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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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7385 vote 0 2020.05.31 (18:19:13)

    구조주의 교육론

  
    구조론으로의 초대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모양 이꼴인 것은 철학의 낙후 때문이다. 온갖 주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전 방위로 교착되어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다. 20세기에 철학은 실패했다. 70억 숫자를 감당하기에는 허약하다. 그리고 이제 21세기다. 마땅히 역사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철학가의 견해라는 것들이 한낱 단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단어 하나 가지고 어쩌려고? 인류의 언어체계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깨우침이 필자가 구조론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문제의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진정한 답은 어떤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전달하는 도구인 언어의 개혁에 있다. 좋은 것을 봤더라도 그것을 주워담을 자루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는 무엇에 진리를 담아 전달할 것인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수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인류의 진보는 거의 수학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한계는 수학의 한계와 맞물려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수학의 자궁은 무엇인가?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대상이 아닌 관계를 본다. 수학은 자로 길이를 재서 사물의 크기를 계측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나누어져 있다. 구조는 관측자와 관측대상 사이의 관계를 본다. 구조론의 세계에서 관측자와 관측대상은 에너지를 타고 가는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된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에 대하여 말하지만 답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다. 이것과 저것에 대하면 대칭되고 대칭되면 틀렸다. 답은 이곳에 없고 저곳에도 없다. 진보에 없고 보수에 없다. 일원에 없고 이원에 없다. 합리에 없고 경험에 없다. 진화에 없고 창조에 없다. 원인에 없고 결과에 없다. 인간에 의해 지목되어 가리켜지는 것에는 답이 없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풍선효과와 같다. 이쪽에서 사라진 것은 저쪽으로 옮겨가 있다. 답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다. 그것이 구조다.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 과정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달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분자의 화학적 성질은 원자와 전자의 간격에 있는 것이다. 성질을 결정하는 간격은 대상에 없고 사이에 있다. 돌멩이의 성질을 결정하는 무게는 지구와 돌멩이 사이에 있다. 그것이 중력이다. 사건 안에서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으므로 관계는 변한다. 답은 그 변화의 방향과 순서에 있다. 그것을 지시하는 언어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어떤 대상 내부에 고착되어 있는 답을 찾으려고 하면 양파껍질을 까는 실패를 저지르게 된다.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남는 것이 없다. 틀렸다. 껍질들의 방향과 순서가 있다. 구조는 대칭된 둘 사이의 방향과 순서다. 여기서 상대성의 순환논리는 절대성의 일방향성으로 도약하고 진정한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둘이 맞서는 상대성에서 셋이 엮이는 절대성으로 올라서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과 그 내막을 전달할 언어가 필요하다.


    깨달아야 한다. 인간에게 관측되는 대상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측하는 주체인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이 비뚤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인간의 언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비뚤어진 관점을 바로잡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높은 수준의 언어로 도약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철학자들은 아는척 하며 본질과 현상, 형식과 내용, 원인과 결과, 가능과 현실,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 한 마디씩 던지고 있지만 바보다. 왜 사이를 보지 않는가? 이들은 대칭되어 있다. 왜 대칭을 이루지? 왜 이 부분을 탐색하지 않을까? 왜 본질과 현상 사이, 형식과 내용 사이, 원인과 결과 사이, 가능과 현실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를 말하지 않는가? 왜 그것이 하나의 사건에 속한 머리와 꼬리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사건 안에서 둘은 한 몸이고 에너지의 차이가 방향성을 결정한다는 진실 말이다. 에너지를 통제할 때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되는 법이다. 어떤 대칭되어 상대성을 이루는 둘에는 반드시 둘을 통일하는 사건 하나가 엮여서 절대성을 이루고 있다. 그 사건의 존재를 포착하는가이다. 어떤 것이 움직이면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둘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떤 둘이 대칭되어 있다면 반드시 둘을 통일하는 것이 있다. 둘이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그 하나를 찾았을 때 그것은 통제된다. 그것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이다. 하나의 사건을 끌고 가는 에너지의 방향과 순서가 답이다. 방향과 순서를 적절히 바꿔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철학자들은 대립되는 둘 중에서 하나를 지지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면서 열을 올리지만 어리석다. 둘은 하나이므로 교통정리가 중요하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다. 빛 입자는 있어도 그림자 입자는 없다. 흑과 백의 대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빛이 스크린에 투영되면서 밝기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근본을 반영하는 언어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인류가 언어를 얻으면서 동물의 한계를 벗어났고 수학언어를 얻어 근대문명을 일으켰다면 이제 사건을 해명하고 에너지를 디자인하는 구조언어로 갈아타야 한다. 사물의 한계에서 사건의 지평으로 도약해야 한다. 이항대립적 사고의 교착상태에 따른 난맥상을 극복하고 사건과 에너지와 관계의 일원성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대가 여기까지 납득했다면 다음 페이지로 초대한다. 납득하지 못했다면 얼른 꺼지기 바란다.



    구조론 제자의 의미


    구조론의 교육법은 다르다. 진정한 교육은 지식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론의 방법은 커다란 사건에 올라타는 것이다. 거센 에너지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새는 바람을 타고 가고, 물고기는 물결을 타고 가고, 인간은 문명을 타고 간다. 자신을 흐르는 강물 속으로 빠뜨려야 한다. 그리고 물살의 흐름에 적응해야 한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우주가 격발된 것이다. 37억 년 전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탄생했다. 지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1만5천 년 전에 인류문명의 격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또 다른 시작된다. 위대한 도약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70억 인류가 지식을 공유하며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호흡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배가 항구를 떠나면 돌이킬 수 없다. 부둣가에서 술 먹다가 선원으로 잡혀가는 일은 대항해시대에 흔했다. 필름이 끊겼는데 깨어나보면 몸은 갑판 위에 널브러져 있고 항구는 저 멀리 있다. 별수 없이 그 항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대사건을 일으켜야 하고 그 사건의 에너지 흐름에 풍덩 빠져야 한다. 누구의 편에 서느냐가 중요하다. 신의 편,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사회의 편에 서야 한다. 


    지식은 공유되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다. 언어가 다르면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가는 방향이 다르면 소통할 수 없다. 한 방향으로 나란히 가면서 언어를 일치시켜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사건 속에서 나란히 가며 동료가 되어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고, 에너지가 없는 이유는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고,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의 방해자 때문이다. 지리산 정상에 올라야 덕유산 정상이 보인다. 뾰족한 위치에 올라야 방해자가 제거된다.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방해받는다. 많은 사건이 있다. 큰 길과 작은 길이 있다. 작은 길에 속해 있으므로 큰길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력으로 탈출해야 한다.


    합리냐, 실용이냐? 실용주의자는 그 실용의 이익에 의해 방해받는다.
    절대냐, 상대냐? 상대주의자는 그 상대성에 의해 상대적으로 방해받는다.
    일원이냐, 다원이냐? 다원론자는 그 다원성에 의해 다양하게 방해받는다.
    진보냐, 보수냐? 보수주의자는 가진 것을 보호하고 고수하다가 방해받는다.
    공자의 제자냐, 노자의 추종자냐? 노자의 추종자는 그 처세술로 방해받는다.
    이성이냐, 본능이냐? 본능을 따르면 본능적인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 방해받는다.
    대승이냐, 소승이냐? 소승은 그 작은 것들에의 집착에 의해 방해받는다.
    문명인이냐, 부족민이냐? 부족민은 그 부족의 관습에 의해 방해받는다.


    이들은 모두 연동되어 있으므로 하나를 잘 찍으면 나머지는 줄줄이 사탕으로 따라온다. 핵심은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딱 보면 안다. 전자는 방해자가 없고 후자는 방해자가 많다. 절대는 대를 끊으니 방해자가 없고 상대는 일일이 상대하려니 해결해야 할 상대가 너무 많다. 지식을 공유함에 있어서 방해자가 없는 길을 선택하라.


    집단과의 의리를 지켜 자신을 희생하는 지사는 거침없이 의사결정할 수 있고 내 몫부터 챙기는 얌체는 그 몫을 셈하느라 방해받는다. 물의 흐름이 방해받으면 그 물은 흐를 수 없으니 고인 물이 되어 썩어 간다. 옳은 길과 그른 길이 있다. 옳은 길은 방해받지 않으므로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만나면 호르몬이 바뀐다. 호르몬이 바뀌면 에너지가 끓어오르고 그 에너지의 흐름에 풍덩 빠지면 인생이 바뀐다. 그른 길은 작은 길이며 남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며 그러므로 앞에 가는 사람에 의해 방해받는다. 의사결정할 수 없다. 방해받지 않는 길로 나와야 큰일을 벌이고 동료와 함께 할 수 있다. 지식의 주입은 나중의 일이고 의사결정구조의 건설이 먼저다. 


    지식은 공유하면 된다. 언어를 통일하고 각자가 알고 있는 지식을 테이블 위로 꺼내놓으면 된다. 본능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괴력난신으로부터, 부족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신과 일대일로 만날 때 구조론의 제자가 될 수 있고 동료와 의리를 지킬 수 있다. 좋은 평판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인류의 중심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류문명의 큰길로 나와서 방해받지 않고 거침없이 질주할 때 그것은 가능하다.




    구조주의 교육 시스템의 건설


    구조론이 언제 세상에 알려질 것인가 하는 물음에 40년이 걸린다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그새 20년이 지났다. 40년이 걸리는 이유는 제자의 제자까지 가는데 대략 4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시조 소크라테스에서 2대 플라톤과 3대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가는 흐름이 그렇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맹자까지 가는 흐름이 그러하다. 소크라테스는 방향을 제시했고 플라톤은 체계를 세웠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대입했다. 공자는 방향을 제시했고 자사는 천 개념을 확립했고 맹자는 사람과 연결했다. 비로소 대중이 도를 실천하게 되었다.


    바른말을 하더라도 군중은 '그래서 어쩌라고?' 하고 반문하기 마련이다. 떠먹여 줘야 한다. 방향제시만으로 부족하고 도로와 자동차까지 제공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지도를 만들었고, 플라톤과 자사가 도로를 닦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와 맹자는 자동차를 제작했다. 대승의 큰 배가 만들어져야 사람들이 각자 역할을 얻어 떼로 사건에 가담하는 법이다. 3대를 가야 도구가 건설된다. 당대에는 집단 내부에서 경쟁자의 편견과 질시 때문에 새로운 사상이 확립되기 어렵다.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람에게 굴복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어떤 목수에게 굴복하기 어렵고, 예수의 제자라는 어떤 어부에게 굴복하기도 어렵지만 이방인 바울은 냄새걱정이 없다. 이방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유대인 냄새도 나지 않고 하층계급 냄새도 나지 않는다. 닫힌계 바깥으로 나가면 신대륙에 진출한 개척자처럼 방해받지 않는다. 외부로 연결해서 주관의 세계에서 객관의 세계로 도약하는 공식이다. 내부에서는 누군가 뜨면 누군가 그만큼 피해를 본다. 그러므로 반드시 방해자가 있다.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한 명이 반대해도 올스톱 된다. 열린계는 그러한 방해자가 없다. 도구를 써서 직접 접촉하지 않고 객관화 되어야 열린계가 된다.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야 객관화된다. 내부지향이냐 외부지향이냐 하는 방향성의 문제다. 내부는 대칭원리가 작동하므로 방해자에게 가로막힌다. 마호멧이 메카에서 막혀서 메디나로 탈출하는 원리다. 석가의 사상이 인도를 탈출했을 때 비로소 대승의 큰 배가 닻을 올렸던 것과 같다. 방해자가 없는 외부지향 모드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구조가 건설되는 절차다.


    구조론은 세상이 물질이 아닌 구조로 되어 있다는 존재론이며 거기에 맞는 세계관과 삶의 양식을 공유하는 사람이 구조론의 제자다. 이제는 구조주의 사상에 맞는 삶을 실천해 보일 때다. 그것은 인류가 힘을 합쳐 집단 지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구조론은 도덕가를 바라지 않는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경쟁하며 상호작용하는 사람을 구한다.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대화가 되는 사람을 구한다. 최고 레벨의 사람과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류호의 브릿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인류의 의사결정 중심에 쳐들어가는 사람이라야 진짜다.


    서양이 발전한 것은 지식 때문이 아니고 천재 때문도 아니고 저작권과 논문제도와 학회 덕분이다. 지식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다. 특허권은 지식을 공유하는 대신 이권을 챙기는 교환제도다. 학회와 논문은 지식을 공유하고 평가하는 제도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남의 생각을 어깨너머로 봤을 때 얻어지곤 한다. 이론을 다른 분야에 적용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알맹이를 챙기곤 한다. 그것을 허용할 것인가다. 내가 어렵게 구한 지식을 남들이 날로 해 먹는 사태를 용납할 것인가다. 진정한 교육은 그러한 지식의 공유그룹을 세팅하는 것이다. 


    일본 애니의 전성기를 연 만화가들도 한 건물에 모여 살며 서로 베꼈다. 만화잡지 학동사가 주선하여 데즈카 오사무를 필두로 토키와 장이라는 건물에 모여 살며 서로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다. 그럴 때 막강해진다. 네이버 웹툰도 작가들이 서로 친한 척할 때가 전성기였다. 지금은 엄청난 수익의 차이로 인해 소원해졌을 것이다. 아이디어가 신선하지 않더라. 아프리카 팀은 축구를 해도 부족이 다르면 패스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교육받지 못하면 내부에서 서로 견제하다가 망하고 교육되면 밖에서 서로 훔치며 성장한다. 올바른 지식의 공유시스템을 건설하려면 방해자를 쳐내는 것이 중요하다. 


    남의 지식은 훔치고 자기 지식은 감추는 자와는 대화할 이유가 없다. 자기 생각은 절대 밝히지 않으면서 남의 생각을 물어보고 대답하면 트집을 잡아 반격하는 기술을 구사는 얌체는 퇴출이 맞다. 지식을 공유하려면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가는 일원론이어야 하고 보편주의와 절대주의와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와 진보주의라야 한다. 이원론이니 다원론이니 실용주의니 하는 방해자가 등장하면 지식의 공유가 불가능이다. 개인의 영역인 특수성과 상대주의와 경험주의를 주장하면 공유는 무리다. 


    상대주의는 당연히 상대의 뒤통수를 친다. 집단의 머리가 아닌 손발이 되려고 하는 보수꼴통과는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좋은 지식도 바깥에서 객관화 시키는 도구가 건설되기 전에는 현장에서 먹히지 않는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남의 지식을 현장에 적용하여 해먹을 궁리만 하는 자가 보수꼴통들이다. 음모론의 추종자는 튀려고 하므로 당연히 방해자다. 종교의 광신도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기본적인 대화조차 안 된다. 개소리하는 환빠는 닥쳐야 한다. 초능력, 귀신, UFO, 마법, 심령술, 점집 따위 괴력난신에 현혹되는 바보들과는 깊은 대화를 할 수 없다. 일단 공유가 안 된다. 공유가 안 되면 가짜다. 한의사가 진맥을 하는데 본인만 잘하고 제자를 양성하지 못하면 그게 가짜라는 증거다. 유튜브에 올려놓은 동영상만 보고 복제할 수 있어야 진짜다. 열 가지를 마구잡이로 투척하여 하나를 요행으로 맞추겠다는 자와는 일체의 대화를 삼가야 한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방해자를 쳐내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하나가 틀리면 전부 틀렸다고 보는 것이 구조론의 관점이다. 구조론은 구조와 관계와 사건과 에너지와 완전성으로 파악하는 일원론 사상이다. 합리주의, 절대주의, 보편주의, 진보주의, 지성주의, 강자의 철학을 지향하고 있다. 일원, 합리, 절대, 보편, 진보, 지성, 강자가 별게 아니고 지식을 공유하면서 방해자를 제거하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남의 아이디어에 끼워팔고 묻어가려 하므로 이원론이니 다원론이니 하는 가짜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남의 이론을 해 먹으려면 현장에 적용하면서 적당히 왜곡한다. 그러한 변개를 변명하는 논리가 이원론에 다원론에 상대주의다. 


    집단지성의 방해자는 일체 반지성주의다. 반사회적, 반문명적, 반철학적, 반문화적 태도에 따른 이원론, 다원주의, 실용주의, 경험주의, 유물론, 허무주의, 약자의 철학을 주장하는 자가 방해자다. 그들은 도구가 없다. 구조론은 바로 그 도구를 건설한다. 대승의 세계로 가려면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제자의 제자까지 흐름을 만들면 객관화된다. 사람에 숙이지 않고 진리에 가담한다는 기분이 든다. 지금은 본능적으로 팔짱 끼고 관망하며 '그래 니들이 재주부려 나를 납득시켜봐.' 하는 태도다. 호르몬이 방해하므로 그들은 절대 납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게 아니고 본능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조주빈, 부따, 갓갓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텔레그램을 도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드론 조종사가 사람을 죽인다. 마우스를 움직이고 자판을 쳐서 1만 킬로 밖의 전장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도구가 사람을 죽이므로 마음의 동요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도구가 들어가야 호르몬을 이기고 객관화된다. 남녀가 만나더라도 중매인을 끼워야 어색하지 않다. 모임에는 사회자나 진행자가 있어야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직접 접촉하면 안 된다. 반드시 변호사나 중재자를 대동해야 한다. 그것이 도구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차단하는 장치다. 쿨해지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구조론은 도구다. 무리가 함께 큰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가는 것이다. 모든 철학과 사상이 반드시 거치는 통과의례다. 어떤 사상이 이런 절차 없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면 보나마나 대중에게 아부하는 라즈니쉬 수법이 먹힌 것이다.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네 잘못이 아냐. 다 내려 놓아라. 노력하면 된다.' 대중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일회용으로 고통을 없애주는 아편과 같다.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대신 말해주는 수법이다. '니들이 원하는게 이런거 아냐? 노력타령, 사랑타령, 행복타령, 내려놓아라 타령, 비워라 타령. 무, 허, 공, 멸, 영, 기 따위 아무런 뜻도 없는 허무맹랑한 단어들 좋아하지 않아? 생각하기 싫어하는 자들에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주면 좋아한다. 우리 힘들어도 비겁해지지 말자.


    나는 제자의 제자까지 3대에 걸쳐 커다란 하나의 배를 건설하려 한다. 그것은 집단지성의 방해자를 제거하는 시스템이다.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 내부지향이 아니라 외부지향이라야 한다. 피아구분의 경계가 바깥에 있어야 한다. 모세와 무리는 가나안에 발을 딛지 못했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가나안에 입성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도 없다. 스탈린을 추종한 소련인들은 마르크스를 본 적이 없다. 모택동을 추종한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마르크스는 직접 힘이 작용하는 통제대상이다. 내부지향이기 때문이다. 내부에 대립각을 세우면 망한다. 피해자가 있고 그 피해자가 방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는 한 명이 발목을 잡아도 전부 쓰러지기 때문이다. 외부라면 그렇지 않다. 누가 발목을 잡으려고 하면 피하면 된다. 바다 건너 소련이나 중국에서 마르크스는 도구에 불과하다. 지불해야 할 대가는 없다. 피해자가 없다. 방해하지 않는다. 이론에 구애되지 않고 마음대로 변개하여 현장에 적용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든 맹자든 3대에 이르러 시조를 떠나 거기까지 전개하여 간 것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인생해커

2020.06.17 (18:01:07)

서양의 발전이유 세가지(저작권,논문제도,학회)가 

디지탈경제에서는 취약점,CVS,Opensource라고 보여집니다.

동양계 어떤 아저씨(해커출신, 현재 미대학 교수) 얼마전에 이쁜 도구하나 CISCO에 1.5조 현찰 받고 팔았던 기사 있습니다.


절대적인 일원의 합리성, 즉 진리에 의하여

이성적 진보로 대승을 지향해, 즉 이성을 따라

공자의 문명을 재발화 ,즉 문명을 수호할 제자의 길을 열어주신것에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20년을 더 기다리는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세계시민의 길을 가기전 아시아적 잠룡의 용트림으로서

하나의 책으로 묶는 작업도 의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야기 꾼을 섭외해서 "꽃들에게 희망을" 정도의 간단한 우화로 만드는작업)


특히 마음의 구조론은 언어의 장막을 제거하는게 가장 시급해 보입니다.

언어에 사로잡혀 현재에 복무하는 많은 제자들이 있다고 봅니다.


구조론에 의하여

구조론에 의하여

구조론세 의하여 웃는 세상을 기원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꾸우뻑




프로필 이미지 [레벨:2]인생해커

2020.06.18 (13:58:53)

헉 이미 대문과 마당정비를 다 해 놓으셨네요. ㅎㅎ  기쁜마음에 후원을 시작합니다. 꾸우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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