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석열 정부가 과거사를 뻣대고 가만있는 일본에다 머리 조아리며 조속히 알아서 우리끼리 조용히 잘 해결하겠노라고 선언한 날, 일본은 유엔에서 “징용 노동자의 유입경로는 다양하며 강제노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명백히 강제노동 맞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는 일본에 대해 정부는 뒤통수를 맞기만 할 것이 아니라 즉각 합의를 폐기하고 항의해야 합니다.
역사는 뒷거래나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역사는 5년 단임 대통령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민족의 것이고, 바른 역사는 후대를 위한 미래입니다.
2. 일제는 1939년 1월, 국민징용령을 만들었고 강제동원한 160만 명의 청장년들을 일본의 탄광이나 군사시설 공사장 등으로 끌어가서 죄수처럼 무자비하게 취급하며 열악한 노동을 시켰으며, 나중에 군사기밀 보안 유지를 구실로 무참히 집단학살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3. 유엔에서 일본이 입국, 취업경위 등에 비추어 강제노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자발적인 근로 참여, 전쟁 등 비상시에 부과된 노역 등으로 강제노역의 예외라고 주장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를 이용한 기만술입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납치, 유인 등 인간사냥을 한 것이고, 명목상 임금을 준 경우에도 밥값, 피복비로 공제해 남는 것이 거의 없었고, 전시 동원이라면 동원 임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수 있어야 하나 노예처럼 감금되어 있다가 군사 보안 유지를 이유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4. 저는 조정래 작가님의 <아리랑>을 일독하기를 추천합니다. 제 12권에 이르러 읽는 내내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울음을 삼키려 해도 절로 눈물, 콧물을 주체할 수 없게 했습니다.
작가는 <아리랑> 제4부의 서문에서,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일식의 용서를 빌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유태인보다 10배가 넘는 공포에 시달리고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죽어갔는지를 어림숫자도 모르면서 유태인의 비극보다 우리 자신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기피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해방과 함께 우리 사회를 장악했던 친일파들의 득세로 일제의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집단최면을 건 탓을 꼽았습니다. 민족의 자존을 확보해 미래를 개척하는 동력으로 삼고자한다는 말씀에 숙연해졌습니다.
5. <아리랑> 제12권의 제40 <인간사냥> 편에는 강제노동으로 끌려가는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고 아프게 그려집니다.
징용을 너무 마구잡이로 많이 끌어가 농촌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는데 또 징용대가 나왔다. 전시체제 일육군성 산하 노무보국회 동원부장 이시바시가 김제읍에 나타나 지시했다.
“지금부터 지시하는 것을 똑똑히 들어라. 우리가 지금부터 사냥할 징용숫자는 3백 명이다. 1개조 씩 4명으로 편성하여 이틀 동안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 각각 1개조의 책임할당량은 75명씩이다.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특히 조선인 경찰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같은 조선 사람들이라고 하여 사정을 보아주거나 임무 수행을 철저히 못할 시는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다.!”
이시바시는 소리침과 동시에 칼을 휙 뽑아들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칙령을 받들고, 대일본제국 육군성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명심하라!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육군성은 징용자들을 화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부터 남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사냥하라. 제군들 임의대로 선별하지 말고 무조건 사냥해서 차에 태워라. 선별은 차후에 내가 한다. 지금부터 1개조씩 각 마을로 분산하여 사냥을 개시한다. 지금 시각 오전 11시, 오후 5시 정각에 이 지점에 재결집한다. 이상!”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마차를 타고 용무를 보러 가다가, 동네 길을 걷다가 남자들은 나이 불문, 병약자 불문 모두 사냥감이 되었다. 끌려간 사람들이 있는 집집마다 여자들의 울부짖음과 통곡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중략)
징용방법은 원래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건달패인 낭인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였다. 낭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몇푼의 전도금을 주면서 일본에 가면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꾀었다. <모집>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낭인들은 탄광이나 광산, 철도공사 같은 데 팔아넘겼다. 낭인들이 받은 돈은 끌려간 사람들의 임금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감시 속에서 골빠지게 일만하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이 방법은 벌써 1910년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두 번째는 관에서 알선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군수산업체에서 필요한 조선인 노무자들을 관의 행정계통을 따라 조달하는 것이었다. 사업소-현의 지사-후생성- 조선총독부- 지방관서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방법은 행정절차 때문에 노무자 조달에 3개월 이상씩 걸린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전쟁은 자꾸 확대되어 가고, 석탄 생산이며 군사시설 같은 것은 하루가 급한데 3개월이란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 그래서 (징용대장 이시바시가 직접 현지에서 지휘한 것처럼 육군성이 직접 조선 현지에 나와 사냥하는) 세 번째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노무자 징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 세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되었다. (45~ 65쪽)
6. 제45, <당신은 아는가>편에서는 일제가 강제노동에 끌려온 노무자들을 혹독한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돌림병에 걸리면 매장을 해버립니다. 노무자들은 그저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공사가 끝나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던 그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1천 명 전원 학살하는 잔인하고 끔찍함에는 전율마저 느끼게 합니다.
실제 지시마 열도에서는 조선인 강제노동자 5천여 명을 비행장 완공 후 보안 유지를 이유로 그런 식으로 집단학살했습니다.
(143~158)
7. 작가가 가장 슬픈 민족적 참상을 묘사한 장면에서 <당신은 아는가>로 제목을 붙였는지 그 이유가 깨달아집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를 질타한 것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생각할 수 있고 알아야 제대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이 정부의 인사들에게도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일독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