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인의 자존심을 세울만한 규묘.
그러나 미학적으로는 별반 가치없소.
악양루가 그 중 낫소.
이 사람들은 침입을 많이 받았나...
집이 아니라 요새로군요.
계엄령 내리기 좋은 형태..10시 되면 바깥출입 안되니 자야하고, 일단 사적으로 비밀이 유지되기 어렵고, 재산소유는 공동소유 혹은 집단 소유형태여야 할 것 같고, 그러다보니 재산을 한데 관리가 가능......, 가부장적 권위의 질서가 있어야 유지될 것 같고, 등등...
아파트의 폐쇄성의 기원이 여기인가?
요즘 아파트 단지들의 폐쇄적인 형태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집의 형태 때문인듯... 집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뒤에 손오공 발견.
객가족도 한족에 속한다는데,
저들이 외부로 나와서 출세한 사람이 아주 많소.
화교들 중 돈좀 벌었다는 사람, 정치인 등등...
숫자에 비하면 아마 한족 중 가장 최상위 그룹에 속할 것이오.
그래서 차별받지않을 수 있는거 같소.
객가어 체널을 고수할 정도로 정체성이나 자부심도 대단허고.
객가족들이 한족전체에 기여하는지, 반동인지는 잘 모르겠소.
저 뚱그런 집은 참 답답해 뵈오. 세상에 뭔 생각으로 저런 데서 살았다냐.
봉천동 귀신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나보오.
봉천동 귀신을 본 외국인의 반응이오.
어둠의 경로로 영화한편 봤는데, 구조론 강연듣는 수준임. ㅋㅋㅋ
김기덕은 영화를 가학과 피학과 자학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또 흑과 백은 같은 색이라고 누누히 말했는데, 영화로 만든다는게 대단. 이야기 할수 있고, 펼칠수 있다는거. 삶은 모순이지만, 그것을 통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고 귀함.
또, 오해고 이해고 나발이고, 상황이 슬프다고 했다.
역시 음지로 봐서 미안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도 생각나고,
김기덕이 화면 밖을 보는 눈빛에서 내 눈빛과 만나서 눈 맞춰보는 재미에 재미있었고,
한 사람의 인생을 훔쳐본 댓가는 재미와 함께 나의 인생을 보는 것에서 어떤 오버랩되는 것들이 생겨나 긴장되기도 하지만, 완전한 긴장이라기 보다는 조금 느슨한 긴장이오. 김기덕이 자기를 오픈하여 드라마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정신차려라...하는 소리가 참 만족스럽게 들렸소. 영화보면서 댓가를 치른 것이오. 그의 인생에서 나의 인생도 같이 보았으므로... 그런데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면서 내 인생을 보니 그리 크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도 들었소. 사실 까발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오.
객관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본다는 것.
악역이 정말 쉬운 것이다. 하고 싶은데로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선함은...? 어려운 것일까?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보자면 선함은 어려운 것이다.
세상은 선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굴러가는 세상은 악역을 자처하고 지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려운 것이다. 방향을 잡고 길을 잡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선함이다.
선함이 자라나는 악을 이겨내는 것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그 시간이 스스로 키워 내고 성장시킨 악을 소탕해 버린다면 고귀한 시간의 죽임이었소.
한 사람이 자기의 한을 풀어버리는 의식을 치루는 살풀이라고 생각되어졌다.
다른이가 자기의 억눌림과 한을 풀어버리는 살풀이에 내가 우울해 할 것은 없다. 그 살풀이 장단을 그저 따라가보는 것으로 족하다.
사족:
악이 아니었음에도 때로는 악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거기서 인간의 방황은 시작된다.
악이었는가? 아니었는가(비록 선함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를 판별 할 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방황이 시작된다.
결국 보이기에는 방황이지만, 그 내면은 한바탕 사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알아야 하고, 그 상황을 정리해야 되는 숙명을 떠 맡게 된 것이다.
그 작업을 거치치 않고는 다른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없다.
인간은 왜 그 작업을 거쳐야만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리면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걸러내기를 한다. 사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의미를 찾아낸다.
이 작업은 단순히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선다.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그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몰고간다. 죽든가? 살든가? 양단간에 결판이 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통하여 불순물들이 걸러지고 건조한 뼈대만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여명의 빛을 보게 된다.
다시 새로 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갈리는 순간이다.
인간의 열정으로 무엇인가가 자랄 때 악도 같이 자란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진행될 때 악은 반드시 같이 자란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받아 들이는 자들의 해석의 몫이고, 한 나무 아래 여러 나무가 같이 자라다보면 그늘이 져서 자랄 수 없기 때문에 고사되던가? 자라지 못하고 정체되던가? 땅을 옮기든가? 하는 것이다.
여기 바로 그 지점..옮겨가는 것에서 악은 자라나는 것이다. 악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몸이 옮겨 가든지, 마음이 옮겨가든지, 즉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신의 교류로 옮겨간 것도 옮겨 간 것이다.
이쪽에서는 이것을 보내도 저쪽에 도달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함께 살 수 없다. 인간은 언젠가 떠난다. 인간이 자기 수명으로 죽거나 혹은 그냥 자살하여 떠난다고 하여 그것이 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명이 아닌 옮겨가는 자리와 터전에서는 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옮겨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악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이별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별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자기 멋대로 이별을 해 버리는 것, 자기 멋대로 이별의 시점에 방점을 찍어 버리는 것, 자기 멋대로 살아서 상처를 주어 이별하게 하는 것.... 억지로 잘라내게 하는 것이 곧 악이 된다.
좋든 싫든, 어떤 생살을 잘라내는 아픔을 뇌는 강하게 인식한다. 쇼크다.
그것은 인간에게 쇼크를 주게되어 뇌 세포를 파괴하는 것 같은 아픔을 준다.
즉 한 순간 정신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쇼크는 의외로 오래갈 수 있다.
쇼코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방황한다. 쇼크상태라는 것은 놀랐다.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놀라서 정신을 놓았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자신이 놀란 상태에서 정신을 놓았다. 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 순간..정신은 다시 제 정신을 차린 것이 된다.
그런데 받아 들이게 되는 그 과정이 어렵다. 그냥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작업(방황으로 보이는 것이 내면에서는 전쟁으로 치닫고 분노의 마음이 들끓는 상태, 자신의 이성과 상관없이 마음이 통제가 안되는, 마음이 저 혼자 움직이며 분노를 증폭시키는, 그리고 찾아낸다. 건조한 구조를... 그런데 이것은 혼자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자극이나 정신에 에너지가 가해져야 한다. 밥을 먹어야 하듯이 정신에도 밥이 필요한데, 그것은 외부자극이 될 수도 있고, 내부 자극이 될 수도 있다. 내부 자극으로 문득 깨닫게 되는 것들, 혹은 외부자극으로 문득 깨닫게 되는 것들이 방향을 잡게 한다. 이 부분은 설명하기 어렵다....ㅜㅜ )
그리고나서 다시보면 웃기는 상황을 보게된다. 무엇 때문에, 왜, 방황을 했지? 하는... 마주치는 상황에 대한 낯설음을 보게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데, 세상이란 그런 것인데.... 하는 헛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것.
그러나 내면은 정리를 해 나가고 있는 상태가 되어 있고, 선이라는 자체가 불분명하고, 그저 열정에 의한 행위였을 뿐인 그것이 악도 같이 동행하게 하였다라는 것에 있어서..자신이 선을 지향하는 바를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한다. 즉 처음으로 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전 까지는 선이라는 것 자체는 인식이 되지 않는다. 선도악도 아닌 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업 이후에는 선과 악은 분명히 선을 나누고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선과 악이 현실에서 분명하게 나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과 악에 대해, 선의 지향점과 악의 지향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선이 제대로 가지 않으면 악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선은 길을 잡아야 하고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디에 접속해야 하는지를 알게된다.
물론 모두 이 작업을 통해 이러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모두가 이러한 결과를 도출한다면 세상에는 악 그자체가 없을 것이므로...., 즉 자기만 잘 한다고 선은 아니다. 상대가 반드시 악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 상처를 입고 쇼크를 받는다. 그것은 상대와 자신에게 있어서 같은 방향성을 타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동상이몽일 수도 있고, 서로 선 그 자체에 대해서 인식이 확실하게 박혀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럴 때에는 선도악도 아닌 행위 그 자체와 그저 상대적인 악이 있을 뿐이므로...., 이럴 때 상대적으로 악을 규정하게 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규정된 악이 상대적인 원하지 않는 선함(이때 강요되는 선은 배려, 이해, 포용,대인배...등등..)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 인간은 당황하게 된다. 뭔지모를 비참함, 부끄러움, 추함을 경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상황이 구토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역겨워지게 되므로 당연히 세상을 떠나거나 세상밖으로 숨어 버리고 싶게 한다. 사라져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작업을 통해 자신을 다시 만나고 자각하고, 세상을 자각하고 세상과 화해(사랑, 선함을 만나게 됨)하게 됨으로 인해서 여명이 비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의 건조한 뼈대를 보게되면 세상은 그런 것이다. 라는 끄덕임이 나온다고 여겨진다.
이상은 김기덕 영화를 보고 느낀 제 사족이었습니다.
주성치가 영화 좀 찍어줘야겠다는 객가족 복건토루.
모든 것을 안에서 해결하려 드는 중국인의 폐쇄성을 연상하게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