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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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6540 vote 0 2011.07.09 (23:34:02)


 

풍산개와 말무사

시대와의 공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풍산개를 보고 세르지오 레오네의 걸작 ‘황야의 무법자’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건 좀 실패다. 그건 마치 황야의 무법자를 보고도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떠올리지 못한 것과 같은 대실패.

 

이건 뭐 눈 감고 본 거다. ‘그럴거면 영화 왜 보냐?’다. 재미로 본다는 사람은 이 글을 읽을 필요없다. 재미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면 말이다. (하기사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런거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없음.)

 

그렇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대화가 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다. 대화가 되지 않는 이유는 대화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 되려면 평소에 대화할 거리들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자기 내부에 세팅해 두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하는 것이다. 통해야 통한다. 나는 묻는다. 당신은 제법 대화가 되는 사람인가? 당신은 제법 통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시청앞 광장의 가스통 할아버지처럼 꽉 막힌 사람인가?

 

통한다는 것은 뭐 지식이 많아서 아는체 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소리를 내는 악기처럼 시대정신과 소통하는 미학적 센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공진 때문에 테크노마트가 흔들렸다는 설도 있는데 '시대와의 공진'을 할 수 있느냐다. 아니면 이문열처럼 스스로 ‘시대의 기수열외’가 되느냐다.(사람이 이문열을 버린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문열을 용도폐기 했을 뿐.)

 

통해야 한다. 무려 ‘시대와의 공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다. 그래야 세상 앞에서 할 말이 있어주는 거다.

 

열흘 전에 쓴 ‘김기덕-예술이란 무엇인가?’ 편을 참고해도 좋다. 말한 양주>도교>죽림칠현>남조문화>선종불교>우끼요에>인상주의>현대미학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 한 줄에 꿰어진다는 거다. 그렇게 시대는 통했다.

 

현대의 그림과 패션과 디자인과 건축들에서, 그 현대적인 삶의 양식들에서 죽림칠현의 흔적을 찾고, 남조문화의 흔적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다 있다. 육조 혜능도 있고 원효성사도 있다.

 

보면 보인다. 왜? 그건 통하는 거니까. 그렇다. 예술은 예술끼리 통한다. 예술이 예술과 통하므로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서로 통하는 것이다. ‘스타벅스는 스타벅스고 달마는 달마’고.. 이런 소리 하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그 안에 다 있는데 말이다. 스타 벅스 안에 달마가 있다. 물론 눈 감고 보면 보이지 않는다. 눈을 떠라는 말이다.

 

통하지 않으면? 막힌다. 막힌 사람과의 대화시도는 명박산성처럼 허무한 거다. 그것은 불필요. 우리 통하자는 거다.

 

뭐 뻔한 거다. 1안에 2넣기 구조론 공식. 한 인물에 두가지 성격을 넣는 방법. 그렇게 계 내부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 선 굵게 가기. 그것은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고수와 하수의 대결구도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선과 악은 나누어져서 서로 만나지 않는다.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수의 세계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선한 인물인지 악당인지 헷갈린다. 속편 ‘The Good, The Bad & The Ugly’에서는 아주 황금을 자루째로 털어간다. 물론 양심은 있어서 ‘The Ugly’에게도 조금 남겨주고 가긴 하지만.

 

예컨대 이런 거다. 서부시대 희대의 무법자 ‘빌리 더 키드’는 술집에서 ‘빌리 더 키드’를 만나면 단박에 해치워 버리겠다는 남자를 만났다. 빌리 더 키드는 그 남자의 상아로 만든 권총 손잡이가 참 멋있다며 권총을 만져보자고 한다. 당시 건맨들은 오발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6발들이 탄창에 5발을 넣고 다녔다. 빌리 더 키드는 탄창을 돌려 빈 구멍에 맞추어놓고 권총을 돌려주면서 ‘사실은 내가 빌리 더 키드인데?’ 하고 약을 올렸다. 둘은 동시에 총을 뽑았고 그 남자의 총은 공이가 빈 구멍을 때려 발사되지 않았다. 이건 뭐 사기다.

 

정통 서부영화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속임수다. 비열한 짓이다. 그러나 마카로니 웨스턴은 주인공이 계속 악당을 속인다. 주인공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위 빌리 더 키드 이야기는 실화임) 주인공의 직업이 현상범을 잡아 현상금을 받은 다음 몰래 도로 풀어주고 다른 마을로 가서 다시 잡고 하는 짓이니.

 

풍산개의 주인공은 상당한 고수다. 아주 상대를 가지고 논다. 싸워서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이기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기는 상황을 설계해 놓고 싸운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로호가와 박스터가를 싸움붙여 놓고 아주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 주인공이 애초에 판을 설계해 놓고 있었던 거다. 빌리 더 키드가 상대방의 총구멍을 비워놓고 대결하였듯이.

 

로호가와 박스터가라는 두 갱집단이 대결하고 있는 산 미구엘 마을에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뛰어든다. 얼굴 찌푸리고 등장하는게 딱 봐도 흉악하게 생겼다. 그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산 미구엘 마을에 오자마자 네 명을 쏴죽여 버린다. 주인공이 서슴없이 살인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충격을 받는다. 그렇다. 바야흐로 서부영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통 서부영화와 다른 마카로니 웨스턴이다.

 

황야의 무법자가 등장한 이후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은 수천 편이 제작되었으며 대부분 저예산으로 짧은 기간에 뚝딱 만들어졌고 크게 흥행했다. 여기에는 공식이 있다. 공식이 있고 공식을 베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저예산으로 쏟아진 것이다.

 

뻔한 거다. 한국이 미일과 중러라는 두 깡패들 사이에 끼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과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중심국가 전략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교묘한 ‘판 짜놓고 갖고놀기’ 술책과 같은 것이다. 원래 고수들은 다 그렇게 한다. 몰랐나?

 

풍산개의 여러 설정이 말도 안 된다고 입에 거품 무는 깡통들 있다. 그 사람들에게 그럼 황야의 무법자는 도무지 말이 되는 설정인가 하고 반문하고 싶다. 영화 볼 자격도 없는 멍청이들이라 하겠다.

 

김기덕 감독이 황야의 무법자를 보고 풍산개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없다. 고수들 끼리는 본능적으로 통한다. 그냥 연결된다. 왜? 고수들은 항상 멍청한 하수들끼리 박터지게 싸우게 만들어 놓고 룰루랄라 휘파람 불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서부영화에는 휘파람이 등장하는가? 고수이기 때문이다.

 

구조가 그렇다. 구조는 대칭의 축이 대칭의 양 날개를 동시에 통제하는 거다. 동서고금의 고수들은 머리에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짝패가 아무리 액션을 열심히 해도 그건 하수들끼리의 노가다 삽질이다. 무의미한 동작의 반복이다. 고수라면 헛심을 쓰지 말아야 한다. 한 방으로 끝내야지 두 번 이상 주먹질을 한다면 실패다.

 

주윤발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시니컬하다. 그는 동작을 최소화 한다. 와호장룡에서는 뚱뚱해져서 어쩔 수 없이 그렇지만 말이다. 왜 주윤발은 동작을 최소화 하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담배도 못 피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제에 시거를 입에서 떼지 않기 때문에 주윤발은 성냥개비라도 입에 물고 있는 것이다. 성냥개비를 입에 물었으므로 말을 할 수 없다.

 

고수라면 당연히 시니컬한 인물이어야 하며 입에 경멸하는 듯한 가벼운 조소를 띠고 있어야 하며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풍산개의 윤계상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이름도 없으면 더욱 좋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숫제 ‘이름이 없는 자’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풍산개의 주인공 풍산 역시 이름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이다.

 

80년대 아시아 시장을 주름잡은 홍콩영화도 대부분 저예산으로 찍은 것이다. 역시 공식이 있다. 한국영화가 대부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는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공식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해성 감독의 무적자가 영웅본색을 베끼고,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이 속 황야의 무법자를 베꼈지만 저예산의 공식은 베끼지 못했다.

 

왜? 영화의 미학을 베끼지 못했기 때문에 저예산의 공식을 베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세르지오 레오네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남발하는지 김지운 감독이 이해할 수준은 못 되는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고수들끼리는 말을 안 해도 통한다는 거다. 그리고 당연히 통해야 한다는 거다. 늘 하던 이야기지만 고행석 화백의 구영탄 캐릭터도 그렇다. 구영탄 역시 과묵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도 뒷짐지고 느긋하게 양반걸음에 졸린 눈이다. 속세 일에 무관심한 고수의 경지, 달관한 경지는 이렇다는 식이다.

 

다음에 연재되는 허영만 화백의 말무사도 그렇다. 자무카는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말을 하기는 하는데 복화술을 쓴다. 구로자와 아키라가 그러하고 세르지오 레오네가 그러하듯이 독자를 애타게 하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자무카 역시 노가다 삽질을 최소화 한다. ‘13익의 전투’에서 자무카는 다만 손바닥 두 개를 까딱까딱 움직여 전투를 끝냈다. 그 사이에 징기스칸은 이산에서 저산까지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고수는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며 손만 까딱까딱 하는데 하수는 넓은 몽골 초원을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삽질한다는 거다.

 

세 인물이 대결하는 구도인데 토오릴 칸은 잔머리나 굴리며 뒷통수 치는 하수, 자무카는 상대를 가지고 노는 뛰어난 고수, 주인공 징기스칸은 본래 하수지만 끝없이 배우면서 점차 성장하는 인물로 세팅되어 있다. ‘The Good, The Bad & The Ugly’를 연상시킨다.

 

이건 고수의 관점이다. 그렇다. 허영만은 고수다. 고행석도 고수다. 세르지오 레오네도 고수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구라자와 아키라를 베꼈지만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베꼈다. 그러나 한국의 감독들은 어떤가? 베꼈지만 미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영화인데 예산만 잔뜩 들어갔다. 저예산으로 찍어야 진짜다. 왜? 미학을 살리면 당연히 클로즈업이 남발되고 저예산이 된다. 결정적인 상황에 시간을 멈추고 뜸을 들이기 때문이다.

 

구영탄은 주로 남의 집에 얹혀 산다. 김기덕의 빈집이 남의 집에 들어가듯이 말이다. 구조의 법칙 - 하나의 공간에 둘을 집어넣어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다. 황야의 무법자도 역시 남의 집에 얹혀 산다. 불청객 구영탄처럼 어디선가 나타난 알쏭달쏭한 인물이다. 누구도 주인공을 산 미구엘로 초청하지 않았다.

 

풍산개에서 윤계상은 3시간 만에 북한을 다녀오는 걸로 되어 있다. 세 시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도 풍산은 철조망을 느긋하게 자르고 휴전선을 여유있게 넘는다. 긴장된 표정으로 바짝 엎드려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는 않는다. 위급한 순간에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서두르기는 커녕 ‘저러다 3시간을 넘어 10시간 걸리겠다’ 싶은 느긋한 동작으로 벨을 눌러서 국군을 불러 버린다. 왜? 폼 잡느라고. 미학을 보여주려면 폼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주윤발은 바바리코트를 입는다. 게다가 선글라스까지. 최악이다. 이건 뭐 총잡이에게는 아주 불편한 옷차림이다. 이래서야 총인들 제대로 쏠 수 있겠는가? 풍산개 보고 말도 안 된다며 입에 거품 무는 멍청이들도 주윤발 보고 말도 안된다고 거품 물지는 않는다. 이거 신기하다. 왜 주윤발은 불편한 바바리코트를 입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불편한 판초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총잡이가 판초를 입고 있어설랑 총이나 제때 꺼내겠는가 말이다.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거다.

 

그렇다면 왜 총질하기 불편한 판초를 입었을까? 정답 – 폼 잡느라고. 영화는 미학을 파는 것이다. 그게 진짜다. 미학의 기본은 심플함이므로 옷은 판초여야 한다. 풍산 역시 강을 헤엄쳐 건너고 진흙탕을 구르면서도 옷은 깨끗하다. 왜? 중요한건 미학이니까.

 

풍산과 인옥의 격정적인 키스도 그렇다. 진정한 키스가 어떤 건지 보여주겠다는 식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상관없이 ‘인류역사상 최고의 키스라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 정답을 보여주겠어’ 하는 관점으로 그린 거다.

 

뭐 이런데 관심없는 먹통들 하고는 대화할 필요 없다. 어차피 대화가 되지도 않지만. 그렇다. 아는 사람은 풍산개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고 주윤발을 본다. 모르는 사람은 못 본다. 그런데 말이다. 보지도 못하면서 영화를 왜 볼까?

 

허영만 화백의 말무사에서 숨은 황야의 무법자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허영만 화백이 황야의 무법자를 본따서, 혹은 풍산개를 개봉하기도 전에 미리 보고, 자무카의 입을 닫아버린 것은 아니다. 고수들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다. 그게 통하는 거다. 통해야 한다. 시대와의 공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무카가 아주 예쁜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귀공자 타입에 멋쟁이로 나오는 것은 ‘좋은 놈 정우성’이 쏘기 불편한 장총을 쓰는 것과 같다. 근거리에서 총격전을 하는데 장총이 왜 필요한가 말이다. 이유는 딱 하나다. 폼 잡으려고. 실전이라면 장총 따위는 버려야 한다. 

 

당신이 만약 정상에 있다면 어떤 포즈를 취하겠는가? 정상의 경지는 서로 통한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처음 오르는 사람이 좌우를 살펴 눈치를 보면서 허둥지둥 뛰어올랐겠는가 아니면 느긋하게 마지막 한 발을 뗐겠는가?

 

정상에서는 모두 같을 수 밖에 없으며 고로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학이다.



 

 6758226.jpg

 

빌리 더 키드.. 왼손잡이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오른손잡이였다고.(좌우가 바뀐 옛 사진을 바로잡음.)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11.07.10 (10:31:59)

암벽등반을 할 때 좀 하는 사람은 하얀바지를 입곤합니다.

고수는 바지에 흙뭍일이 없기때문이지요.

똑같은 코스를 올라도 고수와 하수가 사용하는 근육과 에너지는 완전히 다르니까.

하수는 뭘해도 삽질단계를 거쳐야하니 헛힘을 쓸수밖에.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1.07.10 (14:37:28)

예전에 수요예술무대에서 임재범이 주머니에 손 넣고 노래부를 때, 고수라는 느낌을 받았소.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같은...

[레벨:3]스타더스트

2011.07.10 (22:15:22)

예술가는 예술가끼리

정치가는 정치가끼리

지식인은 지식인끼리

 

고수는 고수를 상대해야

 

대중은, 관객은 판단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합성품 시대의  의사결정행위자(공짜 관객은 빼고)

 

(대중)예술가는 관객을 탓하지 말고

정치가는 유권자를 탓하지 말고

지식인은 대중을 탓하지 말고

 

이게 안되면 민주주의 싫다 될 수 있겠다

 

알지만 이거 지키는 사람 10에 하나 있을까 말까..

 

어떻게 하면 의사결정행위자들을 자기편 만들것인가? 어떻게 하면 소통에

성공할 수 있나? 그림을 펼쳐 보일 것. 무대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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