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캄캄하게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내가 17살에 깨달은 것은 ‘가던 길을 슬금슬금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후회하게 될 때까지, 일단 가던 길을 계속 가보는 것이지 무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가다보면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서 어울리다보면 세력이 만들어지고, 세력이 만들어져야 통하는 법이다. 공자도 사실은 여불때기로 대박이 난 경우다. 공자는 미련한 증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증자가 강조한 효는 공자 아니라도 중국 전통의 사상이었다. 진보적인 공자의 사상을 약간 변형하여 보수적인 중국 전통사상에 가미하여 증자가 써먹은 것이다. 공자는 구태여 그것을 말리지 않았을 뿐이다. 효란 즉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고, 곧바로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기술로 변형되니, 곧 유교가 군주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는 공자가 기대한 방향이 아니었다. 엉뚱하게 여불때기로 뒷패가 붙어서 대박이 난 것이다. 이후 맹자는 증자 계열이니 증자가 공자의 정통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점은 예수도 비슷하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예수로 변개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 필요했고 또 현장에서 먹혔기 때문이다. 황제는 선지자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 역시 여불때기로 뒷패가 붙어서 엉뚱하게 대박이 난 것인데 예수가 돌아온다면 이를 찬성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내 입장도 비슷하다. 구조론이 대박이 난다면 여불때기로 뒷패가 붙어서 대박이 나는 것이며, 이는 내가 원해서 되는게 아니고 시대가 그것을 필요로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불교도 본토인 인도에서는 망하고 엉뚱하게 중국에서 뒷패가 붙어서 여불때기로 대박이 났다. 지금 불교사상의 핵심과 석가가 처음 생각했던 것은 다르다. 지금이 더 진보한 사상일 수도 있고, 원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한 것일 수도 있다. 석가가 돌아오면 노장사상이 가미된 한중일의 선불교를 과연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내 짐작으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은 다 하느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라고 공자도, 예수도, 석가도 변명할듯 하다. 세상이 그걸 원하는데 어쩌겠는가? 세상의 일은 세상에 맡기고 나란 가던 길을 계속 가보는 수 밖에 없다. 길이 있으면 일단 가보는 수 밖에.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잘못되면 다 하느님 책임이니까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고. 세상이 다 무너져도 다 하느님 잘못이지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일단 가는 길을 계속 가는게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열일곱때 깨닫고 곧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피곤해졌을지 모르겠으나 잘못된 만큼 잘될 가능성을 찾았다. 하나가 실패할 때마다 더 큰 가능성을 얻었다. 나는 무수히 실패하였지만 성공의 확률은 조금씩 쌓아갔다. 그 확률이라는 자산은 내 일생동안 조금도 줄지 않고 계속 늘기만 했다. 일은 남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통 내가 잘했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남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 운명의 기로에서 내가 옳은 선택을 했는데도 남이 잘못된 행동을 해서 모두 나빠져 버렸다 해도 그게 내가 고민할 바는 아니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며 거기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전부는 크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에서 겉으로 드러난 10프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나머지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는데 60프로 정도의 승산이 있다고 하자. 그 일을 해서 성공하면 만인의 칭송을 얻는다. 그러나 40프로의 실패위험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보통 정치게임에서 60프로 승산을 보고 도박을 해서 성공시키면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그 40프로의 위험에 대비해야한다. 완벽하지 않은 승리가 다음번 싸움의 패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욕을 먹더라도 그 위험에 대비할 때 다음의 승리는 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너무 내가 다 책임지려 하지 말고 일단 한번이라도 이겨만 놓으면, 다음 일은 다음 타자가 어떻게든 해결해 준다. 그러니까 요행이든 뭐든 일단 이겨놓는 것이 중요한 때도 있다. 동그라미가 있고 그 바깥에 더 큰 동그라미가 있다. 내가 바른 선택을 했을때 안쪽의 작은 동그라미가 붕괴되었어도, 바깥의 큰 동그라미에는 이득이 된다. 내가 바른 선택을 해서 내부고발을 하면, 내가 속한 조직이 붕괴되지만 대한민국은 건강해진다. 전체의 이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조직의 이득은 유형의 드러나는 존재이다. 무형의 드러나지 않는 전체의 이익에 기여해야 진짜다. 이때 나의 옳음을 누가 알아주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함으로써 신의 성공확률을 올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내 일을 옳게 해서 내 가족이나 내가 속한 조직은 실패하더라도 신은 성공확률을 올렸다. 그 점이 중요하다. 내가 옳게 했는데 세상이 잘못되면 신의 책임이다. 오지랖 넓게 신을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신이 잘못하면 신의 탓이고, 역시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모를 때는 그 상황에서의 옳음을 추구하는게 중요하다. 구조론은 입력부와 출력부만 본다. 중간은 보지 마라. 가장 멀리 있는 등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방향타를 보라. 그 중간의 파도와 지나가는 갈매기 두 마리는 볼 필요가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신과 함께 가는 것이다. 그 중간은 그만 잊어버려라. 물론 답을 알면 그 답대로 하면 된다.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일단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신에게 쓸모있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신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신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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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남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통 내가 잘했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남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 운명의 기로에서 내가 옳은 선택을 했는데도 남이 잘못된 행동을 해서 모두 나빠져 버렸다 해도 그게 내가 고민할 바는 아니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며 거기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전부는 크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에서 겉으로 드러난 10프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나머지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그게 내가 고민할 바는 아니다.
사람이 어떤 뜻하지 않는 사건들을 겪게되면...
자신이 고민할 바가 아닌 것에서, 순간적으로 마주친 그 어떤 것에 의하여 마음은 사시나무 떨리듯이 우수수 무너져 버리기도 하는데... 그때 자기존중감이 튕겨져 나가 떨어져 버리고, 마음의 괴로움과 불행은 시작되는데....
왜 마음이 불행한지, 왜 마음이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왜 움츠려 드는지, 왜 화나 있는지....
늘 누구나 자기자신을 사랑하라 라고 하지만, 마음이 불행하면 그 말을 상기하지 못한다. 한다해도 흉내만 내기에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 정신차려... 하고 존엄을 얘기한다.
그 존엄이란 것에 온통 신경이 쏠린다. 빛으로 다가온다. 가슴에 무엇인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찾고자 했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마음의 모든 병리는 존엄을 어떤 사건들에 의해 잊어 먹어서 그렇다.
너무놀라 존엄이 저멀리 튕겨져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니 너무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던가?
존엄이 사라져 버린 마음은 주인이 없기 때문에 늘 바깥의 것들이 와서 집을 짓게된다.
자기집에 남이 와서 주인노릇하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존엄이 잃어버리니 온통 바깥의 것들의 신경이 곤두서고, 자신의 바깥의 것에 지배당한다.
존엄존엄 누군가 외치니..존엄이 집을 찾아온다. 잊고 있었구나... 존엄이 오니 참 마음이 편안한데...
여유가 생기는데... 존엄이 멀리 튕겨져 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니....
앞으로는 존엄단속 잘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사람이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마주치면 황망하여 어쩔줄을 몰라하다 존엄이 사라져 버리고, 그 사건에 휘말려 마음의 불행을 달고 사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불행하다 느껴지면...그때는 존엄 챙기기가 생활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존엄이 딱 버티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심리적인 여유가 생기고, 타인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주변을 다시 둘러볼 수 있는 시각을 주고, 자기 단도리가 되고, 마음에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존엄을 관찰해보면 재미 있을듯...ㅎ~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거나, 혹은 어쩔 줄 모르거나..뭔가 힘들어 보이는 이유가 다 그때문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존엄에 대해 얘기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엄은 바로 옆에까지 오게되니..꽉 붙들기...^^
존엄이 마음에 크고 바르게 자리잡을 때 ...그 마음 상태를 표현하자면...그 상태의 마음을 자비라고 표현해 봅니다.. 자비는 연민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연민은 동정과는 다른 의미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연민이라고 받아 들이면 곤란하고,
연민은 큰 사랑이 아니라 큰 자비라는 표현에서 더 알맞다고 생각되며, 이 연민의 마음이 들면 그때는 모든 것을 초월한 마음이라고 생각되며..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어...마음이 세상을 크게 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가장 멀리 있는 등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방향타를 보라."
답을 알면 답대로 하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