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부견자라는 말이있다.
호랑이 아버지 밑에서 개자식이 나온다는 말인데, 이게 생물학적으론 말이 안되지만 심리학적으론 상당히 일리있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호부 밑에서 견자가 나온다는 것일까?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온갖 역경과 고초를 겪고 마침내 성공한 호랑이 아버지. 그의 자아는 강하고 튼튼하고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밀림에서 살아남았으며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다. 그의 밑에 딸린 사원들 수만 몇 천이고 재산은 삼대가 아니라 삼십대가 아무 일도 안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다.
그가 겪었던 모든 시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호랑이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단 한가지만 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호랑이 아버지는 자문한다. "어떻게 내 밑에서 저런 개자식이 나온걸까?" "어떻게 저렇게 멍청하고 무능하고 비겁하고 나약한 놈이 태어난 걸까?"
자신이 평생 일구어놓은 XX 그룹을 물려주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지 오래이다.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너무 오냐오냐 키웠던 것일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최고의 학교에 최고의 교육, 최고의 인맥에 최고의 부모. 아이의 어머니는 대학원 박사졸업을 할만큼 재원이었고 자신 역시 머리가 좋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의 머리를 이어받았으면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닐게다.
그런데, 이 개자식은 너무나도 멍청하다. 학창시절 성적도 그저 그랬고, 결국 유학을 보내 외국대학 졸업까지 시키진 했지만, 그 와중에 마약을 해서 그걸 덮느라 쓴 돈이 억단위였다. 이후 정신차린 듯 하여 큰맘먹고 계열사 중 하나에 상무로 임명해 나름 경영수완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건만, 아주 단기간에 장렬하게 말아먹었다. 도무지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주변의 멍청한 친구들 말에 혹해 우리 기업이 익숙치 않은 분야에 무리해서 진출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름 경영수업도 시킨 터라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다. 00그룹 딸과의 결혼생활도 뭐가 문젠지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한채 이혼으로 끝나버렸다. 이후로도 시도한 몇 가지 사업에서 신통치 않은 결과를 내놓으며 나를 실망시켰다. 차라리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딸들이 훨씬 똑똑했다.
호랑이 아버지는 고민이다. 과연 이 견자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줘야 할 지 말이다. 분명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잡초같이 살아오면서 온갖 진창과 수렁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런 일을 자식에게 또다시 반복시킬 순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무엇하러 그런 고생을 반복시키겠는가? 물론 그런 고생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굳이 그런 환경을 내 자식에게 경험시킬 필요는 없었다.
물론 자식을 엄하게 키우면서 나름 세상사의 어려움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높은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여러 상황도 겪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내 자식이 견자라는 사실을, 호부 밑에서 견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위에 가상의 이야기를 꾸며보았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저것과 비슷한 패턴은 현실에서도 쉽게 관찰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독재자 박정희의 아들이 그랬고, 재벌 2세들 중에서도 자살, 마약, 사업실패 등의 비운을 겪는 일이 있다. 과거 역사를 보아도 맹장 밑에서 또 맹장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영웅 밑에서 또 영웅이 나오는 경우 역시 드물었다. 왜일까?
뭐 이런 걸 정신역동적으로 해석하여 가부장적이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이 끝끝내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못한채 성기기에 고착되어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다가 견자의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해석해서 재벌 2세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와 압박감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해 그렇게 삶을 불안하고 괴롭게 살아가는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겟다.
하지만 호부견자의 문제는 구조론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더 잘 보이는 문제다.
구조론심리학으로 보면, 호부견자는 사실 "자아"의 문제이다.
자아. 근데 자아란 무엇인가?
김동렬: 그냥 먹고싶다 먹고, 자고싶다 자는게 아니라 내가 먹으면 상대는? 내가 자면 상대는? 이걸 계산하는게 자아인데, 자아는 여러 경험이 축적되어 성립합니다. 특히 위험에 대한 경험이죠. 뭘 했다가 잘못되어서 혼쭐난 경험이 인간을 긴장시키고 그 긴장의 강도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예측합니다. 혼쭐난 경험이 쌓이면 반사적으로 긴장하죠. 자신이 긴장해 있다는건 상대가 나를 공격한다는 신호. 그렇다면 대비해야 하고. 그러므로 행동할 때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들어가는 거.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그게 자아입니다.
구조론에서는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의 전개에서 두번째 의식이 자아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어떻게 할까를 보는 것이 의식이죠. 생각해서 보는게 아니고 긴장해서 보는 겁니다. 긴장하는건 마음에 데미지를 입어서 그렇죠. 자아의 크기는 좋고 나쁜 데미지의 크기입니다.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그 내 영역이 크고 약한 사람은 작죠. 내가 이렇게 하면 신은? 국가는? 정권은? 인류는?..이건 자아가 큰 거고. 내가 이렇게 하면 개는? 고양이는? 동팔이는? 친구는?.. 이건 자아가 작은 것.
호부의 자아는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의 가슴에 달린 훈장과도 같다. 그것은 숱한 격전과 사지를 헤쳐나가며 획득한 부산물이다. 그의 자아는 호목처럼 오밤중에도 번뜩이며 위험을 예의주시한다. 호부는 그의 성공을 획득하기까지 온갖 데미지를 입어왔으며 자아를 파수꾼삼아 위험을 예견하고 적절하게 외부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왔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를 자신의 후대에겐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은 개같이 벌었으니 자식은 정승처럼 쓰기를 기대한다. 자신은 야생에서 자랐지만 자식에겐 최고의 온실을 제공해주려 한다. 여기에 예외는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호부들의 경우 외부 활동을 하느라 바쁜 나머지 가정의 문제, 특히 자녀 양육에 있어선 주도권을 '똑똑한' 배우자에게 맡김으로써 양육이라는 스트레스 만땅인 과업을 피하려 든다. 이 똑똑한 여인은 호부의 묵인 하에 자식에게 최상의 환경을 제공해주며, 자식은 그 속에서 무럭무럭, 그러나 속은 텅 빈 쭉정이로 자란다.
자신이 호랑이 같은 자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주변 환경의 위험성에 대한 깨어있음, 환경의 변화에 맞서 긴장을 끌어올렸던 것 덕분이라는 것을 망각한 호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견자를 위한 최상의 환경을 조성해준다.
견자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 "가장 안락하고 위험이 없는 환경"을 제공해주면 된다.
유리로 막힌 온실에선 바깥의 태풍을 느낄 수 없다. 조금있다가 유리천장이 통째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위기에 처해있어도, 온실 안은 아늑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다. 이 온실 안에서 자란 견자는 호부의 생존법칙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지만 온실에서의 생존법칙은 잘 알고 있다. 온실에서의 생존법칙에 따르면 어렵사리 긴장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실천할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최고의 혜택이 주어지고 가만히 있어도 욕망은 충족된다. 호부가 일궈놓은 부와 권력과 명예는 견자의 후광이 되어 견자는 그 빛의 온기를 마음껏 누린다.
세상의 냉혹함과 무서움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면서 얻은 자기 나름의 생존방법을 거의 '진리'로 여기는 호부는 틈나는대로 인생사의 어려움에 대해일장연설을 하지만, 견자의 귀엔 그야말로 개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견자는 아버지처럼 굳이 발버둥치며, 애쓰며, 고뇌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태어날때부터 주어진 성공의 길을 차근차근 별탈없이 통과해 해 나아가면 높은 학력과 고위직, 최고의 배우자가 보장된다. 그렇게 그들은 호부가 그랬듯이 외부 환경에 대해 긴장을 끌어올려 자아로 맞서고, 굳은 의지로 난국을 돌파할 필요가 없어진다.
호부와 호부의 배우자가 견자를 위해 설정한 "최상의 양육 환경"이 견자의 마음의 구조,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에서 정신-의식-의도를 무의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위험을 제거한 환경, 정해진 진로는 인간의 마음이 일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운이 좋아 온실 밖의 세상을 접했다 하더라도, 이미 긴장을 끌어올리는 법을 잊어버린 마음은 온실 밖의 세상을 그저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만 간주하고 다시 아늑한 온실로 발길을 돌린다. 견자의 무의식은 자신이 온실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호랑이의 눈을 피해 달아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호랑이 눈은 바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무서운 자신의 아버지, 호부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호부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몇 가지 일탈 행위를 해보면서 호랑이 눈을 피해 도망치려는 시도를 몇 번 해 보지만,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견자들의 주 레퍼토리인 마약, 이혼, 사업실패, 사기당하기 등은 온실 문을 열고 바깥의 세상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니라 온실 내부에 집기들을 집어 던지면서 땡깡피우며 어리광피우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지만, 견자는 그런식으로라도 자신이 호부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릴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온실 외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호부의 세계를 부정하고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호부의 "자아"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호부에게만 있으며 견자에겐 없다. 이것이 견자의 비극이자 호부의 괴로움이다. 호부는 견자가 자신의 책임인 것을 모른다. 자신이 제공한 최상의 환경이 실은 최악의 환경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신이 '자식'이라는 '외부 환경'에 대해 사업할 때 국내 정치나 세계 경제 흐름, 사업환경의 변화을 예의주시하는 것처럼 긴장하고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호부의 자아는 외부환경에서 주어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해 단련되고 주조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스트레스에 굉장히 강한 터프한 존재라고 믿지만 자아가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식을 견자론 키우지 않겠다며 엄하게 다루면서도 정작 양육이라는 과업에 긴장하지 않고 자식의 진로를 미리 세팅해 놓은 채 양육에 대한 긴장과 부담은 자식의 어머니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자고로 어머니들은 자식을 최대한 위험에서 보호하는데 특화된 분들이니, 호부가 바라는 호랑이 같은 자아가 자라기 위한 거칠고 위험하고 온갖 스트레스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 같은 환경은 견자에겐 결코 제공될 수가 없다. 그렇게 호부의 방임과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가 충족되지 않는가만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마음의 일거릴 물어오지 못하고, 세상이 계속 진보라는 이름으로 일거리를 던져줘도 이를 담당할 자아가 없고, 갈림길에서의 판단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의도가 없다. 견자는 마음의 구조에서 말단 부분만을 일시키면서 호부의 자아의 부속품 노릇을 한다. 견자는 호부의 자아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것이 호부견자의 메커니즘이다.
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