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방향성 문제다. 아이디어는 작은 하나의 단서다. 작은 데서 시작하여 큰 데로 범위를 넓혀가므로 논리 중심 사고의 오류를 저지른다. 범위를 넓히려면 연결해야 하는데 연결고리가 되는 이항대립, 흑백논리, 양자택일, 이분법적 사고는 귀납적 사유다. 귀납은 밖에서 본다. 밖에서 보면 단절되어 있다. 억지로 연결시키면 흑백논리다. 안에서 보면 메커니즘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고리가 필요 없다. 계를 닫고 내부를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단계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는 연역적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양자를 먼저 깨닫고 양자라는 큰 저울의 부속품들로 원자, 공간, 시간, 정보를 채워야 한다. 차례로 범위를 좁혀가는 방향이다. 그럴 때 사실 중심의 사유를 할 수 있다. 사실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근원은 연결이다. 연결고리를 발견해야 한다. 연결고리를 발명하면 안 된다. 인위적으로 연결하면 안 된다. 안에서 보면 연결되고 밖에서 보면 단절된다. 원자는 밖에서 본다. 원자는 작다. 말단에서 끊어진다. 원자는 단절의 논리다. 연결의 논리로 바꿔야 한다. 애초에 인류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생각이 모두 틀렸다. 출발점에서 틀어졌다. 시선의 방향 차이가 인간과 원숭이를 구분 짓고, 문명과 야만을 구분 짓고, 주인의 사유와 노예의 사유를 구분 짓는다. 모두 연결된 것은 신이다. ### 배가 아프다면 위장 속에서 뭔가 트러블이 일어난 것이다. 위장 속을 들여다보면 된다. 지진이 일어났다면 땅속에서 뭔가 트러블이 일어난 것이다. 땅속을 들여다보면 된다.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실 중심의 사유다. 이것이 사실주의다. 논리 중심으로 가면 쓸데없는 이론이 나온다. 배가 아픈 것은 음양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진이 일어나면 하늘이 노해서 인간에게 경고를 내렸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외부를 연결하는 논리 중심의 사유다. 관념주의로 흘러간다. 논리는 언어의 논리다. 언어는 주어와 동사다. 아무렇게나 주어와 동사의 포지션만 메꾸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 중심의 사유다. 귀신이든, 천국이든, 내세든, 음모론이든, 초능력이든 동사 앞에 주어만 던져놓으면 된다는 아무말 대잔치다. 내부에서 답을 찾느냐, 외부를 연결하느냐다. 내부 메커니즘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말단에 이르러 더 쪼갤 내부가 없다면? 어떤 행동의 원인은 외부 자극에 있다. 그 경우에도 역시 내부를 봐야 한다. 더 큰 단위로 올라서면 내부를 볼 수 있다. 모든 사유는 내부지향의 리얼리즘적 사유라야 한다. 외부로 나가면 최초의 단서와 단절된다. 단절되면 길을 잃는다. 불안하다. 최초의 단서와 연결하는 이항대립의 연결고리에 집착해서 생각을 더 진행할 수 없다. 뇌가 사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 학이 냇가에서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는 이유는? 내가 열 살 때 사유의 방향문제를 발견하게 된 계기다. 인류 전체가 다 잘못되어 있다. 과학과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방법론이 모두 틀렸다. 인류가 생각에 사용하는 도구가 잘못되어 있다. 근본이 틀어졌다. 70년대의 방학공부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이 체온을 절약하기 위하여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위하여라고 하면 이미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위한다는 것은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예상은 내 바깥의 먼 곳이다. 의하여가 맞다. 내부를 봐야 한다. 직결되어야 한다. 조류는 신체구조가 한 다리로 설 수 있게 되어 있다. 뇌가 체중을 두 다리에 분배하려면 힘들다. 플라밍고뿐 아니라 대부분의 새가 한쪽 다리로 서곤 한다. 참새와 닭을 관찰해서 인류가 틀렸음을 알았다. 방향이 틀리면 전부 틀린다. 방향은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린다. 대장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면 부대 전체가 잘못을 저지른다. 외부를 바라보는 위하여의 귀납논리냐, 내부를 바라보는 의하여의 연역논리냐. 여기서 틀리면 인류의 모든 사유가 죄다 틀어진다. 구조는 내부에 있다. 구조는 직결되므로 논리의 연결고리가 필요 없다. 논리 나오면 일단 거짓말이라고 봐야 한다. 구조는 내부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자연히 외부로 눈길이 간다. 배를 갈라 내부를 보면 되는데 그럴 용기가 없다. 인류는 대책 없이 비겁해졌다. ### 구조는 계를 닫아걸고 내부를 본다. 닫힌계 내부는 동력이 연결되어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동력이 연결되면 압력이 걸리면서 힘의 평형에 따른 밸런스와 지렛대가 작동한다. 계는 관성력에 의해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며 한 방향으로 계속 간다. 내부가 보이지 않으면 더 큰 의사결정 단위로 올라서서 역시 내부를 봐야 한다. 우리가 진리와 문명과 역사와 진보와 신의 편에 서야 하는 이유다. 그래도 안되면 압력의 평형에 도달할 때까지 계를 닫아걸고 내부를 압박하는 강도를 높이며 조절하면 된다. 압력이 임계에 도달하면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정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민중의 분노가 축적되어 어떤 임계에 도달하면 명백해진다. 물리학이 답을 낸다. 노이즈가 끼어든 중간 부분을 보지 말고 일의 시작 부분을 보면 된다. 뭐든 조리 있는 생각, 그럴듯한 주장, 말이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지면 일단 틀렸다고 보면 된다. 반면 뭔가 새로운 사실을 들추고 은폐된 정보가 드러나면 바른말이다. 수평 연결은 틀리고 수직 축적은 맞다. 외부는 수평으로 잇고 내부는 수직으로 파헤친다. 아프리카에 가 본 사람은 안 가본 사람이 모르는 정보를 들고 와야 한다. 수직적 차원의 차이, 질의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이미 알려진 것을 미사여구로 꾸며서 이야기하면 안 가본 사람의 거짓말이다. 사유의 방향을 보고 1초 안에 진위를 판단할 수 있다. ### 개나 고양이는 정지해 있는 물체를 잘 식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동물이 도로에 가만히 서 있다가 로드킬을 당하는 이유는 달려오는 상대가 정지한 물체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믿고 얼음땡 놀이에 숨으려 하기 때문이다. 개는 입체를 보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의 윤곽은 잘 찾는데 눈앞에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을 찾지 못한다. 강아지와 숨바꼭질을 하면 견주를 못 찾는다. 인간의 시신경이 120만 개인데 개는 17만 개뿐이다. 사람은 입체적 사유를 못한다. 버스에 탄 승객은 의자에 앉든, 손잡이를 잡든, 어딘가에 붙잡혀 있다. 붙잡히면 안이고 그렇지 않으면 밖이다. 잡혀야 생각한다. 잡히는 것이 없으므로 사유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은 가둬놓고 조지는 것이다. 사유는 무조건 안을 봐야 한다. 안에서 붙잡힌다. 간첩이 아니라면 주소가 있고, 소속이 있고, 신분이 있다. 모든 존재는 붙잡힌 존재다. 매개에 잡혀 압력을 받고 있다. 압력에 붙잡힌다. 가만있는 돌도 중력에 잡혀 있다. 어디에 잡혀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보통은 압력에 잡힌다. 모든 존재는 메커니즘에 갇혀서, 윗선의 동력원에 의하여, 매개에 붙잡혀서, 수직적으로 압력을 받고 있는 내부적인 존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