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가 아이가 둘이나 있데요 글쎄.
하나는 이주노 하나는 양현석.
헐.. ㅎㅎㅎ
서태지와 아이둘~
태왕사신기에서 묘한 느낌을 주더니 묘하게 대박을 냈네요.
어쨌든 서태지가 결혼을 했었다는 것은 쇼킹하네요.
은둔하여 지낸 시간이 오래니 별일이 다 있을 수 있겠지요.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관건일 것 같네요.
터지는게 이들에게는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니..세인들의 비난이야 감수해야겠지요.
터지는게 자유회복!!
쥐박이 온갖 정보를 틀어쥐고 지 좋은대로 주무르니, 이제 청와대에 대지진이 났다해도 구하러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거이다, 이넘아!
저런게 통하나? 봄이 봄같지 않어.
쥐사장을 대통령으로 뽑아서 여러 대통령 잡는구려, 문화대통령 얼굴을 벗겨 쥐사장 가림막을 삼고 있소.
아~ 머리야...
좋은 글이오. 사람답게 살 용기를 얻었소.
예전에 누가 내 치즈를 먹었는가? 라는 책을 보며 환호했었소. 그때 당시에는 그 사고가 조금은 획기적이었다는 것이었고... 또한 굳이 매달릴 필요없는 것에 매달리느니 나의 것을 찾아 나서겠다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기도 했소. 파이의 문제는 결국 양의 문제였기 때문에 적은 양을 갖고 싸우는 것보다 더 많은 혹은 다른 양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었고, 결국 적은 것을 갖고 싸우는 것보다는 다른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도전과 같기에 이 도전은 질이 선행하지 않으면 길 찾기가 애매해져 버리기에 모두 찾아 나서지 못한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오.
파이를 두고 싸울 것인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파이를 찾아 나설 것인가? 라고 보이며, 결과적으로는 다른 파이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모험이기에 성공과 실패는 반반이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은 그대로 축척되오. 또한 여기에 질에서 시작된 도전이라면 다른 파이를 찾아 모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오.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은 읽어 보지 않았지만, 대략 무슨말 하는지는 알것 같소.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몰고가는 느낌이 있다고 느껴지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를 지금 굳이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 경쟁의 도구로 이념으로 사용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이며, 또한 인간의 도전의 문제, 모험, 경험의 축척, 질과양의 문제로 본다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오. 그래서 긍정의 배신 저자는 한 쪽만을 연계시켜 자신의 생각을 부각시켰다고 생각도 되오.
파이를 갖고 싸운 상황을 질로 본다면 좀 더 높은 질을 내기 위해 피하지 말고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되오.
그러나 피이를 갖고 싸운 상황이 양이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 모험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오.
긍정이라는 것도 언제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긍정보다는 사회를 변화시키는게 더 나을 때가 있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긍정으로 변화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되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아마도 사회나 공동체 집단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이기에 개인의 긍정을 재물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쪽인 것 같소.
그러니까 사회변화적인 측면에서도 쓰여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필요에 따른 해석으로 인간들을 많이 혹사시킨 것은 사실이니 사회와 공동체적인 측면이 많이 변화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소.
긍정의 배신 저자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를 치고 들어갔다는 얘기이오. '누가 내 치즈....?'라는 책 내용의 한 면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편 것이니 결국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는 책의 인기(그동안 미친 영향)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라 보이오. '누가 내 치즈를...? 는 한 면 만을 보고 얘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소.
...그냥 맥락에서 본다면 그런다는 생각이 들고, 긍정을 어느 한쪽에서만 생각했다는 것이오.
긍정 그 자체는 개인에게 큰 에너지를 준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소.
단지 긍정을 경쟁을 자극.촉진하는데에 이용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동안의 세계적인 흐름이 그렇게 어느정도 흘러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요즘은 경쟁은 더이상 경쟁력있는 단어가 아니기에 ...그래서 '긍정의 배신'의 저자는 그런점을 '누가 내 치즈..?' 라는 책을 비판하면서 자기 의견을 펴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오.
모든 언어들을 보면 그 언어를 해석하면 같은 말이지만 받아들여 그 쓰임의 용도를 달리하기에 이원론적이 된다고 생각하오. '긍정' 역시 산업사회에서 경쟁을 부추기는데에 어느정도 이용되었다고 보이오. 그래서 긍정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면 아무 문제가 없소. 긍정의 저자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에...사회적인 변화, 공동체의 변화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과 왜곡되게 본다는 것과.... 긍정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 들이고 생각하고 활용하는 것과, 긍정을 다른 어떤 것을 촉발하고자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 그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오.
있는 그대로를 회복한다는 것은 ...그동안 인류가 어떤 이념이나 사조에 의해서 조금은 왜곡되게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고 생각되오. 이념이나 사조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되고....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오...^^;
<긍정의 배신> 의 저자가 <누가 내 치즈를...> 의 인기에 편승하려고 책을 썼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소. 진정성 뭐 이런거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얘기요. 언론에서 신정아가 돈 벌 목적으로 폭로하는 책을 썼네, 노이즈 마케팅 이네... 하는 얘기가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오. 진정성으로 따지면 김일성의 진정성도 봐줘야 하고, 히틀러의 진정성도 봐줘야 하고, 쥐박이의 진정성도 봐줘야 하오.
'긍정' 이라는 말의 의미가 좋은데, 그 중에 일부 잘못된 면만 부각시키는게 아니냐? 맞소. 긍정적인 사고가 때로는 힘이 될 때도 있고, 그것으로 좋은 결과를 불러 올 때도 있었소. 문제는 지금 시대와 어느 지점에서 싱크로 되느냐 하는 거요. 신정아 책이 전체가 거짓이더라도 분명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작용 반작용 하는 부분이 있소.
'긍정'의 사전적 의미는 차치하고, 사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라 '긍정의 주술' 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오. 본문에서도 긍정적 사고가 잘못된 거라는 표현은 없었고... 하여간 본질은 구조론에서 줄기차게 얘기했던 실용주의냐? 합리주의냐? 에 관한 글이오.
미로 속의 쥐가 불평을 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치즈를 찾는 것은 바로 미로속에 있기 때문. 폐쇄된 공간이기 때문이오. 일본사회가 실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역시 섬나라의 폐쇄성 때문인 것이오. 사실 '긍정' 이라는 말은 중요하지가 않소. 갖다 붙인 말이오. 실제로 미로속의 쥐가 치즈를 찾아 바쁘게다니는 것이 쥐가 긍정적이라서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
실용주의가 사회를 병들게하고, 합리적인 비판을 배제 하는 것이 진짜요. 나머지는 큰 의미가 없소. 설령 '누가 내 치즈' 의 저자가 다른 의도에서 책을 썼다고 하더라도, 일단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세상의 물결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있소. 저자가 어떤 의도로 책을 썼건 그 책이 나와 싱크로 되는 부분이 있기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겠소?
인기라는 말이 비약되어버렸네요.
다른말로는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누가 내 치즈를..? 과 그런 류의 서적들이 사회에 끼쳤던 영향력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그 책 자체도 자체지만 그 책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끼쳤던 영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그 책의 영향을 받은 만큼의 사람들과 혹은 사회에 대해서 그런류의 서적들 중에서 어찌되었든 탑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런 류의 책들이 갖고 있는 영역 전체와 영향을 미친 범위 전체를 비판하기 위해 '누가 내 치즈..?을 선정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정확히 그 시대(대략 10년 정도?) 와 그 흐름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긍정의 배신' 저자가 '누가 내 치즈를..?' 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 온 시대에서 보자면 그런 류의 책이 나오게 되는 사상이 정점에 있었던 시기이며, 지금까지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타겟을 정하는 것에서 '누가 내 치즈를..? ' 비교대상으로 선택한 것과 같다고 봅니다. 선별한 것이라고 생각되구요.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거나 부각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누가 내 치즈를 ?' 이라는 책은 그런 류의 책들이 나온 것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리거나 알려진 책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고, 은연중에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기에 ...그러므로 이전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그 책을 꼬집으므로서 상징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되구요.
그러므로 이 책은 사회비판적의 책인과 동시에 그 시기에 신호탄처럼 쏘아 올려진 그런류들의 책이 먹혀들었던 사회전반과 사람들의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저자가 뭔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파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 이용 했다고 표현한 것이구요. 왜냐하면 이 저자가 대상으로 하는 독자들과 내 치즈 독자들이 겹칠 수 밖에 없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가에 대한 관심 집중은 가장 높이 올라 있는 탑의 그 지점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기에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겹치는 부분을 공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겹치는 독자들..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구요. 그것이 변해야 자신의 말이 전달되고 먹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이 저자가 이상한 생각으로 공략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대부분 그렇게 사회는 변화되고,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밀어내듯이..그렇게 자리바꿈이 일어나는 것처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요. 단지 특정한 책이 거론되니 이 저자는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나? 하는 것에 관심이 가는 것이지요. 자신이 주장하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려다보니 '누가 내 치즈를? 이 선택된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사회가 열광했던, 그리고 그런 열광이 조금은 부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그 부분을 저자는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되니까요.
물론 저는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이 든다는 것이고, 또한 '누가 내 치즈즐...?' 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류의 책들 중에서도 다른 부분에서 생각할 부분도 있었다라는 것과, 왜 하필 그 책이어야 했는가? 왜 그 책을 선택해서 꼬집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긍정의 배신 저자의 의중을 살펴보고 싶었다라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그러니까 양모님의 생각을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저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많은 책 중에서 그 책을 선택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보았다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양모님의 리뷰는 리뷰대로 있는 것이고 그 리뷰를 읽고 저는 제 얘기를 끌어낸 것이구요. 그러니 리뷰를 읽고 나서 리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았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비슷한 얘기지만 리뷰와는 별개로 얘기를 한 것이지요. 즉 리뷰가 다른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이라고 보시면 좋겠지요. 나중에 책을 읽어보고 다른 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요.^^
실용의 한계네요. 긍정이든 부정이든 치즈가 어찌 되었던 인간에겐 존엄이 필요함.
진짜배기 1개를 긍정하려면 9개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긍정주의자들은 모르는 듯.
주로 다른 사람을 고용하거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긍정의 힘을 주장함. 문제는 제대로 긍정하기 위해선 늘 건전한(?) 비판세력이 존재해야 가능한데,
긍정만 하다가는 다들 맞장구 치다고 골로가기 일쑤.
불만세력이야 말로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었고,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소.
제대로 된 가치를 긍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부분 긍정이란 것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
긍정적으로 살아서 잘먹고 잘살자는 동물수준에 머무르니 그런 긍정이라면 개에게나 주면 좋을 것.
17살 여름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 말을 알아들어줄 사람같은 선생님이 있어서 찾아서 그랬다.
" 나의 삶, 인간의 삶을 살아갈 필요성을 모르겠다. 결국 모든 것은 속임수.
학교가 나한테 의미가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가 없다.
그냥 혼자 책이나 읽다 죽던가 그게 허락되지 않은면
그냥 살기 위해서 애쓰느니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라고 하는데 그게 다 속임수다.
저들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이유를 만들어내고 합리화시키는데 그건 인간이 만든 신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밖의 이유들의 노예가 되는 것인데... 다 그것들도 궁극의 끝을 모르면서 그저 개나 돼지처럼
생존과 단순한 욕망으로 사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걸로 보인다."
선생님은 날마다 방과후에 남아서 참선과 요가를 배우라고 하셨다.
무슨 주문, 마인드콘트롤처럼 우주의 진리, 참, 우주의 조화력 이런걸 되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서울대를 가라고 하시며 내 학습관리에 들어가셨다.ㅎㅎ
몇번 하다가 도망다녔다. 재미가 없어설.(지금도 쫌 죄송하다)
실제로 그 이유에는 뭔가에 간섭받고 관리되는 것을 못하는 나의 게으름이 70%는 넘었으니까
어쨎든 게으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어보이니까.
대부분의 긍정이라는 것은 기복을 하는 종교적 주문과 큰 수준차가 있지 않다.
서구에서 그 긍정의 주문서(?ㅎㅎ) 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들의 기독교적 우주관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나?
"신은 죽었다."
"긍정은 죽었다."
ㅎㅎㅎ
긍정도 부정도 없다.
명확한 사실, 구조가 있을 뿐이다.
긍정도 부정도 때로 영양주사처럼, 때로 엔돌핀 주사처럼(반대로 담배나 마약처럼),
심신을 달래주거나 이완시키는 효과는 있다.
도가 지나치면 중독에도 걸리게 된다. 역시 마약처럼 자기는 기분좋고 주변은 괴롭게 한다.
e-book은 뭐니뭐니해도 전달매체(medium)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종이책처럼 쉽게 펴들고 볼 수 있는, 조작이 쉽고, 읽을 때 눈이 안아픈 그런 기기 없을까요~?
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기기(아이패드 포함)들은 모두 만족스럽지가 못하네요..
책도 오래보면 눈이 아프죠 ㅎ. e-ink는 책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되죠.
요즘 나와있는 전자책 리더기는 대부분 아이패드보다 더 얇고, 가볍습니다. 하지만 터치패드가 아니어서 조작하는데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요. kindle이나 인터파크의 비스킷과 같은 리더기는 3g로 어디서든 책을 구매해서 다운받아 볼수 있어 접근성이 매우 좋습니다. 어디 휴가가실 때 리더기 하나면 읽을거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ㅎ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자책은 그 수가 너무 빈약하고, 아직 인터페이스가 완전히 유저에게 맞춰져있지 않은면이 있습니다. 또한 근시일내에 flexible e-ink나 color e-ink의 상용화가 이루어질 듯하니 앞으로는 colorful한 책들도 전자책으로 출판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으니... 요구 조건이 많으시면 좀 더 기다려 보시는게 좋으시겠네요.
e-ink가 아무래도 질감이 종이와 같을 수는 없겠죠.. ^^; 다만 제가 시중에 나와있는 전자책 리더기를 봤을 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그럽니다. 삼성에서 나온건 완전히 망했고 킨들도 개선할 여지가 많아 보여서...
애플이 최근 획득한 특허가 LCD와 e-ink를 번갈아 가면서 쓰는 거라고 하네요. 아이패드 3부터 적용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소비자는 날로 편해집니다. 집안에 가득한 책장이 단촐해지는 시점이 머지 않았습니다.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10408204120&type=xml
협박이지요.
협박에는 협박으로 대응하는게 맞소.
국적없는 탈세선박왕은 저격해버리면 그만.
그것이 해적의 법칙.
원래 국가의 발생원리가 해적의 법칙에 의해 성립하므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대항논리에 따라 국가가 이건희를 칠 수도 있다는 거.
누가 보호해줄 것인가?
자국 아니면 누구도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않소.
친일파 재산을 압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국가가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는데 국가를 배신하면 공민권 박탈에 전 재산 압류가 당연지사.
삼성의 전 재산을 압류하고 이건희를 쏴버릴 수 있다는게 국가건설 법칙이오.
혁명이나 저항은 그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
유승준 꼬라지를 보세요.
공민권 박탈로 대응함은 당연한 것이오.
삼성이나 좃선이나 거지같은 작자들이군. 한참 피 빨아먹고 좀 크니까 어디다가 협박질이야.
미친 논리.
삼성이 기자 아빠라도 되나보다. 아빠가 떠나면 어떻해요?
잉잉잉. 그러니까 아빠 있을 때 효도해야지~
어휴.. 정말 이런 기사 때문에 반기업정서가 더 커지겠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대상 자체를 거부하거나 공격하면 그에 합당한 대응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거대 재산으로 거대 기업으로 거대 글로벌로 맞선다는 것 그 자체는 국가라는 보호수단이 없다면 땅없이 떠도는 유랑민에 불과한 것이니...삼성이 국제 미아가 되거나 유랑걸식하거나 국가의 보호를 받거나 중에서 선택은 할 수 있다하여도 그 최종 결정은 대한민국과 국민이 결정한다는 것.
구조론으로 보면
개인에서 가족, 부족, 국가, 세계로 확대되는게 아니고 그 반대이오.
인간이 처음 태어날 때 세계와 국가가 먼저 개입하오.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여 인구가 두명밖에 없는 국가를 생각해 볼 수 있소.
지구에 인구가 두명 있는 나라 하나 밖에 없고
둘 중 하나가 대통령이고 하나는 국민인데 아기가 태어났소.
그런데 생존가망이 없는 기형아이오.
동물은 생존능력없는 아기를 버리는 경우가 많소.
인간은?
그 아기를 버릴까요 키울까요?
옛날이라면 바로 버렸을 확률이 높소.
어쨌든 존엄의 문제가 맨 먼저 판정되오.
즉 그 생명체를 인간 아기로 대접하여 키울지 아니면
기형아니까 바퀴벌레로 대접하여 버릴지?
다시 말해서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느냐 마느냐는 그 순간에 정해진다는 것이오.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고 버렸다고 칩시다.
버렸는데 그 아기가 살아남았다면?
고대설화에 흔히 나오듯이 학이 아기를 품어서 보호하고 늑대가 젖을 물려 키우고
그 버려진 아기가 성인이 되어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 보복한다면?
이러한 대항원리에 의해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오.
아기가 탄생하면 맨 먼저 출생신고를 하는데 즉 국가가 가장 먼저 개입하오.
그 이유는 대접의 문제, 존엄의 문제가 가장 우선하기 때문이오.
기업의 탄생도 아기의 탄생과 마찬가지오.
아기를 버릴지 말지 부모가 결정하듯이
기업을 살릴지 말지 국가가 결정하는 것이오.
기업이 국가를 배신하면 국가는 기업을 버리오.
즉 공민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오.
(공민권을 박탈한다는 것은 누가 와서 죽여버려도 죄가 안 된다는 뜻, 바퀴벌레 죽여도 죄가 안 되듯이.)
거기에 기업은 어떤 대항수단이 있는가?
탈세범이 4000억을 탈세한 것은 속임수라는 대항수단을 쓴 것이며
기업이 속임수로 대항하면 국가는 응징으로 대항하는 것이 맞소.
대항할 수 있으면 대항해도 좋소.
미국이 카다피의 해외자산을 동결시켜 버리듯이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대항하는 것이오.
바보들 중에는 내정간섭 운운하며
남의 나라 일에 왜 외국이 개입하느냐 하고 흥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의 나라 일에 개입할 수단이 없어서 개입하지 않는 것이고
수단이 있으면 당연히 개입합니다.
대부분 현실적인 목표가 무엇이냐
그 목표를 달성할 수단이 있느냐가 기준입니다.
중국은 견적이 안 나오니까 못 건드리고
북한은 핵이 있으니까 못 건드리고
소말리아는 해적들이 빡세서 못건드리고.
리비아는 만만하게 보고 건드렸는데 거 쉽지가 않고.
약소국들은 대규모 동맹을 체결해서 대항수단을 획득해야 하는데
일본은 탈아입구 운운하며 고립주의로 가서 망가지고.
기업이 탄생한 곳을 배격하면 권리는 누리고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 것이니, 국가가 그 자격(보호,혜택= 권리, 세금납세=의무)을 박탈하는 것이 맞으나...
국가대 국가의 간섭은 내정간섭이 되는데.... 나라 대 나라에서 간섭하게 되는 이유들에서도
그 시대의 국제적 상황,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것들과 상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대의 국제질서,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 그 시대가 추구하는 방향..등등
카다피 등은 현재 국제질서의 방향과는 잘 맞지 않는 것이고, 독재가 가능한 것은 이유가 있었겠으나 독재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에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기에... 국제적 간섭이 힘을 얻으나 방법에 있어서 실효를 가두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어찌되었든 간섭하기위해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을 결부시켜 어떤 이론이나 룰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같구요.
역사이래 많은 전쟁들도 그러하고, 식민지와 민족주의적 제국주의도 그러하고, 신자유주의 무역정책들도 그러하고,
민주주의적 시스템도 앞으로도 더 많은 변화가 있겠지만...어떤식으로든 개입하고 간섭하고 관여하기 위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입과 간섭과 관여가 더 큰 힘이나 더 큰 연대가 더 큰 흐름의 상위의 에너지라면 작은 것은 거기에 연동되어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번 일본 원전의 경우도 일본은 내정간섭을 피하고 싶어서 무리수를 두고 있으나..국제 질서나 정서는 이미 내정간섭을 하려는 쪽으로 가고 있고, 또한 간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본이 미워서 감정적인 발산이 아니고, 앞으로의 경제나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 상호 협력이 안되면 같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또한 허점을 보이게 되면 간섭의 빌미가 되어 어떤식으로든 구실을 제공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일시적일 수도 있으나 국가의 위상이 약화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더 큰 힘은 언제든지 간섭할 자세가 되어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큰 힘보다 작은 힘은 간섭을 당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큰 힘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보입니다.
기업도 국가보다 힘이 크면 국가를 찜쪄먹을 수 있겠으나 그렇게되면 국가의 존립이 국민의 존엄성 보호보다는 개인 기업 보호수단으로 전락하기에 국가가 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가 바람직하다고 보이며,
나라도 하나의 나라가 전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형태는 그동안 많았으므로 ... 국가들의 연대로 거대한 단일국가적 힘과 대항할 수 있는 세력도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큰 힘이 있으면 그에 대응할 힘이 상대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지만, 큰 힘에 작은 힘이 간섭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절대적으로 세팅되어진 것이라고 생각되구요. 큰 힘이 질서를 만들고 룰을 만들기도 하지만, 큰 힘에 연동되는 작은 힘들은 최대한 덜 휘둘리는 방향으로 약진하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되구요.
개인이 국가에 연동되고, 기업이 국가에 연동되고, 국가가 국제사회에 연동되고, 깡패국가 해적국가 땡깡국가 등등의 힘을 통제하는 것은 지구안의 세계적인 수준이 높아져야 합리적인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네요.
샘승은 미쿸으로 가는게 좋을 듯...
불법 증여, 세금 탈루로 감옥에서 한 500년은 썩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김치냄새 나는 '클리넥스 소설의 싸구려 위안"
아주 적절한 표현이구만 뭐. 생김치도 아니고 쉰김치.
그 양반 소설은 오래 전에 몇구절만 읽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소.
쳇. 미국도 쓰레기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구만.
신경숙씨 출판기념회 인터뷰도 가관.
에구... 챙피해서.... 정말.
애초에 자존심이 없는 문학이
무슨 한국문학의 자존심을 대표한다고.
우리나라는 남자들의 작품이라 해도 대부분 지식인의 같잖은 자기 연민이 많소. 푸념이나 하는 소리. 칼럼이나 영화평이나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마이뉴스에 드글드글한 거. 그런건 기본적으로 3류요.
입만 열었다 하면 자본 어쩌구 하는데 그 자본 반대편에는 불쌍한 지식이 포지셔닝 하고 있는 거고, 따라서 칼럼이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자본타령 나왔다면 이미 실패, 더 볼것도 없소.
창의성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오. 전혀 예술이 아니오. 전위가 아니면 작품도 아니오. 앞서 있지 않으면 발명이 아니듯이, 앞서가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오. 문학 아닌 것으로는 백만권을 판들 안쳐주오. 개똥이오.
아직도 우리 국민 다수가
오래된 식민지 역사에서
못 벗어나고
안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에 감사하다는 뉴라이트 패거리나
우리 땅 독도를 우리 땅이라 말도 못하는 욘사마 배용준이나
상황에 안 맞게 구역질나게 읍소하는 그 누구들
이 모두가 식민지 노예들의 자세 아닌가 ?
중학교 때 까지 무슨 소설 작가 라고하면 엄청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지.
고등학교 들어간 후 부터 국내 왠만한 소설은 다 읽어보고 코웃음이 났다. 이 정도 수준으로 뭘 하겠다는 얘긴지... 김진명, 공지영, 양귀자 등... 찌질거리는 이야기...
고딩시절에 그나마 재미있게 읽은 것은 <불멸의 연인> 이건 영화로 봐도 재미있었다. 군대가니까 평소에 소설은 안읽던 녀석들이 죄다 <아버지>, <가시고기> 따위를 읽고 "감동적이야"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역겨움이 밀려왔다.
요즘 나온 소설도 마찬가지. 소설을 제대로 읽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가끔 대형 서점에 가서 소설 첫 페이지만 봐도 "이건 아니야..." 라는 생각이 바로 든다. 한국 찌질 소설류는 상대성. 절대성의 소설이 없다. 그래서 감동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