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났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해석하곤 한다. 해리스냐 트럼프냐 인물비교 콘테스트를 하는게 아니다. 선거는 장기자랑이 아니다. 선거는 전쟁이다. 외전이냐 내전이냐. 물이 들어오면 선제공격하고 물이 나가면 내전을 벌인다. 미국은 내전을 택했다. 왜? 물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을 침략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문명의 에너지가 고갈된 결과다. 미국의 패배다. 이제 자기네들끼리 편을 갈라 싸울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무너지고 EU와 나토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면 된다. 왜 이렇게 되는가? 사회압 때문이다. 물은 수압이 있어야 흐르고 전기는 전압이 있어야 흐르고, 시장은 금리가 있어야 돌아간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돌아가려면 일정한 내부압력이 필요하다. 사회압이 충돌을 낳기도 하고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왜 PC가 난리치고 LGBT가 소동을 부리는가? 인간은 일용할 스트레스가 필요하다. 새로운 유행, 새로운 음악, 새로운 사조, 새로운 트렌드가 떠줘야 한다. 근데 하다하다 할게 없으니까 그냥 사람을 갈구기로 한 것이다. 요즘 잘 나가는 미국 음악은 뭐지? 모르겠다. 헐리우드도 한물간 지 오래다. 보여줄게 없으니까 사람을 괴롭힌다. 중요한건 그게 필요하다는 거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간다. 보수는 돈으로 사람을 압박하고 진보는 지식으로 사람을 압박한다. 어느 쪽이든 사람 괴롭히는건 같다.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한다. 돈으로 괴롭히면 나쁘고 지식으로 괴롭히는건 괜찮고? 천만에. 돈으로 괴롭혀야 시장이 돌아가고 지식으로 괴롭혀야 사회가 돌아간다. 정치권력과 시장권력과 문화권력의 3위일체다. 어느 일방이 타방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생산력이다. 그것도 한물갔다. 미국영화가 뜨고 미국음악이 뜨고 미국문화가 떠야 한다. 현실은 한국문화에서 아이디어를 빌리는 실정이다. 얼마나 궁했으면 한국에까지 손을 내밀게 되었을까? 스타워즈는 일본영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베낀 거다. 일본 영화는 서부극을 해먹은 것이다. 카우보이 총을 사무라이 칼로 바꾸기만 하면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가 된다. 그때가 좋았다. 흑인음악은 거의 표절이지만 문제삼지 않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임음악을 해먹었지만 저작권을 뜯기지 않았다. 그때는 활력이 있었다. 왜? 에너지 낙차가 컸으므로. 대졸자와 무졸자 사이의 간극이 넓었다. 지금은 전위차가 사라졌다. 전기에 전위차가 있듯이 사회에도 권위차가 있어야 한다. 위상의 차이다. 에너지 낙차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평준화 되어 에너지 낙차가 없으니 억지로 차별을 만드는게 주사파 품성론이다. 주사파 품성론의 미국식 변주가 LGBT에 PC다. 그게 나쁜건 아니다. 본질은 그게 차별이라는 거다. 사회에는 일정한 차별이 필요하다. 진보는 낡은 차별을 새로운 차별로 바꾼다. 예전에는 신분으로 차별했는데 요즘은 교양과 에티켓과 트렌드로 차별을 꾀한다. 인간은 어떻게든 차별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사람을 차별하면 안 돼. 그런데 넌 차별주의자야. 더러운 차별주의자 같으니라고. 이건 교묘한 차별법이다. 양심의 가책도 없다. 차별주의자로 몰아서 차별하면 차별주의자로 몰리지 않는 면책특권을 면죄부로 받는다. 문제는 전위차가 사라져서 사회가 활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LGBT가 진화해서 LGBTQIA가 되고 있다. 가관이다. 미친 짓이지만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다. 그거라도 해야 디즈니가 밥먹는다. 백설공주는 흑설공주로 바꿔서 찍어보자. 어쨌든 영화개봉 했잖아. 백인 주인공을 흑인 주인공으로 바꾸기만 하면 영화 100편 개봉. 이보다 쉬운 돈벌이가 있나? 요즘 한국 2030 젊은이들은 예의가 바르다. 좋은 현상일까? 활력을 잃은게 아닐까? 폭주족이 설치던 때가 좋은 시절이 아니었을까? 좋은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LGBTQIA고 PC열풍이고 반대하지 않는다. 그나마 그게 있어서 사회가 돌아간다. 중요한 것은 바닥이라는 느낌이다. 더 이상 발굴할게 없다. 세상은 차별에 의해 돌아가는데 차별할게 없다. 민족차별, 인종차별은 낡은 차별이고 새로운 차별을 생산해야 한다. 2000년대 초에는 컴퓨터가 등장해서 졸지에 부장님은 컴맹으로 신분이 하락했다. 세상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갈라졌다. 온라인은 제 1신분이고 오프라인은 제 2 신분이 되었다. 차별이 있었지만 꼰대들은 O양 비디오가 궁금해서 신입사원에게 굽신거렸다.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은 인구도 줄고 충무로도 망하고 드라마도 망하고 한국사회는 대체로 활력을 잃어버렸다. 인구도 없는데 예의바른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국뽕도 망하고 미뽕도 망하고 일뽕도 망하고 중뽕도 망하고 해먹을게 없잖아. 낙담할 이유는 없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이찍을 차별했기 때문에 나는 당당하다. 피해자가 억울하지 가해자가 뭐가 억울하겠는가? 스티브 잡스의 해적정신을 상기해야 한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되라. 우리가 해적이다. 우리가 가해자다. 가해자는 당당하다. 우리는 두 발 뻗고 잘 수 있다. 멍청한 이찍들 골려주면 된다. 아쉬운 것은 더 참신한 차별법을 발굴하지 못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빨리 되어야 저것들을 좀 더 씹어줄 텐데 말이다. LGBTQIA고 PC고 나쁜게 아니다. 그들이 해적이라는 말이다. 한국은 대응하기에 따라 트럼프 집권이 이득이 될 수도 있지만 구조론은 한국이 아니라 인류를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 미국문명의 좌절은 인류문명이 팽창기를 지나 수축기로 들어가는 징조로 해석된다. 미국이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포기한 것은 명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