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평균 아이큐는 94에 불과하다. 미국보다 평균지능이 낮은 멕시코나 남미의 예를 들어 FTA를 반대하는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생각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그쪽은 하드웨어가 안 되는 거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는 법, 개방은 무조건 경쟁력이 앞서는 쪽이 유리한데도 말이다. 한국의 아이큐는 106으로 세계최고다. 도시로 논하면 뉴욕의 112나 홍콩의 107에 미치지 못지만 말이다. 도시를 논외로 하고 전체적인 시장규모를 논외로 하고, 다만 한국의 106과 미국의 94로만 대결한다면 이는 최홍만과 옥동자의 대결같은 거다. 엄청난 하드웨어 차이다. 아이큐 1차이는 상당한 차이다. 한국이 낙후한 것은, 첫째 기성세대들이 근대적인 합리주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 미국이 가진 서구 15억 백인시장이 없기 때문이고, 셋째 제대로 된 근원의 자부심이 없어서다. 자부심이 없으니 우월의식을 감추는 마음의 여유도 없다. 한국인들은 너무 쉽게 저급한 우월의식을 드러내거나 혹은 열등의식을 드러낸다. 진도 나가주지 못하고 그 지점에 붙잡혀있는 거다.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같은 데미지가 상반되게 나타나는데 본질은 불안감이다. 불안한 이유는 내부에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의 계획이 콘텐츠인데 그게 없으니 불안해서 뭔가 확인하고자 자기보다 못한 약자를 쿡쿡 찔러서 반응을 보는게 우월의식이다. 그 상대의 반응으로부터 자신의 다음계획을 찾아내려는 거다. 자신의 계획은 없고 상대가 이렇게 저렇게 나오면 자신은 그 반대쪽으로 돌겠다는 얍삽한 전략을 세운다. 실력없는 무사들이 선수로 치고들어가지 못하고 상대가 들어오면 받아칠 궁리만 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자를 찾아가서 알랑거리며 뭔가 빌붙어서 계획을 얻어내거나 아니면 아무데나 엉겨붙어서 화를 내며 상대의 반응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자신의 동기와 계획을 짜보려는게 열등의식이다. 우월의식은 상대를 깔아뭉개고 열등의식은 치받는데 공통점은 자기 계획을 타인으로부터 조달하려고 시도하는 거다. 자기 내부의 고유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 상황을 타개할 연장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의식하면 이미 실패다. 우월의식은 타인을 경멸하게 하고 열등의식은 화를 내게 한다. 그 이유는 타인에게 도무지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배울 것이 없는 이유는 자기 안에 갖추어진 구조의 포지션들이 없기 때문이다. 콘텐츠가 없으니 다음 단계의 계획이 없고, 그래서 화가 나는 거고 그래서 뭐 얻을거 있나 하고 아무데나 찔러보는 거다.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에서 구조의 대칭과 축을 만들어 빌붙을 포지션을 얻으려고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인도에서 엄청난 지혜를 배워왔지만 대다수 한국인 여행객들은 인도에 가서 “거기 삐끼들 졸라리 많더라.” 하는 정도의 저급한 소감을 발표할 뿐이다. 왜 배우지 못할까? 담아낼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콘텐츠가 없고 다음 단계의 계획이 없으니 주워담을 그릇이 없는 거다. 자부심을 가진 자는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최고를 만나고 싶어하고, 열등의식을 가진 자는 어디를 가든 그 나라의 최하를 발견하고 흉본다. 하긴 최고를 만나봤자 자신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주워담을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구조의 포지션으로 된 지혜의 촉수가 없으니 대칭도 없고, 축도 없고, core도 없고, 날개도 없고, 포지션도 없고. 대책이 없고 계획이 없다. 꼼수만 있다. 김어준이 좀 나은 것은 여행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고, 스티브 잡스가 좀 나은 것은 역시 여행을 제대로 했다는 거다. 그들은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릇이 커서 무엇이든 주워담아 온다. 왜 데미지인가? 애초에 완전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assassin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잠 자는 젊은이를 납치하여 대마초와 미녀로 황홀경에 빠뜨린뒤 여기가 천국이라고 세뇌시킨다. 잠시 천국을 맛보게 한 다음 암살지령과 함께 다시 환속시키는 것이다. 지령을 받은 암살자는 이미 천국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암살을 해치우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취하는데 관심이 없다. 노동자들은 이건희의 소행에 분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건희를 숭배한다. 대학나온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이건희가 자신의 멘토라고 주장한다. 유치하게도 말이다. assassin처럼 이미 얻은 것을 잃었을 때 진정한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영웅들에게는 그 완전성이 있었다. 그들은 유년기에 이미 얻은 것이 있었다. 소년기에 그것을 잃고 데미지를 입었다. 완전성의 훼손이다. 그럴 때 동기부여가 된다.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운다. 계속 진도를 나가준다. 내 안의 커다란 자부심이 끝없는 갈증을 일으켜 중도에 멈추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들은 그것이 없다. 자부심이 없다. 그들은 뭔가 되려고 할 뿐이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 시선의 힘에 의해 모르모트처럼 그들의 삶은 조종된다. 남들이 OK 사인을 내려주기만 원한다. 어렸을 때 완전성을 경험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 행복한 사회가 최고의 사회가 된다. 어린이가 공부로 내몰려 일찍부터 지옥을 경험한 나라에 참된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욕망이 아니라 미학이 세상을 바꾼다. 인간을 진정으로 일어서게 하는 것은 신의 완전성이다.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미학이다. 완전성의 체험으로부터 유래하는 치솟는 자부심이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 단계의 계획을 가지게 하고, 그릇을 키우게 하고, 구조의 5포지션을 갖추어 그것으로 무엇이든 흡수하게 하고 그리하여 한걸음 더 진도나가게 한다. 계속 가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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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또한 어린시절에 '지옥'을 경험했다.
하얘진 야간자율학습교실의 백열등은 지옥불처럼 다가왔다.
작렬하던 태양은 우리를 삼켰지만, 젊음은 차가워져갔다.
시간은 갔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그자리다.
완전성의 수학과, 사건전개의 세계사와 세계지리
지루하지만, 길고 길었던, 한여름의 개구리잡이, 깊은 가을의 잠자리잡이가
아이들을 키우지 않을까.
옳거니 !!
진중권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로다
하긴 중권이는 글씨는 알아도 글은 잘 모르지
포스트 모더니즘이 생각나네요.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욕망을 해방시킨다.라는 것이지만,
그러다보니 다시 반성적 이성이 필요해지게 되어 버려..포스트모더니즘의 동력이 고갈되어 버린다고 보이는데...
사실 이들이 뭔가를 보기는 보았는데, 그동안의 미학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흘러온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바라 보기 때문에 미학이라는 관점을 획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조금 더 제대로 보았다면... 욕망이 아니라 미학을 보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 미학을 보아야 동력의 고갈을 면할 수 있다고 보이거든요. 그리고 뭔가를 배척하다가 다시 필요해져 이름을 달리 붙여서 사용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고 보여집니다.
완전함을 체험한 사람이 누구인가? 어느 조건이 완전한 조건인가?
완전히 주관적인 사건이고 개인적인 일들이다. 나는 내가 어렸을때 제일 똑똑하고 잘난 사람인지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딫치면서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가졌던 자부심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나에게 열등감을 줬던 다른 친구가 보지 않는 책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김동렬의 구조론을 보고있다.
김동렬의 구조론은 내가 보았단 많은 다른 책들중 하나이다.
이것이 완전한가? 라는 물음에 나는 '아니오'라는 답할 것이다.
이것에 만족하면 김동렬의 구조론의 이야기 '기','승','전','결' 중 '승'을 이을수 없다.
완전함을 찾기위한 여행은 구조론의 부족함을 느낄때 시작할수 있다. 구조론은 부족한 이론이다.
완전성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면 곤란하고
구조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소.
악기가 소리를 내는 지점이 있소.
아무데나 두들긴다고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오.
화음을 이루는 타이밍이 있소.
모든 시와 음악과 그림과 연극과 영화와 패션과 예술은
인간을 긴장시킨다는 절대적인 기준점이 있소.
그 구체적인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하나로 통하는 점은 분명히 있소.
이걸 막연하게 생각하면 곤란하오.
사람도 마찬가지요.
자신을 스스로 이기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는 자들도
막상 자기 아들 문제가 걸리면 태도가 바뀌어서 헌신적으로 변하오.
못돼먹은 자본가라도 자기 아들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이오.
'넌 완전하냐?' 이런 식으로 말하면 무식한 것이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소가 먹으면 여물에 불과한 것이고
좋은 진주도 돼지에게 던져주면 암것도 아니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순간에, 그 장소에서 완전해지는 것이며
완전성이란 그 순간, 그 장소에 도달했을 때를 대비할 수 있는 것이오.
'구조론이 완전하냐?"는 말은 필요없소.
구조론을 완성시키고 그로부터 종소리를 끌어낼 수 있는 극적인 만남이냐가 중요할 뿐이오.
화음이 도미솔인데 도와 미가 갖추었다면 자신이 솔을 맡아야 하오.
'넌 완전하냐?'가 아니라 자신이 솔이냐를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오.
완전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열심히 삽질만 하면 뭔가 생길거라는 막연한 플러스적 사고를 버리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위대한 만남에 의해 탄생하며
그것이 결혼이든 취업이든 투기든 로또든 모두 만남의 형식을 가지는 것이며
그 만남을 위한 대비를 하는 것이오.
막상 만났는데 아무런 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곤란하잖소.
사람들은 미인을 얻을 생각만 하고
정작 그 만남의 순간에 자신이 전혀 대비가 안 되어 있다는건 생각못하더라는 말이오.
한글자모는 스물네자로 충분하오.
막연히 뭔가 부족할 것이다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필요없소.
한자는 졸라리 많아서 5만자인데 한글 스물네자로 쨉이 되냐는 생각 따위는 필요없소.
아라비아숫자는 0부터 9까지로 충분하오.
이미 완전하오.
그럼 세종이 완전한 한글을 만들었는데 왜 조선은 가난하고
아라비아인은 완전한 숫자를 만들었는데 왜 저렇게 난리통이냐고 탓할 필요는 없소.
한글은 때가 아니어서 쓰이지 못한 것이며
아랍은 그 장소가 척박해서 쓰이지 못한 것 뿐이오.
때가 되고 장소가 맞아서
만나야 할 것을 만났을 때 진짜배기는 이루어지는 법이며
고흐는 너무 일찍 태어났기에 빈 손으로 죽어갔고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오.
많은 것이 필요한게 아니라
적당한 타이밍과 장소와 사람과 흐름이 필요한 것이오.
한자가 5만자나 되는데 그걸 백만자로 늘린다고 인류가 더 현명해지겠소?
완전성 개념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계는 공연히 한자를 많이 만들어내면서
그것을 학문의 진보라고 우기고 있소.
뻘짓인데.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오.
보통 멍청한 생각(플러스 관점)
- 한문 글자를 많이 만들자.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인류는 현명해진다.
완전성의 관점은(마이너스 관점)
- 추리고 추려서 최소화 되었을 때 완전성에 도달한다. 그 다음은 타이밍과 장소와 사람과 흐름의 적절한 조합이다.
내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기준에 관한것입니다.
타이밍의 기준을 어디로 삼을까요? 최소화하고 완전성에 다다르기 위한 기준을 어디로 삼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이유는 구조론에서 이 기준에 대해서 언제나 막연하게 넘어가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입니다.
이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어떤 사상이나 물건도 발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구조론에서 이 기준을 여러가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단어들이 상부구조, 마이너스 , 최소화, 세력, 밸런스, 대칭 등등이 있네요.
그런데 저는 이게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MRI ,X-RAY 가 없었을때 청진기로 사람을 진찰하던 시대가 있었죠.
그때 의학책을 보면 심장박동의 소리로 사람의 병을 진단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왔습니다. 당연하겠지만요.
그런데 그 책 볼때면 명백하게 병을 진단할수 있을것 같지만, 막상 임상에서 병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사람의 몸을 직접 뜯어 보는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죠. 몸을 뜯지도 않고 병을 알아내는 시대가 온 겁니다.
제가 볼 때 지금의 구조론은 청진기 소리 진단으로 병을 알아보는 불완전한 진리입니다.
굉장히 주관적인 해석으로 상황파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 객관적으로 적용할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조론의 창시자인 김동렬님은 청진기의 달인이므로 상황파악이 날카롭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오판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론의 사이트는 김동렬님의 분석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모색하는 사람들은 적을것입니다.
구조론은 수학이므로 완벽합니다.
수학이 완벽하다고 해서 바로 전자계산기가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과 전자계산기는 다른 거죠.
방정식과 함수와 미적분의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거죠.
불완전한 것은 수학이 아니고
그 수학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전자계산기만 손에 쥐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현대는 수학이 만들었지만
지구인 70억 중에 수학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죠?
지구인의 99.99프로는 수학을 모르면서 그 수학의 결과물인 전자계산기 덕을 보고 있는 겁니다.
유클리드와 피타고라스가 수학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 덕을 본 것은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당장 피타고라스 덕을 못봤다고
수학은 불완전하다고 말하면 곤란한 거죠.
수학 그 자체는 완전합니다.
단지 발달단계가 있는 거죠.
수학은 지금도 발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학이 발달하고 있다고 해서 수학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면 안 되죠.
어린이는 완전합니다.
어린이가 성장한다고 해서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 식이라면 완전성의 개념을 이해못한 것입니다.
어린이는 외부환경과 소통이 가능 하므로 완전한 것이며
어린이가 국어책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완전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보통 사람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미리 판단하지 않습니다. 판단한 척 하지요. 그리고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지요. 유보상태-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고, 따라서 스트레스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버리면 스트레스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선택할 방향만 남았는데 이때 또 어떤 선택을 할지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의 선택은 반드시 훈련되어 진데로 선택하게 된다고 보입니다.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이 선택이라는 것에 심한 압박감을 느껴서 선택해야 한다는 그 자체를 피해 버리게 된다고 봅니다.
선택을 미리 할 필요 없이 전모가 보일 때 판단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이러한 선택에서 조차도 사람은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완전성 개념과 방향성과 결을 따라 판단하게 되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그러한 선택 역시 그 사람이 타고있는 방향성에서 기인하게 되고, 결을 따라서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이론적으로 완전성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하여도 결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제대로 선택을 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다 보이는데도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결따라 저절로 선택하게 되어 버리는데, 그것을 자기가 선택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이며, 그 결이 어떤 결인가에 따라서 선택의 양상도 달라진다고 생각됩니다.
선택하게 되는 그 기준이 이미 자기안에 있다라는 것이지요. 외부 자극이 없을 때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다가 정보가 충분해지면 시야가 열리므로 선택하게 되는데 그때 훈련된 것에 의해서 선택을 저절로 하게 되고 그것은 이미 방향성을 그렇게 타고 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훈련된 것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가 남는데..이제는 미학이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중요한건 플러스적 사고냐 마이너스적 사고냐요.
플러스로 보면 세상에 완전한건 없소.
한문 글자를 아무리 만들어도 부족하오.
5만자를 만들었는데 표현하기에 충분한가요?
천만에.
백만자도 부족하오.
영원히 부족하오.
플러스적 사고에 빠진 사람은 뭐든
'완전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오.
생각해보고 말하는게 아니라
경험적 직관적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플러스 세계에 완전은 없기 때문이오.
이 세상에 완전한 자동차는 없소.
아무리 좋은 차를 만들어도 더 좋은 차가 나올 수 있소.
그러므로 무조건 '구조론은 완전하지 않아' 하면 거의 맞는 거요.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볼 것도 없소.
그러나 인상주의가 왜 나왔겠소.
그런 플러스 사고가 필요없다는 거요.
자동차는 발동만 걸리면 완전한 것이오.
최소화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마이너스 사고이오.
구조론은 마이너스 사고이므로
일본의 하이쿠처럼
"옛 우물에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이것만으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오.
여기서 술어가 앞에 왔다는게 중요하오.
"개구리가 옛 우물에 뛰어드는구나." 이건 불완전하오.
방향을 바꾸면 바로 완전해지오.
이 차이를 아는게 중요하오.
그 차이가 보이지 않는 사람과는 백날 대화해도 실패요.
"옛 우물에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이건 시.
"개구리가 옛 우물에 뛰어드는구나.".. 이건 암것도 아님.
관측자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오.
전자는 내재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후자는 바깥에서 발동을 걸어주는 구조이오.
내용은 동일하지만 관측자의 포지션에 따라 시가 되기도 하고 그냥 개소리가 되기도 하오.
긴장이라는 종의 소리가 딱 나는 찍어줄 포인트가 있다는 것.
여기서 완전성의 의미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하오.
최소화된 상태에서 발동이 걸리면 완전한 것이오.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이 되면 완전한 것이오.
캔버스는 비어 있고 물감은 준비되어 있고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면 완전한 것이며
그것을 용이하게 캔버스로 옮겼는가는 논외요.
여전히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낡은 관점에서 사로잡혀 있으므로 완전성을 포착하지 못하는게 문제요.
그래서 미학은 무언의 언어이면서 소통의 언어 이기도 하다고 보입니다. 대체로 말로 글로 소통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사람이 뭔가 표현해 놓은 그것에 대하여 내마음에 이미지-심상이 그려지거나 떠오르거나 상이 맺히거나...에 의해서 소통이 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말을 잘 알아 듣게 되는 경우는 내안에 그려진 것이 얼마나 완전한가? 제대로 심상을 그리고 있는가? 이라고 봅니다. 구조론의 글들은 내안에서 좀더 완전한 그림을 그리도록 표현되어 있다고 보이게 한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조론의 단편적인 말들에 현혹되지 말고 그 글들이 그리는 결을 따라서 내안에서 느껴지는 그것을 보아야 완전성, 혹은 기준이 어떻게 형성되고 질서를 잡아 나가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하게 된다고 생각 되네요. 어떤 글을 쓴다고 가정할 때 처음에는 그런 결론을 낼 생각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글이 알아서 결론을 내어주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글이 결대로 간 것이지요.
때로는 구조론에 대하여 갸우뚱하여지다가도 가다보면 그것이 맞거든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그렇구요. 그래서 한부분만 보지말고 구조론은 전체를 보는 눈을 가져야 시야가 더 트인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 폰으로 올리니 잘 안되네요. 익숙해져야~^^;
그래서....컴에 접속하여 다시....^^
인상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아무도 이해못했소.
심지어 그 인상주의를 주도한 화가들도 이해를 못했소.
인상주의 화가들 중 일부는 자기는 인상주의가 아니라고 말했소.
왜 그걸 그리는지 자기도 모르면서 일단 그려지니까 그리고 보는 것이오.
그 안에 내재한 결이 있기 때문에 그 결을 따라가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꾸 그려지는 것이오.
자꾸 자꾸 그리다보니 하나 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나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버린 것이오.
구조론 내부에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엔진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수학이 아니라 계산기입니다.
누가 골치아프게 수학을 원할까요? 그건 전문가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보통 계산기를 먼저 찾아 갑니다.
구조론의 강력함을 익히 알고 있고 세상을 바꿀 가능성과 에너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중들과 만나야 합니다. 대중의 눈과 같은 높이가 되어야 합니다.
당장 지하철에 가서 1000원짜리 양말하나 팔려고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팔아야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낼수 있지?
라는 물음에 구조론은 답을 내줘야 합니다.
그래야 대중들은 계산기 너머에 있는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김동렬 선생님이 계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나 막상 계산기 만들려고 하면 그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 것입니다. 구조론의 발전에 김동렬님이 기를 담당했으니 누군가는 승이 될것입니다.
승이 될 사람은 계산기를 어떻게 만들것인지 고민해야 될겁니다.
^^..계산기를 만들 사람이 고민하면 되겠지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어떻게 인터넷에 활용할 것인가? 휴대용 폰에 탑재할 것인가를 고민하지는 않았지요.
필요한 사람이 필요를 본 사람이 그 고민은 하면 됩니다. 세상의 모든 하나의 쓰임의 용도를 갖게 되는 것을 모두 한꺼번에 고민할 필요는 없고...나중에 그것을 빼 갈 사람들이 빼가도 빼가도 줄지 않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한글이 그러하고 많은 사상들이 그러했고, 구조론도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마치 세종대왕에게 스마트폰을 개발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이네요.
뭔가가 세상에 퍼지려면 그 기반적인 토대가 있어야 하고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또한 사람들이 그 필요를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것을 먼저 발견해 내면 스티브 잡스가 되는 것이겠지요.
ㅋㅋ..갑자기 뭔가 개발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강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느낌이 드네요.
한글이 한글 대접을 받고 한글 소설이 나오고 한글이 문학적으로 우수해지고 한글의 가치를 인정받고(사실 누가 인정하든 안하든 이미 가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형태적 아름다움이나 내용적 아름다움이나 실용성이 부각될 때 무엇인가는 세상에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해감에 따라 더 다양한 생각들이 나오듯이...활용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구조론은 기에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구조론에서 나온 것이 기의 위치에 있을 수는 없고 승-전-결로 나아가는 포지션을 취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결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뭔가를 내놓아라 라는 것은 결을 보여줘라 라는 것인데...그 결은 보고자 하는 사람들 눈에만 보이니 어쩌겠어요.
그리고 현실세계는 굉장히 빨리 흘러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구조론의 기에서 승-전-결로 나아가는 속도도 빠를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구조론에서 보자면 현재는 미학의 시대인데...미학은 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결이라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고 보이구요. 그런데 이미 결에 가 있는 것들은 먼저 기에서 시작했다라는 것이지요. 일단은 이러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 구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어차피 한 번의 외침으로서 끝날 수 밖에 없고 그걸 좀 잘해보자는 겁니다
누구 말처럼 쏘아진 화살이라는 것이죠
'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겠죠 우리는.
우리는 결국 그 뿐일 뿐이고 플러스로 나가다가는 넓은 세상에서 도저히 답이 없고
아무리 작은 일부분에도 완전성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단지 여기 앉아서 구조를 선언하고 그런 방법으로 완전해지는 것이죠. 어차피 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고 승전결은 기에게 빚을 지게 될것이지 않겠어요?
말쓴하신대로..승을 이어 받을 사람이 나오겠죠. 하지만 그게 우리가 아니어도 그렇게 큰 상관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만하고 태만해서는 별로 모양이 안 좋겠죠. 항상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노력해야겠죠. 이 정도는 기본전제..
구조론의 여정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음 이론이란건 관측이란게 개입하기 때문에... 이론으로 구조론을 접근하면
안될거 같습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712
고전적인 인과관계를 뛰어넘어라.
이론을 넘어선 도구
a와 b 사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고정된 명사가 아닌 동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많은걸 생각하게 하네요..
나는 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