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적 사고를 처음으로 한 사람은 석가다. 석가는 인류 중에 처음으로 진짜 생각을 한 사람이다. 그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능동적 사고다. 불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은 구조론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상가와 석가의 차이는 생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방법론을 제안한 점이다.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대개 주어진 문제를 푸는 수동적 사고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므로 관측자가 개입하는 관점의 오류가 일어난다. 수학은 객관적 도구를 쓴다. 인간은 빠지고 숫자가 관측한다. 값이 고정된 수는 고정된 것의 관측에 쓰인다. 변화를 추적하려면 변화가 내장된 도구를 써야 한다. 변화로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메커니즘이다. 곧 구조다. 자는 눈금이 고정된다.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는 비례를 써야 한다. 이쪽이 이만큼 변하면 저쪽은 얼마나 변하나?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석가의 연기법이다. 직각이 변하면 대각선이 변한다. 피타고라스다. 질이 일어나면 입자가, 입자가 일어나면 힘이, 힘이 일어나면 운동이, 운동이 일어나면 양이 일어난다. 관성의 연쇄고리다. 변화는 변화의 관성에 붙잡힌다. 인간은 불변을 찾지만 진정한 불변은 변화 메커니즘에 있다. ###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구조론은 다섯 가지 이것과 저것의 비례를 해명한다. 이것과 저것을 빈칸으로 두고 채워 넣게 하는게 생각의 도구다. 보통은 빈칸으로 두어야 할 이것과 저것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주관적 판단의 오류로 망한다. 묶인 개가 발버둥 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은 대개 묶인 개의 발버둥이다. 운이 좋으면 탈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개가 목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빈칸에 들어가면 안 된다. 풀려 있어도 탈출한 것이 석가의 해탈이다. 석가는 도구를 만들었다. 도구를 장악한다는 점이 다르다. 문제가 어려워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도구의 날을 날카롭게 갈아 맞대응한다. 개는 목줄을 장악하지 못한다. 약한 목줄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한 번 탈출은 가능하나 복제되지 않는다. 생각을 도구로 생각해야 진짜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흙이나 돌이나 나무를 도구로 생각하면 변화를 추적하는 추상이 아니다. 변화를 도구로 삼아야 변화가 추적된다. 대개 불변을 도구로 삼고 불변에 의지하려 하므로 실패한다.
링 위에 올라 선수로 뛰면 안 된다. 주최측이 되어야 문제와 답을 동시에 장악하는 능동적 사고가 가능하다. 문제를 고정시키면 안 된다. 문제는 문제가 풀게 하고, 답은 답이 찾게 하고, 생각은 생각이 하게 하고, 인간은 동력원을 틀어쥐고 조절한다.
### 우주의 작동방식은 부름과 응답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이다. 석가는 그것을 연기라고 했다. 인간과 환경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맞대응하는 상호작용의 경계선을 최대한 멀리 두면 시야가 끝나는 지점에서 소실점이 보인다. 그것은 하나다. 그것이 신이다.
정상에서 눈덩이를 굴려야 멀리까지 굴러간다. 비행기가 이륙하려면 활주로가 길어야 한다. 근원의 신으로부터 관성력을 출발시켜야 기세를 탈 수 있다. 역사의 관성력, 진보의 관성력, 자연의 관성력, 문명의 관성력, 진리의 관성력에 올라타야 끝까지 간다. 인간은 맞대응하려고 한다.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는다. 내가 손봐줄 그 무엇이 눈앞에 있다고 믿는다. 가까운 곳에서 때려줄 공산당을 찾고 때려죽일 빨갱이를 찾는다. 때려주려면 적이 만만해야 한다. 혼내줄 만만한 상대는 단절되어 있다. 고립되어 있다. 그들은 연결을 부정한다. 관계를 부정하고 의미를 부정하고 메커니즘을 부정한다. 석가는 말했다. 고유한 자성은 없다. 그러므로 원자는 없고, 사원소도 없고, 오행도 없다. 원소와 원자와 오행은 단절되어 있어서 만만하다. 그러나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집단을 부정한다. 권력을 부정하고 사랑을 부정한다. 모든 연결수단을 부정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권력이 사회를 연결한다. 권력을 행사하려면 지렛대가 필요하다. 뒤를 받쳐주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힘을 쓸 수 있다. 평등이 있어야 힘을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