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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260 vote 0 2012.01.08 (23:33:29)

사실주의의 의미

 

-다른 글에서 리플로 했던 이야기를 정리했으나 진의가 전달될지는 의문.-

 

길을 묻는 사람에게 나침반을 주었더니, 자신은 북쪽 지역에 볼 일이 있다며 N극만 떼어 가더라.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항상 일어난다. 바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로 당신이, 바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역할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타파해야 할 당신의 N극은 역할이다. 당신은 역할에 사로잡혀 있으며, 역할을 통해 집단과의 상호작용을 시도한다. 그렇게 역할을 할수록 당신의 본래면목에서 멀어지고 만다. 역할한다는 것은 곧 하부구조에 종속되는 길이며 시소의 한쪽 다리에 냉큼 올라타서 상대편을 향해 응수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을 보라. 역할을 주면 바로 똘끼를 발휘한다. 한나라당 비대위가 하는 짓, 고승덕이 하는 짓. 김문수가 하는 짓. 박근혜가 하는 짓.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한다. 집단의 분노를 끌어낸다. 그리고 파멸한다.

 

시소의 이쪽에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이 타고 있었고 저쪽에 딴나라당이 타고 있었다. 두 분이 시소에서 내려버리자 그들은 맹렬하게 역할을 시작했다. 창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멋진 무대가 펼쳐졌다. N극을 떼어 품에 안고 미친 듯이 뛰어갔다. 쏘아진 화살처럼 그들은 날아갔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들은 갔다. 아해들의 불안한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달을 가리켜도 한사코 손가락만 바라보는게 인간이다. 손가락 말고 달을 보라고 백번 쯤 말해도 악착같이 손가락만 본다. 그러므로 훈련되어야 한다. 피상적인 접근은 곤란하다. 머리로 이해하려들지 말고 뼈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쉬울 수도 있다. 서양사람이 중국인에게 원근법을 가르쳐주자 중국인이 그것을 이해하는데 300년이 걸렸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이해한 중국인이 다른 중국인에게 가르쳐주자 3초만에 이해했다. 어렵고 쉬운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입장의 문제다.

 

‘1+1=2’라고 할 때 ‘아. 답은 2구나.’ 하고 2만 주목하면 대화가 안 되는 경우다. 중요한건 ‘1+1’과 ‘2’가 세트로 다닌다는 점이다.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왜 서양인이 300년 동안 중국인에게 원근법을 가르쳐 줬는데도 중국인은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쓸모가 없을까? 중국인들이 쓸모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원근법 해서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딴거 실생활에 필요없기 때문에 그들은 피상적으로 접근했고, 그래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화가 안 통한 거다.

 

대화가 통하는가? 써먹을 데를 찾으면 이미 대화가 안 통한다. 진리는 원래 쓸모가 없다. 진리는 공변되니 둥글어서 써먹을 뾰족한 모퉁이가 없다. 원근법이 쓸모있게 된 것은 3백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물론 아직도 원근법 없어도 먹고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는 사람 많다. 구조론 역시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3백년 동안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한다. 3백년 안에 알아들을 자신들은 있으신지 각자 자신에게 반문해 볼 일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어도 한국인들은 세종대왕이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벌였는지 500년간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세종대왕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물론 아직 다수의 한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영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왜 원근법인가? 이현세식 만화는 그림이 아니라 일종의 기호들의 집합이다. 기호는 뭔가를 기록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는 옆으로 구부정한 줄을 그어서 (~~~~~) 산을 나타낸다. 그것이 산이라는 사실만 표시하면 된다. 산을 그려줄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관객이 ‘아. 이거 산이구나.’ 하고 알아먹기만 하면 된다.

 

이현세식으로 이미지 만화가 아닌 텍스트 만화를 그려서는 절대 ‘슬램 덩크’를 그릴 수 없다. 그림체와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다. 그림체에 따라 만화의 내용이 상당히 정해져 버린다. 동양화가 왜 천편일률적인 산수화인지 생각해보라. 그림체가 내용을 규정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 밖에 그릴 수 없다.

 

이현세는 여자 얼굴을 하나 밖에 못 그리기 때문에, 여자주인공이 활약하는 만화를 그릴 수 없다. 그건 무리다. 같은 얼굴을 그려놓고 머리색깔을 바꾸거나 안경을 씌우는 정도다. 특히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여성의 나이차이를 그릴 수 없다. 코 밑에 아줌마주름을 그리느냐 안그리느냐인데 그리면 50대 아줌마가 되어버린다. 안그리면 20대 여성이다.

 

이현세식 그림은 1+1=2에서 2를 떼어낸 것이며 나침반에서 N극을 떼어낸 것이다. 그 떼어낸 부스러기를 다시 합쳐봤자 원래대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냥 부스러기의 집합일 뿐이다. 순서와 방향과 타이밍과 밸런스가 사라졌다. 그 안에 있어야 할 기운은 없다.

 

그림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이 없고 긴장이 없으므로 장면장면에서 얻어지는 소소한 재미가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장면과 장면의 대결이 아니라 막장드라마식의 줄거리를 따라간다. 미션임파서블의 탐 크루즈가 허공에 매달렸을 때 그 스틸컷 한장 안에 아슬아슬한 긴장이 있다.

 

이현세식 만화는 그런 긴장을 절대 만들수 없다. 그래서 야구만화에 야구하는 내용은 별로 없고 남녀간에 밀고당기는 멜로가 이야기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슬램덩크에는 농구가 있는데 외인구단에는 야구가 없다. 외인구단이 어떻게 이겼는지는 말해주지 않고 그냥 이겼다고 전광판에 스코어를 써놓는다.

 

전부 연동되어 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사실주의는 형식이다. 그림의 질서는 그림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의 쓸모에 따라 결정하면 곤란하다. 왜 동양의 산수화가 다 지도가 되어버렸는지 생각해야 한다. 왜 죄다 작게 그렸는지 생각하라. 원근이 안 되니까 작게 그리는 거다. 일단 작으면 원근의 어색함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릴 수 있는 영역이 크게 제한되고 만다. 상상력은 죽고 만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하나의 세트이며 이 안에 순서와 방향이 들어있다는 거다. ‘A면 B다’의 상호작용에 의해 운동한다는 거다. 항상 이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구조론을 음양론이나 오행론 혹은 불교의 그 무엇에 갖다대려는 시도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순서와 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질이나 입자에 잡혀 있으면 피곤한 거다.

 

지도를 펼쳐놓고 어디가 서울이고 어디가 부산이냐 찾는다면 대화가 안 되는 경우다. 동서남북을 아는게 중요하다. 루트를 알고 과정을 알고 프로세스를 아는게 중요하다. 서울이나 부산은 몰라도 된다. 수학선생의 삼각자에는 눈금이 없다. 자꾸 눈금을 찾으려 하면 자를 던져버리는 수 밖에 없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육조 혜능이 결론을 내렸다. 깨달음은 금강경을 버리는 것이다. 이론을 버리고 미학을 얻는다. 삶이 자연을 복제한다. 인물이 바운더리를 복제한다. 자연의 에너지가 자신을 통과하여 가게 한다. 인간은 하나의 악기다. 우주가 그 악기를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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