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2017.06.21.
[문학사의 풍경] 소월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病)
입력 : 2012-07-05 18:34
死의 유혹… 스승 김억에게 유서 “三水甲山 내 왜 왓노”
문학은 문자에 의한 언어적 집적물 이전에 인간학의 또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문학사는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자취이기도 하다. 그 자취는 풍문이나 이설로 떠돌게 마련이어서 결정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시시비비를 가릴 주체가 사라지고 없는 게 아쉽지만 바로 그렇기에 여전히 논쟁적이다.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아가는 실감의 처지에서 20세기 한국문학사의 논쟁적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한국현대시사의 터주 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의 사인(死因)은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살과 병사(病死)로 갈려 있다. 소월은 평북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자택에서 1934년 12월 24일 오전 숨을 거뒀다. 당시 언론들은 소월 사망소식을 앞다퉈 전한다.
“방현(方峴)-일찍이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여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든 재질이 비상 튼 청년 시인 소월 김정식씨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바 지난 24일 아침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여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193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3일 뒤인 12월 30일자로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돌연 별세’(조선중앙일보),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一期)로’(동아일보) 등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월의 오산학교 은사인 안서 김억(1895∼1950?)은 1935년 1월 22∼26일에 걸쳐 조선중앙일보에 ‘요절한 박행(薄倖)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언제든지 素月(소월)이의 생사에 對(대)하야 이야기하든 것을 생각하면 그의 夭折(요절)은 楮多病(저다병)의 그것이라기보다도 夭折(요절)을 意味(의미)하는 무슨 전조가 아니엇든가 하는 생각도 업지 아니하외다.”
이를 근거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1987년 ‘저다병’을 각기병(脚氣病)이라고 해석했다. ‘저다(楮多)’라는 병명이 일종의 수족병(手足病)을 일컫는 우리말 ‘저다’에서 왔으며 수족병이란 요샛말로 팔다리가 퉁퉁 붓는 일종의 각기병 증세로,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김억이 저다병을 거론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4년 후 다시 이렇게 썼다. “소월의 가냘핀 몸집이 水土(수토)쎄인 龜城(구성) 땅에 와서는 제법 몸이 나서 만년에는 뚱뚱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월이 가늘고 야위어야 할 사람이 뚱뚱해진 것은 뇌일혈을 부르려고 한 때문인 듯싶습니다. (중략) 소월의 묘는 구성 남시에 있는데 가까운 곽산 본 고향으로 옮겨온 뒤에 돌비라도 해 세운다고 미망인은 언젠가 서울 와서 쓸쓸히 이야기하고 갔읍니다.”(1939년 6월 ‘여성’ 39호)
소월의 사인을 둘러싼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핀 이는 소월의 3남 정호(1932∼2004)씨이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붙잡혀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로 석방된 뒤 국군으로 복무했던 그의 존재는 1981년 정부가 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과정에서 노출됐다.
그는 이후 진행된 강연회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버님 소월의 최후는 1934년 12월 23일 저녁때의 일이었는데 그날 저녁에도 집에 돌아오시어 주무시려 하다가 고단하게 잠에 취한 어머님의 입에 은단 같은 것을 넣어주는 것을 잠결에 귀찮은 듯 내뱉었다고 한다. 한참 주무시던 어머님이 잠결에 아버님의 몹시 괴로워하시는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잠이 깨어 아버님을 흔들어 보고 불러보았으나 숨소리가 이상해서 곧 불을 켜고 자세히 아버님의 주위를 살펴보니 무엇인가 밤톨만큼의 무슨 덩어리 하나가 아버님의 머리맡에 떨어져 있어 주워보니 항상 잡수시던 은단이 아니고 한 덩어리의 아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호씨는 소월 사망 당시 두 살이었으니 이 증언은 정호씨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던 만삭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소월의 아편음독설이 유포된다.
또 다른 가설은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 1966년 5월 10일∼7월 1일에 걸쳐 12회 연재된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가 재야서지학자 김종욱씨에 의해 발굴돼 2004년 ‘문학사상’에 전재되면서 불거졌다. 연재물은 ‘문학신문’ 김영희 기자가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과 그가 숨을 거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일대를 돌며 현지 취재한 내용이다. “1934년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하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단실은 의외의 변에 억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소월 서거 32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 탐방기를 끝으로 소월은 북한에서 “패배적 감상주의에 젖어 현실을 극복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사상적인 제약성을 가진 시인”으로 평가 절하된다. 이는 1967년 주체사상 강화기와 때를 같이한 것이다. 이와 관련, 1995년 귀순한 북한 작가 장모(54)씨가 북한의 소월 평가와 관련해 남긴 증언이 흥미롭다. “1967년 당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김소월은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저서와 함께 봉건유교사상으로 낙인찍혀 연구대상에서 아예 배제됐습니다. 그때 당 선전분야에서는 수정주의와 부르주아 사상과 함께 봉건 유교사상에 물든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장씨는 이어 “내가 북한 중앙방송 재직 시절 김소월의 조카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며 “이름은 김정품(당시 나이 53세쯤으로 추정)”이라고 밝혔다. 항렬을 따져볼 때 김소월과 같은 ‘廷(정)’자 항렬이어서 착오가 있는 듯하지만 증언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그 친구 고향이 정주 곽산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67년 소월이 숙청당했을 때 그의 묘소 앞의 시비는 ‘초당파’들에 의해 깨진 뒤 뽑혀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소월의 사인에 대해서도 자살이라고 못 박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소월은 ‘복어알 안주’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또 다른 단서는 편지이다. 소월은 1934년 가을, 김억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운다. “저는 술이나 한 35배 마신 후이면 말을 아니하면 말지 어쨋든 맘나는 양(樣)으로 하겟다 생각이옵니다. 자고이래로 중추명월을 일컬어왓사옵니다. 오늘밤 창밧게 달빗, 월색(月色), 옛날 소설 여자 다리난간에 기대여서서 흐득흐득 울며 사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슬프게도 울든 그 달빛 그 월색이 백서(白書)와 지지안케 밝사옵니다. 오늘이 열사훗날 저는 한 십년만에 선조의 무덤을 차저 명일 고향 곽산으로 뵈오려 가려 하옵니다.”
편지는 일종의 유서였다. 훗날 소월의 숙모 계희영은 당시 상황을 ‘소월 선집’(장문각·1970)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해마다 추석이 되어도 십년간 한번도 오지 않았던 소월이었는데, 이번에는 곽산을 찾아와서 일일이 뒷산에 다니며 무덤의 떼가 잘 자라는지 돌보았고 허술한 무덤은 잘 다듬어 떼를 입혔다. 이러한 소월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왜 저러고 다니지?’ 했을 뿐이었다. 소월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향에 와서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소월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결단을 내려둔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소월 슬하의 자식은 북한에 남은 3남 1녀 외에 1남 1녀가 더 있었지만 큰딸 구생(龜生)은 6·25 피란 중에 병사했고, 아들 정호씨도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최후를 아는 이 또한 남아 있지 않다.
◎ 소월은 누구
1902년 평북 구성 태생. 1915년 오산학교 입학. 1916년 구성군 평지면 출신 홍단실과 결혼. 1920년 ‘창조’ 5호에 시 발표. 1921년 배재고보 5학년 편입. 1923년 일본 도쿄상업대 입학.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이후 광산업 실패와 신문사 지국 경영 실패로 빈곤에 시달림. 1934년 사망. 대표 작품은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산유화’ 등. 1981년 금관 문화훈장 추서.
◇자문교수(가나다순)=유성호(한양대) 이상숙(가천대) 최동호(고려대·한국비평문학회장)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
국민당이 이런식으로 자한당 2중대로 굴림하면서 호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호남의 정서와 지금 문대통령의 행보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지지율이 증명하고 있다.
다음 총선이 아직 멀다고는 하지만 이딴식으로 호남민심에 어깃장을 놓으면 딱 호남 자민련 된다.
PK자민련에 호남자민련?
대한민국의 국운이 드디어 활화산 처럼 솟을 태세다.
국민당! 정신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