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보는 자세 어린이에게 손가락 끝을 자기 쪽으로 해서 손을 그리게 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손을 옆으로 틀어버린다. 혹은 눈을 틀어버린다. 정면보다 측면이 그리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손은 옆으로 돌아가 있다. 눈이 옆으로 옮겨가 있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아시아인은 지난 5천년 동안 눈으로 뻔히 보고도 소실점을 보지 못하였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 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기본적으로 1+1=2가 안 되는 것이다. 중요한건 방향판단이다. 우주 안에 방향은 하나 밖에 없다. 그 방향은 움직이는 방향이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으면? 방향이 없다. 움직이면 방향이 서고 그 방향은 하나의 방향이며 그 정점에 센터가 있고 소실점이 있다. 나이테의 가운데 심이 있다. 심으로부터 사방으로 자란다. 나무가 자라는 방향은 하나다. 가운데의 심이 센터이고 소실점이다. 모두 그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심에서 멀어지는 하나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다. 우리는 좌우, 상하, 전후로 방향이 둘씩 짝지어 있다고 착각한다. 혹은 동서남북에 사방팔방이 무수히 있다고 여긴다. 이 경우 상대성이 작용하고 역설이 적용되므로 사태는 꼬이고 만다.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관점이 틀렸다. 눈을 틀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방향은 없고, 움직이는 것에 방향이 있으며 방향은 하나다. 마이너스는 있고 플러스는 없다. 마이너스는 자연의 사실이고 플러스는 눈을 바꾼 것이다. 관측자의 위치이동이다. 손을 그리도록 시켰더니 슬그머니 손을 옆으로 돌린 것이다. 정면을 그리랬더니 측면을 그린 것이다. 모든 플러스는 사실의 왜곡이다. 소실점을 보지 못한 것이다. 눈 뜨고 지켜보랬더니 눈동자를 움직인 것이다. 영어에 ‘가다’는 있고 ‘오다’는 없다. ‘come’은 ‘오다’가 아니라 ‘모이다’이며 ‘가다’의 뜻으로도 쓴다. 같은 이치로 ‘주다’는 있고 ‘받다’는 없다. ‘받다’는 주는 물건이 땅에 떨어져 깨질까봐 손으로 받치라는 말이다. ‘주다’는 A와 B의 관계를 나타내지만 ‘받다’는 사물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대등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받다’는 ‘주다’의 반대가 될 수 없다. ‘주다’는 방향이 있고 ‘받다’는 방향이 없다. ‘드리다’는 물건을 주인이 앉아있는 방 안에 살그머니 놓아두고 물러가라는 말이다. 가까이 오면? 때려죽인다. 왜? 하인은 함부로 주인 곁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여놓고 물러가야 한다. ‘바치다’는 조금 더 가까이 와서 손으로 받치고 기다리면서 주인이 집어가게 하라는 말이다. 이는 주인 곁에 접근을 허락받은 몸종이 쓸 수 있는 말이다. ‘바치다’, ‘드리다’는 모두 계급사회에서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계급어이며 실제로는 불필요한 말이다. 엄마는 젖을 주고 아기는 젖을 받는다? 아니다. 아기는 젖을 ‘먹는다’가 맞다. 일본어는 무엇이든 ‘받는다’고 한다. ‘친구가 물건을 사주더냐?’가 아니라 ‘친구에게서 물건을 사받았느냐?’로 말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메일 보내기’는 있어도 ‘메일 받기’는 없다. ‘받는다’는 개념은 인간의 주종관계에서 비롯된 표현일 뿐 자연의 법칙은 아니다. 자연에 ‘받다’는 없다. 자연에 투수는 있어도 포수는 없다. 능동은 있고 수동은 없다. ‘받다’로 쓰이는 accept, get, take, receive는 어원으로 보면 잡다, 갖다, 당기다에 해당한다. accept는 capture의 의미로 잡다, get는 가두다, 꿰다의 의미로 갖다, take는 touch의 의미로 당기다이고 receive는 accept와 같다. 마이너스는 있어도 플러스는 없다. 주다는 마이너스, 받다는 플러스다. 플러스는 원래 없다. 우주 안에 없다. 과학어가 아니다. 뇌 안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잘못된 언어를 쓰니까 헷갈리는 거다.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은 사물을 암수로 구분하여 모든 단어에 성별을 붙인다. 정글의 부족민들 중에는 모든 사물을 ‘쓸모있는 것’과 ‘못 쓰는 것’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바보짓이다. 먹다는 있어도 먹히다는 없다. 먹히다는 먹다를 반대편에서 본 것이다. 먹다를 행한 주체는 있어도 먹히다를 행한 주체는 없다. 먹히다는 당한 것이며 이것은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오직 에너지가 가는 한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 양방향으로 접근하니 상대성이 작용하고 역설이 작동하여 꼬이는 것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이 도리를 알면 결을 읽는 법을 알 수 있고 결따라 가면 된다. 이 도리를 알면 성공한다. 결따라 가면 이긴다. 무엇보다 결을 읽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왜 결을 읽지 못하지? 방향은 하나인데 두 방향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플러스는 없는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물에 성별은 없는데 쓸데없이 성별을 붙이기 때문이다. 책상은 남자고 자동차는 여자라면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해는 남자가 아니고 달은 여자가 아니다. 개구리는 남자가 아니고 쥐는 여자가 아니다.
영어에 ‘가다’는 있고 ‘오다’는 없다. ‘주다’는 있고 ‘받다’는 없다. 그러므로 마이너스는 있고 플러스는 없다. 화살은 있고 과녁은 없다. 자동차는 있고 주차장은 없다. 빛은 있고 그림자는 없다. 만약 있다면 눈을 틀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이해되었는가?
과녁은 있는 것이 아니라 과녁으로 쓰는 것이다. 누가? 활이. 주차장으로 쓰는 것이다. 누가? 자동차가. 따로 임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림자의 임자는 빛이다. 임자가 있는 것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곳에는 방향성이 없다.
결따라 가면 풀린다. 결은 한 방향이다. 양방향으로 가므로 꼬이는 거다.
이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모든 상대어를 절대어로 변환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1+1=2를 행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그대 인생에서 플러스를 배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받다를 삭제할 의지는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받아들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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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은 있는게 아니라 쓰는 것. 누가? 활이.
주차장은 있는게 아니라 쓰는 것. 누가? 자동차가.
항상 임자가 있소.
별도로 입자가 있는 것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승부사가 방향을 판단할 때 임자가 있는 것은 제외해야 하오.
새끼곰을 쏘다가 어미곰에게 잡아먹히는 법.
어미곰을 쏘고 새끼곰은 주워가는게 정석.
진보는 자궁이 있고 보수는 불임이오.
양모님의 표현을 빌면 투표를 하는 것은 돈을 꾸어주는 것과 같소.
자궁이 있는 진보에게 꾸어주면 돌려받을 가능성이 있고
불임인 근혜언니에게 꾸어주면 못 돌려받소.
왜?
자식이 없으니까.
그동안 보수가 진보에서 빼먹기로 양자들이는 수법을 써왔는데
보수에서 내세우는 인물은 다 진보에서 빼간 양자이지 적자가 아니오.
주는사람 이외의 사람은 그냥 의미 없음.
빛과 그림자?
화살과 표적?
차와 주차장?
진보와 보수?
I am co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