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부 맞는 말과 허튼소리를 섞어놔서 짜증나게 해놨더군요.
오늘도 뭐 오마이뉴스에 황희정승 어쩌구 하며 무식이 철철 넘치는 소리 써놨던데
그넘은 도대체 오마이뉴스에 기사 씩이나 쓴다는 넘이
화폐가 없던 조선초기 관리는 요즘 국회의원처럼 후원금으로 산다는걸 모르는 넘이에요.
많이 나눠주는 넘이 청백리인데 나눠주려면 그 물품이 어디서 났겠어요?
기본상식이 없는 기사라서 반박하기도 어렵게 해놨어요.
그렇다고 황희가 대단한 청백리라는 말은 아니고.
저번에 집 이야기 있었는데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나
신라는 땅 파보면 다 나오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지금 논밭으로 되어 있는 곳 어디나 땅 파보면 기와조각과 건물터와 우물터가 나옵니다.
수백만평 규모의 발굴유적이 다 그대로 있기 때문에 정확한 것입니다.
신라시대 도로, 다리, 다 그대로 있고
관문성, 명활성, 선도성, 남산성, 남산토성, 도당토성, 고위성, 월성, 금성, 만월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계획규모가 다 그대로 있고
월성에서 도당성 남산토성, 남산성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식량창고까지 다 있습니다.
남산성은 몇 백미터마다 기와 건물지가 있습니다.
토기도 넘 많이 출토되어서 옥션에서 그릇 하나에 5천원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 신라밥그릇 열개쯤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박혀있는지 참.
남산에 있는 절터만 155개, 불상이 100개이상, 석탑이 80체 이상입니다.
평지에도 백미터마다 절터가 하나씩 있었고 지금 경주 최부자집도 알고보면 절터입니다.
절터를 세어보면 인구수나 도시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남산의 불상은 다 기와지붕이 있었습니다.
절집이나 살림집이나 거기서 거기죠. 규모가 다를 뿐.
우리동네만 절터가 열개 이상인데 조사해보면 더 될겁니다.
![z2_cp03181962000.jpg z2_cp03181962000.jpg](https://gujoron.com/xe/files/attach/images/130763/905/428/z2_cp03181962000.jpg)
신라집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온돌은 고구려때부터 있었는데 고려시대부터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옛날 목조건축은 지으면 500년 넘게 가는데 아직 옛날 집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옛날에는 마을 전체가 기와집으로만 이루어진 마을이 많았습니다.
경주 양동마을에 가보면 알 수 있죠.
대원군이 혼자 때려부순 서원이 몇개나 되겠습니까?
굉장히 많이 때려부쉈습니다.
그래도 아직 졸라리 고건축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고려시대 사찰도 무지하게 많았는데 조선시대 유림들이 있는대로 다 때려부쉈고.
제가 대한민국 곳곳을 한 두번 뒤지고 다녔겠어요?
![gc2_26_i4.jpg gc2_26_i4.jpg](https://gujoron.com/xe/files/attach/images/130763/905/428/gc2_26_i4.jpg)
하회마을은 기와집과 초가가 반반인데 이건 가난한 동네입니다.
하회마을 집은 일반손님에게 식사를 판매하니까 직접 들어가서 방에 누워보세요.
초가삼간이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30명이 모임해도 됩니다.
![3.JPG 3.JPG](https://gujoron.com/xe/files/attach/images/130763/905/428/3.JPG)
이렇게 보면 작아보이지만 그렇게 작은 집이 아닙니다.
원래 집은 개인이 짓는게 아니고 씨족촌 일가붙이들이 부역으로 짓기 때문에
동네사람이 다 모여서 그냥 공짜로 지어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허름한 집은 친척이 하나도 없다는 방증이지요.
혼자 지어도 한달만에 이 정도는 짓습니다.
직접 시골에 가서 지어보세요.
요즘 한옥 짓는 사이트 많으니까
한달 정도 대패질 배우면 혼자 자기집 뚝닥 짓습니다.
![g.JPG g.JPG](https://gujoron.com/xe/files/attach/images/130763/905/428/g.JPG)
이렇게 작은 집이라도 방 하나에 예닐곱명 들어가고 뒤에 툇마루와 부엌까지 20명이 복작거립니다.
집 작다고 우습게 보지 마세요. 안에 들어가보면 의외로 공간이 쏠쏠하게 있습니다.
![5.jpg 5.jpg](https://gujoron.com/xe/files/attach/images/130763/905/428/5.jpg)
다산초당.. 이게 원래 초가집인데 매년 지붕이기 싫어서 기와를 올려놨어요.
전형적인 선비의 초가삼간인데 작지가 않습니다.
![5.JPG 5.JPG](https://gujoron.com/xe/files/attach/images/130763/905/428/5.JPG)
난방이 안된다는둥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하게 장작 7개면 새벽까지 따뜻합니다.
요즘처럼 뭐 집에서 반팔로 지내나요?
뉴욕사람도 겨울에는 옷 잔뜩 껴입고 자는 겁니다.
한국처럼 홀딱벗고 자는 사람 없어요.
흥선대원군 운현궁 행랑채에 손님방 주르륵 있는데 직접 보세요.
밖에서 보면 작아보이는데 안에 들어가보면 의외로 널널합니다.
하인이 딱 장작 7개 넣어주면 아침까지 궁뎅이가 뜨겁습니다.
조선시대에 근검절약을 강조해서 경제가 피폐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밥은 많이 먹고 잘 살았습니다.
분명히 말하지요.
오막살이 초가집은 제가 혼자 지어도 한달만에 짓고
시골농가는 원래 친척이 모여서 부역으로 지어주는 것인데 금방 짓습니다.
기와집을 안 지은 것은 유세하면 찍혀서 수탈당하니까 일부러 안 지은 것입니다.
이건 결코 생산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짓기 넘 쉽다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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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였던 신재효가 돈이 없어서 초가집에 살았겠어요?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정 3품 통정대부 절충장군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가 이런 초가집에 살았습니다.
전국의 판소리꾼을 불러모아 날렸던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수만인데.
재난 맞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