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가는 어떤 영성 사이트가 있다.
그곳 사이트 관리자와 한 회원 사이의 설전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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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원이 다른 회원을 칭찬하면서 그녀가 게시판의 사람들 중 가장 "진실한the real"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사이트 관리자는 이것이 명백히 게시판의 다른 회원들을 "덜 진실한" 사람으로 만드는 배제이며, 모욕이라고 간주하면서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자 그 회원은 사이트 관리자에게 지금 자신이 칭찬한 대상을 두고 질투하는 거냐고 비아냥 거렸고, 사이트 관리자는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칭찬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과 사랑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이를 무시하는 행위가 서로 모순된 것임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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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매우 흥미로운 대화였다. 저러한 칭찬이 우리가 매우 자주 쓰는 화법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지목하여 칭찬하면서 "네가 여기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해"라고 말하는 것. 하나의 대상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 놓으면서 다른 이들을 자동으로 그 밑에 두는 식의 화법.
너무나 자주 쓰는 화법이기 때문에 그것이 폭력일 수 있음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 개인을 두고 그런 방식으로 칭찬하는 것은 겉보기엔 극찬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분명 한 개인을 둘러싼 관계망에 속한 타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아래에 두는, 한마디로 부당한 위계질서를 만드는 행위이다.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가? 지나치게 까칠한 것일까?
아니다.
영성하면 괜시리 무한히 너그럽고 자비롭고 사람좋고 허허거리고 실실거리는 그런 <바보>같은 사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진짜 영성은 예민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자그마한 폭력이라도, 미묘한 차별이라도 쉬이 넘기지 않는 그런 예민함 말이다.
진짜 영성은 물, 온도, 바람, 햇빛, 토지 등 온갖 것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피는 꽃과도 같다. 영성이란 꽃에게 폭력적인 환경은 사막과도 같다. 사막에서 꽃이 필수 있겠는가? 불가능이다. 운이 좋아 꽃이 한 송이 피더라도 곧 지고만다. 폭력이란 영성이 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말살시킨다. 폭력은 가뭄이며 사막이며 혹한이며 광풍이다. 폭력 속에서 영성은 마르고 시들고 얼어죽고 통째로 뽑혀 나간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주먹이 아니라 혀에서 나온다. 주먹이 입힌 상처는 곧 아물지만 혀가 휘두른 칼이 남긴 상처는 더 오래간다. 칭찬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한 사람을 향한 극찬이 때론 그를 둘러싼 타인들에 대한 배제와 무시가 될 수 있다는 것. 가장 "진실한" 사람이라는 칭찬이, 자신도 모르게 "덜 진실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알아챌 때,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을 때, 영은 좀 더 우리에게 가까이 깃들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최상급 표현을 써선 안 된다. 최상급은 항상 그보다 못한 다른 것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으며, 한 인간에 대한 최상급의 <판단>은 그를 둘러싼 다른 존재들의 가치에 대한 자동적인 <등급 판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인간에겐 등급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한 개인을 두고 다른 개인과 비교하면서 등급을 매기는 것, 그 존재 가치에 위계를 부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심각한 폭력이다.
어째서 폭력인가? 그것이 우리의 존엄을 해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을 졸지에 "덜" 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에 장기간 노출되면 자신이 "덜"한 존재임을 너무나 당연시하게 된다. 이미 세상엔 가장 진실하고, 가장 착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적이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우수하고 등등, 가장 높은 곳을 이미 점유하고 있는 이들로 가득차있다. 그 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누군가보다 못한 존재. 2등, 아니 3등, 아니 4등...... 언제나 존재의 위계에서 정점 아래에 놓여 있다.
그 속에 존엄은 없다. "덜"한 존재는 자신이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예 완전해지기를 포기한다거나, 아니면 <노력>을 통해 완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존재의 위계질서 속에서 지친 이들은 포기하고, 좀 여력이 있는 이들은 노력한다. 그러나 그 결과 존엄을 되찾은 이는 아직 인류역사에서 존재한 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장 신에게 가까운 인간의 존재를 상정한 시대는, 즉 사제계급이 존재하던 시대는, 그 억압과 잔인함, 그리고 폭력으로(마녀사냥을 보라)가장 신에게서 멀어진 시대였다.
무엇이 되었든 비교하면 안 된다. 칭찬을 하고 싶으면 그냥 비교급으로 하지 말고 그냥 담담하게 하라.
누군가의 진실성에 감탄하였다면, "당신은 참 진실한 사람이에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면 된다.
누군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면,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네요"라고 조용히 말하라.
존엄은 비교되지 않음에 있다. 존엄은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에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첫단추이기 때문에 존엄에서부터 비교당하면 그 이후 모든 것이 비교당하게 된다. 그렇게 한 인간은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기준들에 의해 길들여지고 또 길들여져 하나의 제품이 되어버린다. 한 마디로 죽어버린다.
누군가 우리를 놓고 최상급으로 칭찬한다면, 그것을 우리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해도 좋으리라. 그는 우리를 최상급으로 칭찬함과 동시에 우리를 진정 우리로 존재하게 하는 관계망에 속한 타인들을 우리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망이 곧 우리의 존재를 규정한다면, 어떻게 우리보다 못한 존재들과 맺는 관계가 나를 최상급의 존재로 만들 수 있단말인가?
만약 내가 최상급의 존재라면, 나를 나이게 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도 최상급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자유를 가능케 한 나의 가족, 공동체, 국가, 세계, 우주, 역사, 문명, 신, 이 모든 것이 최상급의 자유를 구현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의 노예라도 존재하는 한 나의 자유는 여전히 최상급의 자유가 될 수 없다. 진짜 최상급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최상급의 칭찬은 마땅히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향해야 한다. 모든 존재가 존엄함을 밝히는 것이 진정한 최상급의 칭찬이다. 그런 면에서, 부처와 예수는 인류 전체에게 최상급의 칭찬을 한 바탕 퍼부어주고 간 이들이다. 부처같은 경우엔 아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칭찬해줬고, 예수는 너희가 신이라고 칭찬해줬다. 유아독존이니 비교할 필요없고, 전부가 신이니 존엄을 다툴 필요가 없다.
간혹 한 인간을 놓고 누가 더 존엄하나, 위대하나, 훌륭한가, 아주 컨테스트를 벌이는 경우가 있다. 부처와 예수의 위대함을 놓고 다투는 이도 있고 노무현과 김대중 대통령을 두고 그 훌륭함의 서열을 매기려는 바보들도 있다. 그렇게 누군가를 최상급에 놓고, 자신을 그 밑에 두면서 만족하고 자신보다 낮은 이들을 경멸하는데서 만족을 구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진정 존엄한 이라면 누가 더 위대하고, 누가 더 훌륭하고, 누가 더 가치있는 존재인가 따위의 문제로 다투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자를 가지며 그 자는 오직 자신만을 잰다. 그 자는 바로 존엄성이다. 인간의 정신은 오직 존엄의 잣대로 판정한다. 존엄하면 정신차린것이고 존엄하지 못하면 정신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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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김동렬의 책 "마음의 구조"를 읽고 삘을 받아 썼다.
구조론이 밝힌 마음은 존엄으로 출발하여 존엄으로 끝난다.
누구나가 다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진정 왜 그러한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존엄이 바로 그러하다. 누구나 다 인간은 존엄하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마음의 출발지점이 되는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못하다.
종교가 바로 이 존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만, 그들이 구현한 종교조직은 성직자라는 계급을 두고 헌금이라는 세금을 걷고 교리라는 염산을 두뇌에 부어서 존엄으로 향한 길목을 차단하고, 정신을 삼천포에 빠뜨려 신의 완전성을 가리고 있다.
책 "마음의 구조"는 존엄을 말한다.
부처와 예수가 인류에게 퍼부은 칭찬을 2000년 뒤에 다시 되풀이했다. 이번엔 책 한 권 분량으로 칭찬했다.
대체 무슨 칭찬을 했는지 보고 싶으면 책을 사서 읽어보라.
아주 멋지오. 감동했소
동의. 존엄(보통 자부심으로 표현되는)을 발견하지 않고는 진도가 못나가오.
자존을 잃으면 칭찬으로 비교하고 시비걸고 딴지걸고 꼬투리잡소.
마음에 열패감이 가득하면 저절로 폭력성이 배어져나오는것같소.
세상에서 젤 나쁜건 포장된 폭력, 둔감한 폭력..
존엄은 단순한 존중이 아니오. 막연한 찬사나 훈장은 아니오. 존엄은 1초만에 달성되기도 하고, 평생 도달 못하기도 하오. 존엄은 한 마디로 '반응' 하는 것이오. 왕자나 공주는 태어날때부터 존엄하오. 그야말로 1초만에 존엄해진 것이오. 왜냐하면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하면 모두가 '예 나으리!' 하고 반응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목놓아 불렀는데도 세상의 대답이 없으면? 내 기도에 신이 응답하지 않으면? 모두가 등 돌리고 나를 배반하면?
민감한 센서를 얻어야 하오. 자연이 반응하는 것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하오. 아침공기와 저녁공기의 무게가 어떻게 다른지 느낄 수 있어야 하오. 오전 11시에 발생한 해풍이 오후 1시에 서울을 지나 오후 4시에 제천에 도달하여 여우비를 만드는 것을 느끼고 거기서 인천앞바다 소식을 들을 수 있어야 하오. 작은 풀꽃들의 하소연을 들어낼 수 있어야 하오. 바람소리만 듣고도 악보가 쏟아져 나오는 음악가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오. 1천개의 나뭇잎이 바람에 떠는 소리가 하나의 바람소리가 아닌 와글와글 하는 1천개의 제각기 목소리로 들어내야 하오. 자신의 몸이 반응하고, 마음이 반응하고, 영혼이 반응하고 인생이 반응해야 하오. 튀니지 혁명이 튀니지의 일이 아니어야 하오. 내 안에서 물리적으로 반응해야 하오. 세상과 내가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 세상의 작은 변화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10미터 앞을 지나가는 여인의 가슴크기에만 눈이 동그래져서 반응하지 말고 세상 모든 것의 반응을 바로 들어낼 수 있어야 하오. 세상과 내가 하나로 된 느낌을 얻어야 하오. 반응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오. 신의 목소리를 들어낼 수 있어야 하오. 신의 친구자격을 얻어야 하오.
이동네에서 니 똥이 제일 굵다. 뭐 그렇게 들려서 칭찬도 아닌것 같은데..
명박이가 대통하는 세상에서 뭐 그런걸로 싸운담.
완전 산으로가는 서평을 써보았소.
마음의 구조랑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듯한 이야기를 끌고와 마음의 구조가 강조하는 존엄의 문제를 언급하는 식으로 써보았소. 낚시서평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계획이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