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와 있다 인간은 ‘A면 B다’의 상호작용을 통해 대상을 파악한다. 상호작용이 안 되면 대상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상호작용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암흑물질이 그렇다. 우주는 사방으로 균일하게 팽창하였다. 은하의 나선꼬리는 중심부로의 쏠림없이 회전한다. 중력의 작용에 의해 중심으로 쏠려야 하지 않나? 우주배경복사는 불균일해야 하지 않나? 그렇다면? 그 빈 자리를 채우는 미지수 X가 있는 거다. 그것은 암흑물질이다. 그 존재는 관측되지 않는다. 암흑물질은 빛을 내지도 않고 다른 것과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냥 통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암흑물질이 우리 몸 속을 홍수처럼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른다. 여기서 규칙..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완벽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다. 그러므로 암흑물질도 반응한다. 단지 인간이 그 반응을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쨌든 암흑물질이 무언가에 반응하기에 우주가 버티고 있는 거다. 누구도 암흑물질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있다.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세균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있다. 지구상에 국가가 처음 출현한건 언제였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가가 2개 생겼을 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국가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한 개일 때는 국가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다. 왜?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전쟁이 일어나야 비로소 국가의 존재를 깨닫는다. 국경이 그어져야 비로소 국가의 존재를 깨닫는다. 세금을 뜯겨야 비로소 국가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렇다면? 지구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 국경이 그어지기 전, 정부가 생겨나기 전, 헌법이 생겨나기 전에는 국가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명목상의 국가는 없어도 실제로 국가는 존재한다. 정부가 없어도, 국경이 없어도, 화폐가 없어도, 전쟁이 없어도, 여권과 비자가 없어도 국가는 원래 있다. 물론 그것을 두고 구태여 ‘국가’라는 호칭을 붙일 필요는 없다. 공동체라고 말해도 된다. 여기서 규칙 .. 국가 단위의 문제가 존재하면 국가가 있는 거다. 유형의 정부는 없어도 국가 단위의 문제는 분명히 있고, 그것이 있으면 국가는 있는 거다. 독립군이 단 한 명 밖에 없다면 그것을 두고 군대라고 이름붙일 수 없겠지만 그래도 독립군은 있다. 그 사람은 사병이면서 장군이다. 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한다. 자신과 레벨이 같을 때만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자기보다 레벨이 높은 것과는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은 3차원까지 인식할 수 있다. 추상을 순수하게 추상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질로 설명해도 인간은 입자로 받아들인다. 왜?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입자에 머무르지도 못한다. 금방 힘과 운동으로 전개하고 만다. 이명박에게 소통을 말하면 곧 알바를 풀어 여론조작을 한다. 그게 이명박식 소통이다. ◎ 진정한 소통 –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 이명박 소통 – 그것을 어떻게 홍보하는가? 진정한 소통은 따로 있다. 그것은 포지션 분담이다. 국민이 결정하고 대통령이 집행하는 것이 바른 소통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잘못 알고 있다. 국민과의 대화를 소통이라고 여긴다. 그거 소통 아니다. ◎ 질의 소통 – 국민은 결정하고 대통령은 집행한다. ◎ 입자의 소통 – 국민과 대화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 ◎ 힘과 운동의 소통 – 대통령이 결정하고 언론으로 홍보한다. 이명박에게 소통부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소통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소통은 불가능하다. 대화가 안 된다. 말이 안 통한다. 소통은 프로세스다. 신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프로세스는 앞으로 간다는 뜻이다. 현재 진행하는 거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건이다. 결국 신이 있느냐의 문제는 신 단위의, 그 레벨의, 그 차원에서의 사건의 진행이 있느냐다. 우리 우주를 하드웨어로 보고 그 이전단계,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있느냐다. 그것이 있다 해도 그것이 인간이 기대하는 그런 형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수염이 길고 머리가 흰, 진흙반죽을 좋아하는 괴상한 취미의 남자는 아닐 수 있다. 고추도 있을까? 그딴거 생각할 필요 없다. 남대문시장은 상설시장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거래가 반복되고 있다. 누구나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단 1회의 거래로 끝난다면? 천둥과 벼락이 치고 비가 내린다면 사전에 비가 올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며 그 지점에서 시장은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남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만났을 때 마음이 반응했다면 시장은 성립한 거다. 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완전성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물과 구분하는 것은 한 명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한 명의 사람이라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없다. 인간은 인류역사 1만년 전체, 지구 생명과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에서이다. 구조론의 개념을 불교나 기독교나 음양설 혹은 오행설과 같은 기존의 만들어진 논리체계에 덧씌우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반드시 왜곡되고 만다. 문제는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메커니즘이다. 구조론은 메커니즘이다. 그 메커니즘은 통째로 받아가야 하는 것이다. 질에서 입자를 분리하면 입자는 죽고 만다. 구조론의 몇몇 개념을 빼서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구조론을 통해서 기존의 기독교나 불교나 음양설이나 오행설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근본 메커니즘으로 보는 시선이 없으면 곤란하다. 구한말 동양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전체적인 근대의 메커니즘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대포 만드는 기술이라든가 몇몇 쓸모있는 잔기술만 빼가려고 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강희제가 독일 사신 앞에서 시계 정도는 중국도 만들 수 있지 하고 큰소리쳤던 것과 같다. 체계적이지 않은 기능적인 접근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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