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렬
2016.01.23.
100점.
90점.
80점.. 깔맞춤, 결맞춤
80점. 뭔가 있어보임
70점.. 그림이라고 우기면 됨.
70점.. 표정이 살아있네.
70점.. 표정이 살아있네.
70점. 연출이지만 수직과 수평이 구조론적
70점.. 합성이지만 기특함.
60점.. 평범하지만 눈동자처럼 보여서 기운이 있음.
이상의 그림들은 아는 사람이 프린터로 출력해서 집에 걸어놔도 욕 안 먹을 사진입니다. 현대적이라는 거죠.
다른 사진들은 사진이 괜찮긴 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귀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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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동교동계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인물이 바로 김대중 자신이었다.
호남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조선중기이후 정권을 쥐었던 서인들의 물질적 토대가 호남에 있었다. 서인들은 한때 동인들에게 실각을 당한 후에 절치부심하며 호남의 너른 들판을 아주 전략적으로 매입했다. 절대적인 농업국가에서 농지는 캐쉬 카우이다. 오늘날로 치면 삼성그룹을 소유한 격이다.
영남과 호남의 농지면적은 비슷하다. 하지만 영남의 농지가 산지지방에 위치한 것이라 대량소유가 힘들었던 반면에 호남은 상대적으로 평평한 지대에 있었어서 견물생심 소유가 쉬웠다. 또한 서인의 거두였던 정철이 옥사를 일으켜서 같은 호남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던 화담학파 천여명을 죽이고 나서 부턴 서인이 호남의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다. 이 호남벌의 너른 들을 물질적 발판으로 집권당파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호남에서도 전주는 전주이씨의 본가이다. 해서 예전에는 호남정치의 중심은 전주였지, 광주는 그저 변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전두환의 만행이 벌어지고 난 후에 전북정치는 종속변수가 되어 버렸다. 한때 김대중의 정적이었던 이철승의 본거지가 전주였던 이유도 있다.
아무튼 김대중은 보수색이었던 호남을 계몽시키느라 (?) 고생 좀 했고, 세계의 정당의 각종 조류를 파악하고 한국화하느라 한화갑류의 조력자들을 많이 썼다.
김대중이 작고하니 호남은 도로보수가 되어 버렸다. 특히 대중국무역이 성황을 이루면서 점점 경제적인 맛에 길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