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요짐보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사실 요짐보도 서부극을 베낀 복제품이다.
이후 요짐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는 없다.
한국영화 흥행의 시발점이 된 영화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영화평을 할 자격이 없다.
주유소가 없었다면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멀티플렉스를 돌릴 수도 없다.
영화의 예술성보다는 자본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 자본이 들어왔을까? 서부극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서부극.. 처음부터 끝가지 전부 거짓말, 20세기의 판타지.
그러나 일년에 영화가 천편씩 쏟아지는데. 무조건 돈이 된다. 무조건.
전성기 홍콩 코믹액션처럼 조폭 흑사회가 조잡하게 만들어도 돈이 되었다.
그때 조폭한테 잡혀서 강제로 일년에 영화 열편 찍은 사람이 주성치.. 모두 흥행
서부극은 죄다 거짓말이기 때문에 무한복제가 가능하다는 보편성이 있다.
주유소에서 무대뽀와 사인방은 짱깨군단과 양아치군단을 대결시켜놓고 튀는데.
주유소의 구조가 요짐보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짐보의 인격을 넷으로 쪼개놓은 것이 주유소다.
요짐보의 멋대로 행각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주유소의 무대뽀다.
이유는 없다. 그냥. 요짐보의 첫 장면, 막대기를 던져 그 방향으로 간다.
요짐보는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 게임이다.
설정놀이를 하고 그 설정 안에서 누가 이기는지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게임의 본질을 세르지오 레오네가 정확히 간파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게임을 하는 것이다.
요짐보에서 주인공은 시체 담는 술통으로 운반된다.
쟝고가 관을 끌고 가는 이유다. 쟝고는 그냥 요짐보다.
매드맥스는 호주 사막으로 무대를 옮겼을 뿐 본질은 요짐보다.
역시 몇 개의 파벌로 나누고 이들을 대결시킨 다음 튄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다.
멜 깁슨의 건들거리는 행동거지는 그냥 요짐보를 해먹은 것이다.
타란티노도 요짐보를 베꼈다.
물론 모든 서부영화가 요짐보를 베꼈으므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봐야 한다.
서부시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설정놀이를 하는 것이다.
스타워즈도 한솔로가 특히 요짐보 캥릭터다.
한솔로는 선과 악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떠돌이다.
한솔로는 주인공도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최고 인기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다른거 없고 요짐보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선과 악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떠돌이 캐릭터
혹은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고수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수련한다는
뻔한 무협지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여기에는 인류 공통의 어떤 코드가 있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르마다.
바둑의 포석처럼 그것은 반드시 있다.
외계인이 영화를 만들어도 이와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거다. 그것은 구조적 필연이다.
서로 베끼는 중에 먹히는 것이 살아남고
그것은 선과 악 어느 쪽에도 중립적인 캐릭터이며 그것은 조절장치다.
주인공은 싸움을 붙일 수도 있고 말릴 수도 있다. 밀당을 할 수 있다.
보통은 선이나 악에 속하여 운신이 제한된다.
성룡이 악당을 이기려면 졸라게 두들겨 맞아야 한다.
요짐보는 맞지 않는다. 스티븐 시걸은 요짐보 캐릭터를 베낀 것이다.
아이디어의 생명력은 끈질긴 것이며 창작이 자유로워보여도
바둑의 포석처럼 틀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둑은 아무데나 두어도 되지만 이기려면 정석대로 두어야 한다.
영화는 감독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지만 흥행하려면 주인공은 선과 악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넉살좋고 건들거리는 무대뽀 캐릭터라야 한다.
과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면 긴장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 이야기를 끌고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