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답을 알고 있지만 여백이 없어서 적지 않겠다.
한 자녀 정책 때문이라는둥, 연봉이 너무 많아서라는둥 하는 소리는 다 개소리다.
꽌시 때문에 혹은 부패 때문에 하는 것도 본질이 아니다.
. 1951년 12월, 축구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할 목적으로 텐진에서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열었으며, 이 대회에서 신(新) 중국[14]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30명(최종 29명)을 정식 선발했다. 이 대회에 참여한 중국 8개 지역팀 중 동북3성(만주) 연고의 동북팀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동북팀 주전 11명은 전원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중에는 이봉춘, 김룡호, 김병균, 최중석 등 연변 조선족 출신 선수가 4명 포함되어 있었다.
1953년 2월 전국청년축구선수권대회를 열어 젊은 선수들을 대거 발탁하여 새로 대표팀를 구성했으며, 여기에는 박만복, 김창길, 최호균, 최증석, 김인걸, 박증철 등 연변 조선족 선수 6명이 포함되었다.
당시 헝가리에 파견된 중국 국가 대표팀에는 7명의 조선족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5년 비기거나, 당시 전력이 급격히 강해졌던 북한에게 0:3으로 대패한 것은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1966년말 북한에게 또다시 패한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10연승을 한들 북한에게 한번 패하면 그것으로 도루묵이었다.
1966년 12월 6일 프놈펜에서 북한에 패한 이후 중국 국가대표팀은 또다시 5년간 국제무대에서 잠적하게 된다.
1974년 아시안 게임 첫 경기인 북한전(10월 2일)에서 0:2로 북한에게 패배하면서 18경기 무패 행진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게 A매치 3경기 연속 패배의 굴욕을 맛보았다.
1975년 북한과의 2차전에서 북한에 다시한번 0:2로 패하면서 축제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다.
1978년 12월에 방콕 아시안 게임 및 아시안컵 예선으로 한국과 3주 간격으로 2연전을 가졌지만 2경기에서 모두 패하며 공한증의 시작을 알렸다.
1. 중국인이 축구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홍콩은 여러 번 중국을 꺾은 적이 있다.
2. 중국은 처음부터 조선족 선수 및 동북지역 선수들에게 국대를 의지했다.
3. 북한에 3번 연속 깨지고 멘붕이 되었다.
4. 78년부터 북한 대신 한국이 중국 축구를 망쳐놓았다.
5. 중국 축구가 부진한 것은 공산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인이 찬물을 안 마시는 것과 관련이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