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분육'이라는 말이 있다. 초한지의 인물 진평은 젊었을 때 마을 제사를 주재하는 재宰를 맡아 고기를 공평하게 나눠준 일로 명성을 얻었다. 이때 진평이 탄식했다고 한다. '내가 천하의 재상宰相이 되더라도 고기 나누듯 공평할 텐데.' 재상宰相의 재宰는 제사에 올린 고기를 나눠주는 역할이다. 회의를 주재主宰한다고 한다. 재宰가 권력이다. 권력은 나눠주는 것이다. 권력을 틀어쥐고 나눠주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다. 권력은 주는 것이고 잘 주려면 철학이 필요하다. 세상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연결이다. 철학은 주는 사람의 고민이다. 주는 사람은 결과를 예측해야 하지만 받는 사람은 받으면 끝이다. 받는 사람은 철학이 필요 없다. 염세주의, 비관주의, 보수주의는 받는 사람의 고민이니 잘못된 거다. 주는 사람은 긍정하고, 낙관하고, 진보한다. 무엇을 긍정하고, 낙관하고, 진보하는가? 주는 도구를 긍정하고, 도구의 품질을 낙관하고, 도구를 다루는 실력이 진보한다. 도구는 조절된다. 다른 도구, 좋은 도구, 더 나은 솜씨로 바꾸면 된다. 주는 것이 권력이다. 주는 사람은 권력을 조절한다. 조절은 2를 1로 바꾼다. 동료를 얻어 2가 되어야 조절할 수 있다. 주는 사람은 동료를 긍정하고, 동료와의 소통을 낙관하고, 동료와의 협력이 진보한다. 동료와의 관계가 조절하는 도구다. ### 발언권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반대해야 한다. 반대할 때 주위의 이목이 쏠린다. 비로소 마이크를 잡을 수 있다. '지구는 평면이다.' 하고 지동설에 반대하며 어긋난 소리를 해야 눈길을 끌 수 있다. 인간은 이분법으로 사고한다. 선과 악이든, 진보와 보수든, 옳고 그름이든 뭔가 대립을 만들고, 둘 중에 하나를 반대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도록 압박해야 인간은 정신을 차리고 관심을 보인다. 구조론은 반대하는 것이 없어서 불리하다. 구조론은 도구를 사용한다. 도구는 가치중립적이다. 도구를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된다. 굳이 말하자면 구조론은 반대를 반대한다. 염세주의, 비관주의, 보수주의는 무언가를 반대하려는 부정적 사고다. 이분법, 흑백논리, 이항대립, 양자택일, 프레임 걸기는 무언가를 반대하는 방법으로 손쉽게 목적을 달성하려는 속임수였다. 역사 이래 인류의 사상은 대개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받는 사람은 반대할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으므로 내가 싫어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목청 높인다. ### 세상은 관계다. 관계는 둘 사이에 있다. 둘 사이의 관계는 하나다. 어떤 둘이 마주보고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가 더 있다. 둘을 매개하여 공존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 우리는 둘을 각각 보면서 둘 사이에 숨은 하나를 보지 못한다. 관계를 보지 못한다. 관계가 조절되는 도구임을 모른다. 둘 사이에 작동하는 권력을 모른다. 권력의 작동법을 모른다. 구조는 도구다. 도구는 주는 도구다. 주면서 조절한다. 모든 도구는 칼자루와 칼날로 이루어져 있고 둘의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 선은 조절이다. 도덕은 조절이다. 진보는 조절이다. 모든 도구는 2가 들어가서 1이 나온다. 거기에 효율성이 있다. 조절하여 얻는 것은 효율성의 힘이다. 둘을 연결하면 관성력이 얻어진다. 관성력은 숨어 있으므로 이기는 힘이 된다. 받는 사람 관점에서 주는 사람 관점으로 바꿔야 한다. 진리와 문명과 진보와 역사가 도구임을 깨닫고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신은 도구의 주인이다. 신은 주는 사람에게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