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도 백제와 신라를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써놨을까요?
광개토대왕비에는 속민, 신민, 구민 등 다양한 민이 등장합니다.
조공을 보내오면 속민, 사신을 보내 맹약을 하면 신민,
원래부터 고구려인은 구민인데 그 외에도 다양한 민이 있습니다.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가 관미성(오두산성)을 공격한 내용입니다.
오두산성을 점령하면 배를 타고 밀물 때 풍납토성까지 바로 들어갑니다.
당시에는 강의 수위가 깊었으므로 관미성을 돌파하면
밀물을 타고 순식간에 개로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즉 백제 관미성 공격을 이념적으로 정당화 하기 위해 왜를 끌어들인 것.
지배라는 것은 현대의 개념이고 당시는 의미가 다릅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략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니들 왜와 사신을 교환했지 하고 모함을 해서 침략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즉 고구려가 모함을 할 정도의 군사행동은 왜가 했을 수도 있는 거지요.
신라가 미사흔과 복호를 왜와 고구려에 보낸 것은 사실이고
이건 충분히 고구려가 신민이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당시는 봉건시대라서 백제의 직할지는 경기도 정도 면적이고
충청도는 마한을 통한 간접지배, 호남은 가야세력 땅입니다.
신라도 마찬가지로 직할지는 경상북도의 절반 정도. 나머지는 간접지배.
나중에 커진 것이고 당시는 신라가 작았습니다.
직할지.. 세금을 받음
간접지배.. 군대를 동원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인 이유는
밀물을 타고 수군이 바로 들어올 수 있는 한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은 바닷물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배로 갈 수 없는 거지요.
연천 호로고루성도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바닷물이 들어갔습니다.
곡예사가 긴 장대를 들고 있는 것과 밀레니엄 다리의 설계가 같다는 것을 모르는 빡대가리가 있남?
긴 장대가 긴 파동을 만들고 긴 파동은 곡예사가 신체의 균형을 맞추기 쉽게 돕는 것.
키가 큰 사람은 잘 넘어지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