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 정립된 과학의 방법론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중구난방으로 투척되면 안 된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1초 만에 알 수 있다. 방향이 맞으면 맞고 방향이 틀리면 틀린 것이다. 관종들의 개소리에 일일이 입씨름을 해야 한다면 피곤한 일이다. 과학과 주술은 다르다. 과학은 연역이고 주술은 귀납이다. 연역은 사건이고, 사건은 에너지고, 에너지는 엔트로피고, 엔트로피는 방향성이다. 진화는 방향성이 있다. 진보는 방향성이 있다. 중학생 때 수학을 포기하면 많은 것이 연동되어 결정된다. 갈수록 선택지를 잃는다. 되물릴 수 없다. 한 번 방향이 정해지면 그쪽으로 계속 가게 된다. 무질서도 증가에 의해 선택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축과 대칭의 구조와 포지션이 사라진다.
변화가 모듈 단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일련의 단계적인 결정이 집합을 이룬다.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후속결정이 따르게 된다. 후속결정은 이전결정이 정해놓은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전건이 후건을 제한한다. 기린은 목만 길어진게 아니다. 머리 꼭대기로 피를 보내려면 극단적인 고혈압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양한 기술이 동원된다. 인간은 직립만 하는게 아니다. 직립하면 땅바닥에서 먹이를 구해야 한다. 땅을 파야 한다. 팔의 각도가 달라진다. 오랑우탄과 사피엔스는 어깨 근육이 다르다. 유인원은 매달리기를 잘하지만 멀리던지기를 못한다. 하나의 변화에 연동되어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신체만 변하는게 아니고 본능도 변한다. 지능도 높아지고, 말도 하게 되고, 얼굴도 변한다. 돌아다녀야 하므로 털을 잃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머리카락이 자란다. 다윈의 오류는 변이가 환경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개별적으로 파악한 데 따른 것이다. 기린이 목만 길어졌다고 믿는다. 기린은 목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나무와 풀 중에서 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나무 뒤에는 사자가 숨어 있다. 키가 작은 기린은 사자에게 먹혔다. 방향성은 생태적 지위에 수렴된다. 기린은 사자가 있는 관목숲과 사자가 없는 초원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둘 다 선택하면? 그건 아니다. 초원에는 들불이 일어난다. 홀랑 타버리면 무리 지어 대이동을 해야 한다. 이동하는 길목에 사자가 숨어 있다. 쪽수를 늘려서 대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누떼는 수백만 마리가 대집단을 이루므로 사자와 하이에나의 습격을 이겨낸다. 기린은 키를 키워 관목숲 너머로 사자를 봐야 한다. 키가 작은 기린은 관목에 가려 시야가 차단되므로 사자와 표범을 보지 못한다. 기린의 전략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되는 것이다. 누떼는 사자가 숨어 있는 관목숲을 피해 다니므로 리스크가 없다. 대신 끝없이 이동해야 한다. 몸으로 때우고 쪽수로 때우는 전략이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을 때까지 변이는 계속된다. 성선택은 변이를 가속화 하는 장치일 뿐 변이를 격발하는 방아쇠가 아니다. 결정적인 진화의 방아쇠는 동물의 대이동을 촉발하는 초원의 들불과 관목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자와 하이에나다. 인간의 조상은 정글이 사막화되어 어쩔 수 없이 나무에서 내려온 것이다. 반드시 방아쇠가 있다. 변화는 모듈 단위로 일어난다. 하나가 변하면 이에 맞물려서 수백 가지가 변한다. 경쟁자가 없고 포식자가 없는 안정된 위치를 찾아갈 때까지 변한다. 변이는 균형을 찾아가지만, 그 자체로 불균형을 유발한다. 처음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는 바닷가에 조개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횡재한 것이다. 조개만 주워먹어도 100년은 살겠네. 어느 순간 조개가 바닥났다. 환경변화가 일어난다. 또다른 변이가 요구된다. 변이는 밸런스의 붕괴 때문이다. 밸런스를 찾아가는 변이가 또다시 밸런스를 붕괴시킨다. 이 패턴이 양의 되먹임에 의해 가속화 되는 것이 방향성이다. 도미노처럼 하나가 바뀌면 연쇄적으로 변한다. 한 번 방향성이 정해지면 계속 변이가 일어나야 한다. 대진화는 짧은 시기에 일어난다. 지금은 진화가 거의 정체되었다. 환경변화가 없고 찾아가야 할 생태적 지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빌어먹을 환빠들 때문이다. 우리나라 창조과학회의 본산이 카이스트라고 한다. 환장할 일이다. 한동대학교는 기부금을 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독교 학교로 바뀌어 버렸다고. 과학의 퇴행이다. 사람들이 애를 먹이려고 작정하고 애를 먹인다. 거기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 환자에 쓰이는 칵테일 요법은 중국계 의사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한의학의 방법이다. 원래 양의학은 한 개의 질병에 한 개의 물질만 신약으로 인정한다. 이 때문에 손해본게 많을 텐데 왜 이런 까다로운 규정을 만들었을까? 애를 먹이는 자들 때문이다. 반지성으로 무장하고 온갖 꼼수를 동원하여 작정하고 애를 먹이는 창조과학회들, 무당들, 다단계들, 환빠들, 음모론자들, 괴력난신들은 약이 없다. 이들과 논쟁해봤자 입만 아프다. 과학의 방법론이 없기 때문에 이들한테 당하는 것이다. 양의학은 규정의 허점을 파고들어 작정하고 애를 먹이는 자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일반인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까다로운 규정을 만든 것이다. 한의사들에게 CT촬영을 허용하면 어떨까? 한 번 둑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 이미 효과를 검증할 수 없는 도수치료와 추나요법에 의료보험이 허용되어 온갖 사기가 일어나고 있다. 보험료만 올라간다. 양의학과 한의학을 반반으로 섞으면 어떨까? 우리나라 한의사가 짐바브웨 의사보다 낫잖아. 안된다. 위험하다. 한번 잘못된 길을 허용하면 애를 먹이는 자들이 팔 걷어붙이고 달려든다. 규정의 허점을 노리고 온갖 사기를 친다. 과학의 방법론으로 삿된 무리의 준동을 틀어막아야 한다. 우리는 과학과 주술의 본질적인 차이를 모른다. 방향이 다르다는 점을 모른다. 초기에는 작은 차이로 보이지만 여러 가지가 연동되므로 가속된다. 점점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백하게 보여주지 못하므로 온갖 사기꾼들이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돈이 되는데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
직관적으로 이거다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향성으로 보면 이 방향이 옳고,
코펜하겐 해석은 귀납적인 방향이며, 부분적으로 생각할만한 것들이 있을 지 모르지만. 방향성에서 참이 아니다라고 여겨도 될까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전자구름은 파동을 시각화 하는 아이디어에 불과합니다.
확률은 파동을 숫자로 표시하는 기술에 불과합니다.
존재는 파동이고 파동은 축이 있으며
우리가 존재라 부르는 것은 밸런스의 코어가 되는 축을 말합니다.
우주에는 확률도 없고 전자구름도 없고 단지 애매한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더 좋은 다른 방법이 발견될때까지는 잠정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전자구름에 점을 찍어놓은 것은 그곳에 파동의 밸런스의 코어가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일 뿐입니다.
코펜하겐 해석과 전자구름 모형이 서로 충돌한다는 말씀인지?
둘 중에 하나를 찍으라면 전자구름 모형이 옳고 코펜하겐 해석이 틀렸다는 말씀?
코펜하겐 해석은 학자들이 합의한 최선의 해석입니다.
이런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는 수학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수는 우주 안에 없고 인간끼리의 약속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숫자가 실제로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무한대가 어떻고 허수가 어떻고 하며 목숨 걸고 개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허수가 실제로 있느냐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는게 실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이고 약속이 지켜지면 되는 것이고
허수로 약속을 지키는데 성공하면 그것는 있는 것입니다.
가상의 어떤 지점을 찍었는데 허수를 이용해서 그 지점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면
약속이 지켜지고 결과를 재현한 것이며 재현하면 과학이고 재현에 실패하면 과학이 아닌 거지요.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숫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나 공간은 인간끼리 약속을 지키려고 만든 아이디어입니다.
실제로 시간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시간여행을 한다고 말하면 피곤한 거지요.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시간여행을 해?
수학은 도구이며 도구의 가치는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질서가 수에 백 퍼센트 반영되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인간의 망상입니다.
먼저 제가 성의없이 질문한점 사과드립니다.
양자역학 관련 책을 보면서, 여러 이론들이 일정부분만 담고 있는 부분적인 도출같아서요.
모든 걸 포괄하는 이론의 부재 상황에서 구조론에 의한 접근이 앞으로의 독서에 있어
나침반, 도구가 될 것 같아 질문드렸습니다.
구조론의 연역적 접근엔진으로 맞는 방향은 남겨두고, 아닌 것은 소거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예시는 제 독서흐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자의 모형에서 전자가 도약하듯 그 중간의 좌표가 없이 (혹은 관측불가로) 두문불출 나타나는 이유는
전자의 구름같은 낳음의 바운더리가 있고, 어떤 조건이 있을 시 전자로 변환된다.
> 일단 수학적 증명과는 별개로, 구조론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 맞는 방향
코펜하겐 해석은 이후의 방향이 제시되기 힘들고, 관측이 없으면 달은 없다. 라는 것이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귀납적인 접근이라고 보았습니다. --> 소거
구조론은 입자를 부정하므로
양자역학의 여러 현상들은 구조론과 맞습니다.
입자는 없고 상호작용의 중심점이 있는 것입니다.
관측이라는 표현은 그냥 표현입니다.
물리학자들이 원래 레토릭이 안 되잖아요.
구조론으로 보면 닫힌계인데 외부인의 관측은 열린계입니다.
상호작용의 중심점은 닫힌계 안에서 성립하는데
외부에서 관측하면 열린계가 되므로 내부 상호작용이 깨집니다.
두 사람이 씨름을 하고 있는데 누가 이길지 미리 알아내려면
두 사람의 힘의 중심점의 위치를 알아내면 되는데 그걸 알려면 씨름을 방해해야 합니다.
장님들이 탁구시합을 관측하는데 공이 눈에 안 보이니까 공을 손으로 건드리면 안 되지요.
관측은 잘못된 표현이고 닫힌계 내부 상호작용이 핵심입니다.
관측이 없으면 달이 없는게 아니고 상호작용이 없으면 존재가 없는 거지요.
양자얽힘은 더 높은 세계이므로 인간의 해석은 무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요.
바람이 움직인 것이냐, 깃발이 움직인 것이냐,
아니면 관측하는 인간이, 둘로 이루어진 쌍을 두고, 움직임이라고 의미부여한 것이냐.
> 그게 왜 니 눈에 띄인 것이냐. 가을 타는 거 같은데, 여친이 없어서 외롭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