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김창준 칼럼이 안철수를 왕년의 ‘로스 페로’에 비유하였더라. 뭐 칼럼이 읽어줄만한 수준은 아니고, 하여간 김창준이나 로스 페로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로스 페로라고 하면.. 억만장자 출신으로 1992년에 무소속으로 나와서 나프타를 반대하며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리다가 TV토론 한 방에 클린턴에게 깨진 인물 아니던가. 사람들은 주로 선악의 관점에서 본다. 용기, 진정성, 경험, 관용의 정신, 의리, 애국심 따위 잘 알려진 지도자의 덕목을 높이 쳐주고 배신, 권모술수, 가식, 패거리행동을 싫어한다. 이런 식이면 결국 인물론에 치우치게 된다. 인물론이 상황을 단순화 시켜 유권자로 하여금 판단하기 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물론은 초두효과에 불과하다. 초장끗발이 개끗발이라 했으니. 초반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점수를 따지만 전투가 계속되면 결국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막판에는 기본기가 받쳐줘야 한다. 경부고속도로 2층이나 반값 아파트 같은 아이디어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세력 대 세력의 총력전이 되면 사람의 기호에서 세력의 기호로 바뀌는 것이다. ● 초반 인물론 - 사람이 좋아야 한다. ● 막판 세력론 – 그 주변 사람이 다 좋아야 한다. 초반 인물드라이브 때는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는 박근혜도 제법 점수를 따지만 막판에는 박근혜 주변인물이 전부 망가뜨리고 만다. 초반에는 ‘정몽준 미남이네’ 하다가 막판에는 ‘김흥국 추남이네’가 되고 마는 것. 이게 선거전의 공식. 인물이 아니면 정책인데.. 정책토론으로 가도 무뇌좌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서 물을 흐려놓기 때문에 공리공론으로 흐르게 된다. 선거전을 인물이냐 정책이냐의 단순구도로 보면 곤란하다. 실상은 어떤가? 프로가 아마추어를 이긴다. 소설로 쳐도 장편이 단편을 이긴다. 나가수를 봐도 그러한 점이 포착된다. 나가수의 청중평가단은 무엇을 원하는가? 한때 ‘지르면 이긴다’는 말도 있었지만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나가수에서 확실한 것은 무언가 보여주면 이긴다는 거다. 그 중에는 심지어 삑사리도 포함된다. 손을 부들부들 떨어도 되고(김건모), 소심한 댄스를 보여줘도 되고(조관우), 하여간 청중의 뒷통수를 치는.. 뭔가 예측못한 재미난 반전을 보여준 사람은 승리했고 빤한 그나물에 그밥은 밀려나고 말았다. 청중평가단의 판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기준이 있는 것도 맞다. 섣부르게 그 기준에 맞추려 하다가 오히려 실패하기도 하고, 맘 비우고 그냥 최선을 다했다가 성공하기도 한다. 어쨌든 자우림의 부침을 보면 차츰 나가수에 적응해가고 있는 모습이 보여진다. 긴장을 풀고 플러스 알파를 제시하면 그 대답은 반드시 오는 것이며 그 플러스 알파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초반에는 개인사에 기초한 임재범식의 드라마와 눈물이 그 플러스 알파로 기능했고, 한때는 김범수식의 즐거운 퍼포먼스가 그 플러스 알파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뭔가 보여준 사람은 적어도 점수를 받고 박수를 받은 것이다. 프로는 그 뭔가 보여줄 건수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으면서, 그때그때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그 갖춘 레파토리의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놓을줄 아는 사람이고 아마추어는 자신이 가진 한 가지 장점을 내세워 고집을 피우다가 밑천이 거덜나서 서서히 망가지는 사람이다. 프로라면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지속적으로 변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신선감과 이미지 하나로 백날천날만날 우려먹으려 하면 곤란하다.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한번 먹혔다고 계속 반복하면 곤란하다. 계절은 변한다. 날씨는 바뀐다. 그 변화가 무의미한 변덕은 아니다. 청중이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청중의 끝없는 요구에 지속적으로 응답할 수 있어야 프로다. 야구라도 그렇다. 프로라면 구질이 다양해야 한다. 아마는 강속구 하나만으로도 먹히지만 프로는 다르다. 상대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들어오는 세계가 프로다. 로스 페로가 진 것은 그가 아마추어였기 때문이다. 로스 페로가 클린턴에게 진 것은 인물이 뒤졌기 때문도 아니고, 정책이 뒤졌기 때문도 아니다. 인물로 보면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로스 페로도 여러 장단점이 있고 이는 아칸소주지사 출신의 40대 풋내기 클린턴도 마찬가지다. 정책으로 봐도 나프타는 여전이 찬반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인물도 정책도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프로냐 아마냐다. 아마추어는 세력이 없고 그러므로 비전이 없다. 비전은 다음 단계의 계획이다. 다음 단계로 가려면 반드시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 인물을 보고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 다음에 올 인물을 보고 찍는 것이다. 계절은 변한다. 환경은 변한다. 유권자도 변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한 변덕은 아니고 그 안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가는 기승전결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변화는 예정되어 있다. 그 예정된 변화에 적응하려면 다양한 필살기를 갖추어야 하며 그것이 프로의 자세다. 고인이 된 최동원이 다양한 구질을 자랑했듯이 말이다. 청중이 변했다고 말하면 그게 응석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청중평가단이 점수를 안줬다고 말하면 아마추어다. 청중평가단은 분명히 무언가 요구하고 있고 프로라면 그 주문이 무엇인지 읽어낼줄 알아야 한다. 청중의 니드를 읽는데는 베테랑의 경험도 필요하고 세력의 힘도 필요하다. 혼자 생각해서는 답을 알 수 없다. 주위사람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해야 한다. 그것이 소통능력이다. 소통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프로다. 아마추어는 다음 단계가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 위주의 튀는 이슈로 인기를 끌려 한다. 그게 유일한 자산이므로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한 번 정한 것을 바꾸지 못한다. 경직된 대응을 하다가 이미지 구겨서 패퇴하게 된다. 이미지 하나로 뜬 아마추어는 그 이미지가 구겨질까봐 계절의 변화에 대응못하는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데도 반팔티를 고집하다가 감기몸살 걸린다. 문제는 계절이 바뀌듯 유권자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대중의 변덕이 아니고 기승전결의 미학적 법칙이 있다. 한때 인기있던 정책이 곧 여론의 반전으로 곤란하게 된 예는 매우 많다.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이전이나 이명박의 대운하나 다 초반에는 인기가 있었다. 아마추어는 이러한 유권자의 변덕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힘이 방향을 결정하고 운동이 속도를 결정한다. 힘이 운동에 선행하므로 방향을 잘 잡아야 이긴다. 명박이처럼 속도전 외치다가 골로 간다. 이명박이 속도는 빨라서 그새 사대강 삽질을 다해치웠다만 한나라당 집권수명도 광속도로 단축시켰다. 진보가 쪽수에 밀려 낮은 지지율로 간당간당하면서도 10년은 했는데 명박은 인해전술을 쓰고도 5년만에 말아먹고 있다. 방향을 잘 잡는게 프로, 속도를 잘 내는게 아마다. 초반에는 아마가 반짝 바람을 타서 속도를 내다가 그새 바람의 방향의 바뀌어서 결국 프로가 이기는게 선거다. 다음 웹툰에 연재되는 허영만 화백의 말무사를 참고할만 하다. 만화가 사실을 잘 반영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의외로 뛰어난 부분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선악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징기스칸은 의리, 헌신, 용기로 표상되고 라이벌인 자무카와 토오릴칸은 배신, 권모술수로 표상된다. 결국 인물론이다. 영웅은 인물이 뛰어난 것일까? 천만에. 구조론으로 말하면 인물은 세력에 진다. 물론 인물도 좋아야 한다. 징기스칸은 확실히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혼자 탁월해서는 이길 수 없다. 그의 동생인 활의 명수 카사르, 도끼의 달인 벨구테이를 비롯하여 그 유명한 사준사구(4명의 참모와 4명의 맹장)가 모두 뛰어났다. 징기스칸의 승인은 그가 프로였기 때문이다. 징기스칸 혼자 프로가 아니라 그의 군대가 모두 프로였다. 일종의 직업군인 비슷한 거다. 전부 베테랑들이다. 유목민의 전쟁은 생존을 위한 방어전쟁 아니면 약탈을 위한 침략전쟁을 하는데, 분명한 목표가 있고 목표를 달성하면 전쟁이 끝난다. 이게 아마다. 프로는? 끝이 없다. 전쟁 자체가 목적이다. 전쟁 안에 구조론의 결이 있다. 전쟁 안에 기승전결의 흐름이 있다. 영토를 넓힌다거나, 왕위에 오른다거나 혹은 재물을 얻는다거나 할 목적으로 전쟁을 한 징기스칸의 경쟁자들은 그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목표가 없어져서 군대가 약해졌다. 징기스칸은 그 반대였다. 징기스칸은 오직 죽음만을 추구하는 특수부대를 운용하기도 했다. 아마와 프로의 차이.. 아마는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해산되고 프로는 계속 가는 것이다. 순수한건 아마다. 그런데 불순한 자들이 오래간다. 징기스칸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스스로 텡그리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게 되었다. 무당들이 징기스칸의 말을 퍼뜨려서 그는 신격화 되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몽골족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세계를 통일하는 이념. 이것이 프로의 방식이다. 다음 단계의 계획이 끝없이 나와주는 것이다. 인물은 일회용이다. 정책도 일회용일 때가 많다. 이념과 방향성이 진짜다. 그리고 세력을 길러야 한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정치 자체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장기간 양성된 정치집단의 계속성, 일관성, 완결성에서 진짜 이야기가 나와주는 것이다. 이벤트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다음 카드가 나와주어야 한다. 유권자는 변덕을 부릴 것이며 다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프로다. 그냥 자기가 잘 하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부족하고 그 이상을 해내야 한다. 처음에는 개인사 위주의 드라마와 눈물 아니면 고성의 지르기가 나가수의 전부였지만 청중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계속 무언가 플러스 알파를 요구한다. 그게 당연한 거다. 실제로 나가수에서는 계속 새로운 무언가가 나와주고 있다. 안철수가 정치혐오에 빠진 2~30대를 열광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면 곤란하다. 계속 다음 카드가 나와주어야 한다. 문국현은 소통능력이 없었다. 신선한 이미지 하나만으로 뜨려고 했다. 정몽준이나 박찬종, 정주영도 마찬가지였다.
제 3의 길이라며 무소속이나 신당으로 나와서 초반돌풍을 일으키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자빠지는 코스가 선거철의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는데 다 아마추어의 경험부족이다. 다행히 안철수는 로스 페로가 아니다. 그는 문국현이 아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소통이 되는 사람이고 말귀 정도는 알아먹는 사람이다. 주변에 제법 사람이 많은 것이 그렇다.
그렇다고 안철수가 대단한 프로인 것도 아니다. 이제부터 프로가 되어야 한다. 성공하려면 세력을 얻어야 한다. 이미 양성되어 있는 세력을 향해 손을 벌려야 한다. 세력과 소통해야 한다. 스스로 변신해야 한다. 청중은 끝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당연한 거다. 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단조로운 것(아마)은 모두 실패했고 뭔가 풍부한 것(프로)은 모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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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님 댓글을 보며... 드는 생각입니다.(그래서 혼잣말처럼 씁니다)
사람이 비참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짐승의 비천함과 야수적 탐욕을 동시에 체험하는 것.
그런데 대부분 겉으로 이러한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 보여지는 부분은 사실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쌓이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내면에서 스스로 느끼는 부분이다.
인간이 짐승처럼 비천하다.라는 것은 느낄 때, 인간이 야수적 탐욕을 느낄 때...
겉이 아무리 타자들에게 잘 보여져도 속에서 비참하면 겉은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 갈증을 겉에서, 보여지는 것에서 풀수는 없다.
크게 보통 인간들이 살아가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짐승의 비천함, 야수적 탐욕과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때 인간은 넘어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넘어서지 않으면 비참함 속에서 계속 몸을 담구어야 하고, 거기서 질식해 가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에 선을 넘어서야 하고, 뭔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은 비참함을 경험했을 때이다. 그것이 어떠한 종류로 연관되었든...
손수레에 연단을 싣고 끌고 밀며 갈 수 있다는 것은 비참한 것이 아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그럴 이유나 용기가 없는 것일 뿐....
그런 행위 이전에 그 마음이 무엇을 경험했는가가 그 행위에 대한 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체험한(느낀) 그것이 행위를 끌고가는 원동력이 된다. 수레를 끌고 간 것은 의도가 있는 행위이다.
왜 이러한 의도가 나왔는지, 그 의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이것을 공동체로 확대해 보면 집단이 느낀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보았다는 얘기가 된다. 서로 이심전심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행위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것. 생각이 있어서 몸이 비천함을 경험하는 것과 생각이 없어서 몸이 비천함을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각이 있어서 정신이 고귀해지는 것과 생각이 없어서 정신이 비천해지는 것 역시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살아가면서는 쉽게 차별화 되지 않는다. 섞여서 살기 때문에, 그리고 크게 비교를 해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러나 정치는 이것이 가능하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지금 현재 과거의 유훈을 되새겨 본다면 ... 누가 손수레를 앞에서 끌며 뒤에서 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을 앞에서 끌고 간다는 것은.. 짐승의 비천함을 느껴보지 않으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아무데나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여기도 아니게벼, 저기도 아닌게벼...하게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인간이 가야할 길을 보지 못해서이다.
사람들을 앞에서 끌고 간다는 것은.. 야수적 탐욕이 언제든지 자기를 먹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져 야수적 탐욕이 자기를 먹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결국 가기는 갔는데 야수의 뱃속 어디쯤 될까...? 뱅뱅돌다가 죽는다. 어떠한 방향과 목표에서 분명한 기준과 지향점이 희미하면 안된다. 늘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고 살펴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소통이 필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는 길이 분명해야 하고, 시야를 늘 확보해야 한다고 보인다. 그냥 보이는데로 가는데로 간다고 정치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나가수에 대해서...^^
11일 나가수와 18일 나가수를 보면서 속이 시원해졌네요.
관객은 가수가수마다 기대치를 갖고 보고 있고, 그 기대치를 넘어서지 않으면 보는 사람의 가슴이 답답해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대체로 관객이 가수에게 화를 내는 것은 기대치 이상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에 짜증을 부리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기대치를 넘어서 달라는 요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도 되구요.
넘어서면 가슴이 시원해지기 때문에 짜증 안내도 되지요. 답답하지 않으니까.
11일 나가수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조관우 장혜진 바비킴 ..모두 관객이 기대를 안고 시작했는데,
나가수 자체가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에 어떤 무게감 압박감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무게감과 압박감을 뛰어넘어 버렸을 때 시원한 감을 준다는 것이기에,
가수가 자기에게 주어진 기대치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가수들 역시 관객의 비판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비킴은 그것을 한번은 넘어섰으니 여기서는 제외하구요.
조관우와 장혜진에게 지적질을 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조관우는 그동안 나가수에서 보여주었던 지금까지의 모습을 모두 버려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관우에 대해서 특별히 까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고싶은 얘기와 느껴지는 부분을 그래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조관우를 보고 있자면 노래를 좀 한다. 하는 직장상사가 20년째 똑같은 스타일을 고수하며 부르는 노래를 참고 들어줘야 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보고 있으면 내가 뭔가 어색해집니다. 그것은 조관우 자신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색함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고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장혜진도 마찬가지 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느낌....
무대가 장혜진의 온전한 집처럼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확 자신의 모습에서 차고 나와버리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 가수 모두 성격상의 특징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두 가수는 노래에는 스타일이 있지만 무대에서는 무대 자체를 휘어잡는 자기만의 뭔가가 조금은 약하다고 보여집니다. 컨셉은 아무리 주변에서 잡아주어보았자...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운용하지 못하면 어색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이제 빠져나간 김조한은 더 업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알앤비의 대부가 아니라 차라리 마피아의 대부같은 모습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럼 훨씬 더 중량감 있는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제글이 좀 주제가 흐려진 면이 있으나..김대중 대통령이 손수레에 연단을 싣고 다녔다고 해서 비참하게 보였다는 것은 아니고... 그건 사실 더 감동적이고 가슴뭉클해지는 지점이구요. 젊은시절 그렇게 손수레를 끌고 대중을 찾아다녔던 분이 70이 넘어서야 겨우 IMF로 파탄난 나라의 대통령으로 올랐다는점... 그렇게까지 절실한 권력에 대한 의지 또는 사명감.. 국민에 대한 애정...그러한 과정속에서도 지켜올 수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원칙...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참 대단한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그분과 안철수를 비교하는것 자체가 무리겠으나 안철수에게는 그런 절실함이 없는것 같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는 얘기를 하기 싶었던 거지요.
뭐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무수한 비참함을 감수하면서도 나만을 사랑했던 예전 남자와.나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정말 좋아하는지 사실은 긴가민가한) 자신이 쪽팔려지는 일은 감수할 수 없다 하는.... 그러나 일단 결혼하면 바람안피고 거짓말안하고 밥벌이도 웬간히 할것 같아서 내가 더 안달나서 매달리고 있는...... 사기꾼, 날건달, 싸이코 들 사이에서 결혼상대로는 그중 나아보이는 2% 부족한 그 남자...
^^폴라리스님 글의 요지는 충분히 저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다만..그저 조금 더 제 생각을 덧붙여 얘기해본 것이지요.
유시민의 책을 보다가 마음에 와서 콕 박힌 정치에 대한 경구가 있소. "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철수씨에 대해서는 야수적 탐욕도 견뎌낼 수 있을 듯이 보이고 성인의 고귀함과도 가까울수도 있겠으나...과연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오. 사람이 비천함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한 절실함과 자기 자신을 모두 내던지는 용기... 또는 무모함이 있어야 할 듯 한데 말이오. 이 경구를 생각하다 보니 고 김대중 대통령이 떠오르오. 김대중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이가 김대중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써놓은 글을 본적이 있소. "목포에서 잘생긴 남자가 손수레를 끌고 가는데 손수레에 책상 같은것을 싣고 있었다. 뒤에서는 아름다운 여자가 손수레를 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손수레를 끌고가는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뒤에 밀고 가는 여자는 차용애 여사(김대중 대통령의 첫부인)였다 "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정치에 입문한 지 얼마안되는 무명시절이었다하오 . 대중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손수레에 연단을 싣고 부인이 그 뒤를 밀면서 국민들을 찾아다녔다는 것인데..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분이 젊은 시절 연단을 싣고 손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