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는 법法에 술術과 세勢를 더했다. 법, 술, 세를 열거하면 피곤하고 한 줄에 꿰어야 한다. 구슬을 실에 꿰려면 우선순위를 알아야 한다. 세-법-술이 옳다. 세는 법의 전제조건이다. 법은 술의 전제조건이다. 세가 없으면 법을 지키지 않는다. 법이 없으면 술을 구사할 수 없다. 술은 임금의 통치술이다. 법은 임금의 통치술이 먹히게 판을 짠다. 세는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둔다. 술이 요리사의 솜씨라면, 법은 요리사의 칼이고, 세는 요리사가 그 칼을 쥐는 것이다. 기술이 있어도 칼이 없으면 실패다. 칼이 있어도 칼을 손에 쥐지 못하면 실패한다. 세 - 권력(주체).. 칼을 쥔다. 법 - 도구(매개).. 칼의 날을 세운다. 술 - 기능(객체).. 칼을 사용한다. 세는 권력을 조직하고, 법은 권력을 매개하고, 술은 권력을 조절한다. 세로 자원을 끌어모아 법으로 힘을 전달하고 술로 객체를 다스린다. 세, 법, 술을 현대 용어로 바꾸면 권력, 도구, 기능이다. 권력은 주체, 도구는 매개, 기능은 객체다. 주체에서 매개를 거쳐서 객체로 간다. 실사구시 인간은 환경 속의 존재다. 인간과 환경을 분리할 수 없다. 총과 총알을 분리할 수 없고, 활과 화살을 분리할 수 없고, 우주와 인간을 분리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은 불가분이다. 주체와 객체는 불가분이다. 구조주의는 세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일의 연결이다. 환경이 먼저다. 그 환경 안에서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환경에 대해 힘의 우위에 서고, 마침내 객체를 다룰 수 있다. 성과는 그 다음이다. 환경-인간-매개-행동-성과로 일은 진행되니 마침내 구슬이 실에 꿰어진다. 환경-인간-매개-행동-성과 서구의 사고는 비현실로 도피한다. 플라톤과 기독교가 말아먹은게 중세의 암흑시대다.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를 추구한다. 그래서 망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수학과 표음문자 덕에 서구는 살아났다. 새옹지마와 같다. 환경이 변하자 단점이 장점으로 바뀐다. 중국은 실사구시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내세는 관심이 없다. 중국인은 돈을 밝히고 불로장수를 추구한다.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다. 수학의 낙후와 표음문자의 부재로 망했다. 역시 새옹지마다. 당장의 장점에 안주할 뿐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서구는 워낙 먹을게 없어서 현실도피로 갔지만 현실을 떠나서 다른 것을 찾다보니 신대륙을 발견했다. 중국은 워낙 먹을게 많아서 현실에 집착했다. 현실에 집착하다보니 바깥세계를 탐험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서구문명이 이겼지만 사실은 운이 좋았다. 마키아벨리가 서구에서 처음으로 현실문제를 고민한 사람이다. 전쟁이 거듭된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은 현실적이었다. 전쟁을 종교인의 기도나 플라톤의 관념론 철학으로 이길 수 없다. 분열된 서구는 전쟁 덕분에 흥했고 통일된 중국은 평화 때문에 망했다. 동양인의 구조주의적 사고는 종횡가, 법가, 풍수가, 병법가, 유가에 조금씩 반영되어 있다. 이들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현실적 수단을 추구한다. 세상을 움직인는 지렛대를 찾는다. 반면 서구는 평화, 사랑, 행복, 쾌락, 구원, 해탈과 같은 관념으로 도피한다. 목적주의 구조론은 통합적 사고다. 서구의 관념론은 이분법적 사고다. 그들은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서로를 밀어낸다. 구조론은 선진보 후보수로 우선순위를 정한다. 머리가 앞서가고 꼬리가 따른다. 활이 먼저고 화살은 다음이다. 서구는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배척한다. 서구의 목적론적 사고가 위험하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순간 개소리가 된다. 나는 이곳에 있고 나의 목표는 저곳에 있으며 이곳을 떠나 저곳을 바라보는 순간 잘못되고 만다.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고 너와 내가 분리된다. 목적론이 모든 실패의 근원이다. 목적론은 인간의 행위가 어떤 목적이나 동기에 지배된다는 믿음이다. 악을 지양하고 선을 권장하니 권선징악이다. 불행을 지양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증오를 반대하고 사랑을 추구한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식의 대립적 사고가 실패를 낳는다. 사랑, 행복, 평화, 이상, 구원, 쾌락, 성공, 명성, 신분상승 같은 목적을 제시하므로 망한다. 목적은 선한 목적 혹은 악한 목적이다. 대개 도덕론으로 흘러간다. 도덕론은 사람을 꾸짖다가 끝난다. 문제의 해결은 없고 단지 사람을 비난할 뿐이다. 스트레스 전가다. 서구정신이 잘못된 이유는 인과율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로 나눈다. 원인의 위치에 동기, 목적, 도덕 따위 관념을 집어넣는다.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단어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절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구조론은 원인과 결과를 연속적인 과정으로 본다. 인과 오류 = 원인 <- 나 -> 결과. 관측자가 중간에 서면 이원론으로 대립된다. 구조 진실 = 나 > 원인 > 결과. 관측자가 선두에 서면 일원론으로 통합된다. 활과 화살은 대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연속적이다. 머리와 꼬리는 대립되지 않는다.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가는 것이다. 진보가 보수를 끌고 간다. 선이 명중하지 못하면 그것이 악이다. 선과 악이 대립하는게 아니라 오로지 선의 명중과 오발이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있는게 아니라 삶의 진행과 종결이 있다. 삶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삶이 끝나고 죽음이 새로 시작되는게 아니라 삶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다. 우리가 인과의 사고를 버리고 기정奇正의 사고를 얻어야 한다. 인과는 대립이지만 기정은 연속이다. 음양, 허실, 동정, 유강, 기정은 하나의 활과 화살이다. 음의 활이 양의 화살을 쏜다. 활은 유연하게 휘어져서 변해야 좋고 화살은 곧아서 변하지 말아야 좋다. 허가 실을 쏜다. 동이 정을 쏜다. 유가 강을 쏜다. 기가 정을 쏜다. 하나의 깔때기에서 입구와 출구다. 왜 음양, 허실, 동정, 유강, 기정은 모두 변화가 앞에 붙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양음, 실허, 정동, 강유, 정기라는 말은 없다. 중국인은 원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의 기관차가 불변의 객차를 이끈다는 사실을. 변화의 진보가 불변의 보수를 끌고 간다는 사실을. 이념놀이 세상을 한 단어로 말하면 구조다. 두 단어로 말하면 기-정이다. 세 단어로 말하면 세-법-술이다. 다섯 단어로 말하면 이상주의, 권위주의, 도구주의, 기능주의, 성과주의다. 여러가지 이념을 주장하지만 코끼리는 한 마리다. 장님이 여러 신체부위를 각각 만져보고 다르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과로 이해한다. 인과에 순서는 있는데 방향이 없어 분리되는게 문제다. 세상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다. 머리는 꼬리를 아우른다. 전체는 부분을 아우른다. 공은 사를 아우른다. 진보는 보수를 포함한다. 활은 화살을 포함한다. 활이 있으면 화살도 있는 것이다. 기정은 진보와 보수, 변화와 안정, 동과 정, 유와 강, 허와 실로 확장되며 방향을 제시한다. 유는 움직이고 강은 멈춘다. 움직임은 멈춤보다 크다. 범위가 좁혀진다. 진보는 움직이고 보수는 멈춘다. 움직이는 쪽이 크다.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을 담아 세상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주의 - 환경변화에 주목하고 거대한 방향전환을 꿈꾼다. 모든 것의 시작은 환경변화다. 환경이 변하므로 대응할 수 있는 이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때 먼저 가서 구조를 선점한 사람과 뒤늦게 가서 다단계에 속는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이상주의로 가면 설계를 잘해야 한다. 신대륙에 가면 이렇게 할거라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운다.
합리론 - 신대륙에 가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야지. 신대륙에 도착하면 다 필요없고 무조건 물량을 많이 때려박아서 하부구조를 착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경험론으로 가고 실용주의로 간다. 그것은 일의 진행단계가 결정한다. 신대륙에 가본 사람과 아직 못가본 사람의 차이다. 가본 사람은 먹히는 하나에만 집중한다. 조절장치 약자는 선택하려고 하고 강자는 조절하려고 한다. 주는 사람은 조절하여 주고 받는 사람은 선택하여 받는다. 운전기사는 속도를 조절하고 승객은 좋은 자리를 선택한다. 우리가 망하는 이유는 조절하지 않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선택으로 보는 약자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 적장자로 성공한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중에 제대로 임금노릇을 한 사람은 숙종 밖에 없다. 대부분 질병에 걸리거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일찍 죽었다. 적장자는 좋은 선택이지만 조절되지 않는게 문제다. 조선왕조의 명군들은 대개 적장자가 아닌데 서너명의 경쟁자 중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즉 조절된 것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문제도 선택이 아니라 조절의 문제다. 조선초는 정난공신들의 득세로 신권이 강했고 말기에는 세도정치로 외척들이 득세해서 왕권이 약했다. 좋지 않다. 성종, 연산군, 중종, 인조, 철종, 순조, 고종은 왕권이 약해서 망했다. 연산군은 왕권을 강화하려다가 폭주했다. 제갈량이 뛰어났지만 서촉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왕이 멍청한데 신하가 잘한다는건 환상이다. 실력자가 권력을 차지하면 군인정치로 가서 무신정권의 혼란이 계속된다. 정통성을 부정해도 안되고 정통성에 갇혀서 바보를 왕으로 세워도 안 된다. 신권이 강해도 안되고 전제권력이 출현해도 안 되고 실력자가 힘으로 먹어도 안 된다. 적절한 균형과 물갈이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 뿐이다. 긴밀한 상호작용이 정답이다. 계속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 긴장을 풀어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다가 망한다. 이상적인 제도는 원래 없고 집단이 긴장을 유지하는게 중요하다. 선택하지 말고 조절해야 한다. 이상적인 제도가 있다는 생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것이며 긴장을 놓아버리려는 것이다.
사람을 비난하면 안 된다. 도덕론은 사람을 비난하는 비겁한 짓이다. 진보와 보수는 선택이 아니라 속도의 조절이다.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리려는 생각이 위험하다. 둘이 공존하되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한다. 진보는 앞장서서 길을 열고 보수는 뒤에서 간격을 조절해야 한다.
오너가 먹으면 멍청한 오너 때문에 망하고 전문경영인을 세우면 대주주 등쌀에 망한다. 정당이 난립해도 망하고 일본처럼 자민당이 독주해도 망한다. 선택이 편하지만 스트레스 회피다. 조절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강체는 선택되고 유체는 조절된다. 유체의 눈을 얻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