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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84 vote 0 2010.09.14 (22:33:05)

 

 

  지식인과 지성인

 (이어가는 글, 부분적으로 옛글과 중복됩니다.)

  일찍이 논객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때는 노무현 논객의 집권시절이었다. 사방에서 논객이라는 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저마다 세치 혓바닥을 놀려 짓까불며 함부로 떠들어대기를 마치 타작마당에 참새떼 달려들듯 하였다. 강준만을 필두로 진중권, 홍세화, 오연호, 유창선, 손석춘, 손호철, 김동민, 김규항 등의 이름이 얼핏 생각나고 김어준 등을 위시하여 네티즌 논객도 많았다. 그 대강은 대논객 노무현을 씹는 것이었다. 논객이라고 이름은 그럴듯 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의미없는 증오의 배설에 다름 아니었다.

 

  노무현 논객에 대한 질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되었다. 그들이 증오하던 노무현은 떠났다. 숙주가 사라지자 기생충들도 죽었다. 노무현을 씹어서 하루를 연명하던 그들, 노무현이 쓰러지자 덩달아 죽어갔다.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며 그들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기어이 논객의 씨가 말랐다. 마침내 천하에 논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의 전성시대가 노무현 논객이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 펼쳐진 것이었으며, 그 무대에서의 어설픈 재롱잔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물론 대통령을 옹호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중에 논객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주류무대에서 활약하는 자는 없다시피 하였으며 그것은 변방의 작은 몸짓에 불과했다.)

 

  모두 죽었다. 오마이뉴스 죽고, 프레시안도 죽고, 한겨레도 죽고, 경향도 죽고, 민노당도 죽고, 진보신당도 죽었다. 빛고 생기를 잃었다. 맥박을 잃고 기세를 잃었다. 존재감이라곤 없는 희미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이 왜 태어났고, 또 그렇게 잊혀져야만 했던지를. 지금도 모른다. 앞으로도 모른다. 영원히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애초에 눈과 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없는 눈과 귀를 논객 노무현으로부터 빌어 썼던 것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사라지니 할 말도 없어져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 죽고 평화가 왔다. 시끄럽게 하던 논객이 사라지니 세상이 조용해졌다. 이명박 지지율 올랐다.

 

  음울한 날씨, 계속되는 침묵! 자살, 죽음, 삽질 외에 뉴스가 없다. 그들은 오래 우울해 했다.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코미디는 웃기지 않게 되었고, 가수들은 노래하는 대신 허벅지나 들어올리는 처지로 되었고, 극장가에는 잔혹극 밖에 없게 되었다. 감독은 개봉하지 않고 시인은 펜을 꺾었다. 문화가 죽고 없어진 자리에 빈 완장 하나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 뿐이었다. 한번 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끝났다. 세월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무대 위에서 다시 역사의 진군을 시작한다. 언젠가 좋은 시절이 돌아온다 해도 그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

 

  춘추를 회고한다. 그때도 논객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평원군, 맹상군, 신릉군, 춘신군을 그 시절의 4군자로 칭한다. 각기 수천 식객을 모아 널리 지혜를 구하여 목공 이후 강력해진 진나라를 400년간 방어했다. 여기에 이들을 흉내내어 질세랴 천하의 식객을 모아들여 여씨춘추를 편집한 여불위를 추가할 수 있다.

 

  결국 그들도 모두 죽었다.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논객들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사와 상앙, 한비들이다. 한비자의 ‘세난’은 읽어볼만 하다. 역설적인 깨우침이 있다. 세난(說難)이라! 말 그대로 ‘논객질의 어려움’이다.

 

  법가들이 군주를 찾아 유세한 내용은 첫째 강력한 법을 세워서 일단 말 많은 논객들부터 처단하고 보라는 것이었다. 논객들이 합종책이다 연횡책이다 하며 저마다 전략을 떠들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니 논객을 제거해 버리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한 것이다. 진왕 정은 그 가르침을 성실히 받아들여 일단 말 많은 한비자부터 독살시켰다.

 

  문제는 한비의 ‘세난’에 바로 그 대목이 나온다는 점이다. 마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듯한. ‘세객이 군주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간언하면 군주는 그 내용을 취하고 그 간언한 자를 죽인다’는 대목이 있다. 불행하게도 한비는 자신의 예견이 딱 들어맞아 죽었다.

 

  논객 이사는 시장터에서 허리를 잘려 죽었고, 논객 상앙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논객이라 했지만 그 당시 용어로는 식객, 세객, 빈객이다. 파당을 결성하고 공론을 일으키는 유자를 쓸어버리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여 세상을 조용하게 만들라는 것이 법가주의 논객의 대표적인 주장이었으니 죽을 만 하다. 한비여!

 

  ‘한비, 너는 네가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죽고 난 다음에라도 알았을까?’

 

  법가들은 있는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까를 생각할 뿐, 없는 에너지를 어디서 끌어올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담을 둘러쳐 외부를 막아놓고 내부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갈된 에너지를 밖에서 끌어오려면 담을 허물어야 한다. 한국 논객들의 뻘짓도 비슷하다. 있는 것의 사용을 생각할 뿐, 창의하여 없는 것을 발생시키고 혁신하여 외부에서 끌어올 생각은 못한다. 가치의 창출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없고 이미 성립하여 있는 가치를 요리조리 끌어댈 궁리만 한다. 그게 소인배의 잔꾀다.

 

  변혁의 에너지는 언제라도 밑바닥의 대중에게서 나온다. 논객들은 군주의 '있는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까를 생각할 뿐, 없는 대중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까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있는 권력 노무현을 씹어 권력행사를 자기네 뜻대로 하려 했다. 노무현이 떠나자 그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진시황 이후 논객의 전성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제자백가는 모두 죽었다. 그것은 아득한 옛시대의 전설로 되었다. 21세기의 한국도 마찬가지다. 다시 논객의 전성시대가 올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논객은 완전히 끝났다. 그것은 모두 구만리 창천을 날아가는 노무현이라는 붕새의 그림자였다.

 

 

  한비자의 세난

 

  “논객질하기 어렵다. 세객의 어려움은 지식이 모자라 상대를 설득시키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고, 변설이 약해 자신의 주장을 밝히기 어렵기 때문도 아니며, 용기가 부족해 감히 할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세객의 진정한 어려움은 군주의 심중을 미리 파악해서 내 주장을 거기에 적중시키는데 있다. (군주가 논객을 등용함은 실은 사전에 결정되어 있는 군주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하여 논객의 타이틀을 싣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논객은 올바른 의견을 가지고 군주를 잘 설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과 같은 생각을 가진 군주를 잘 찾아내야 한다.)

 

  명성을 탐하는 군주에게 세속의 이익을 강조했다가는 천박한 인물로 취급되기 십상이며, 반대로 이익을 탐하는 군주에게 명성을 권했다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얼치기로 치부되어 경멸을 당한다. 또한 속으로 이득을 원하면서도 겉으로 명성을 말하는 군주에게 명성을 권하면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멀리하며, 또 이익을 권하면 그 주장을 속으로 취한 뒤, 그렇게 주장한 자를 버린다. 만사는 은밀히 진행됨으로서 성취하고 말이 새나감으로써 실패한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이 마지막에 누구의 공훈으로 되는지가 중요하다.)

 

  세객이 군주의 비밀을 들출 의도가 없으면서도, 모르고 군주의 비밀을 언급하면 신상이 위태롭다. 군주의 잘못이 엿보일 때 그 과오를 들추면 논리가 정당하더라도 세객의 목숨은 위태롭다. 군주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지혜로 설득하면 설사 군주가 세객의 설을 실행하여 크게 성공했다 하더라도 군주는 세객의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실행하여 실패했을 경우에는 의심을 받아 역시 목숨이 위태롭다. (논객에게 공적이 있다고 해서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을 주는 것이 군주에게 더 큰 이익이 될 때에만 군주는 상을 내린다.)

 

  세객이 군주앞에서 명군, 현주 따위를 논하면 군주는 자신을 헐뜯는 것으로 오해한다. 세객이 어리석은 자를 비판하면 군주는 세객이 남을 헐뜯어 제 장점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으로 오해한다. (절대경로와 상대경로가 있다. 절대경로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고, 상대경로는 비교대상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상대경로를 취하면 반드시 반작용이 일어나며, 그 해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과거의 사례와 비교하든 현재의 누군가와 비교하든 모든 비교설명은 좋지 않다. 비교할 일이 없는 절대경로를 취해야 안전하다. 그것은 혁신과 창의밖에 없다. 있는 것 중에서 선택할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새로 들여와야 한다.)

 

  군주가 총애하는 자를 칭찬하면 아부한다며 경멸하고, 미워하는 자를 비판하면 얼마나 그자를 미워하는지 시험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군주는 논객의 말 내용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과연 우리편인지에 관심이 있다.)

 

  말을 간결하게 하면 무식하다며 무시하고, 광범위한 예증을 들어 설명하면 싫증을 낸다. 사실에 입각하여 조리있게 설명하면 소심한 자로 낙인찍히고, 단도직입적으로 거침없이 말하면 예의없이 거만한 촌놈으로 낙인찍힌다.

 

  무릇 유세의 요령은 군주의 장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건드리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송나라에 한 부호가 있었는데, 어느날 비가 내려 담장이 무너졌다. 그때 그 부호의 아들이 말하기를 ‘지금 다시 담을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든다’고 했다. 그 무렵 지나가던 이웃집 남자도 아들이 한 말과 같은 말을 했다. 과연 그날 밤에 도둑이 들었다. 부자는 아들의 선견지명을 칭찬했지만 한편으로 조언을 해준 이웃집 남자를 의심하여 도둑으로 몰았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나라 무공이 속으로는 오랑캐를 칠 계획을 품었으나, 먼저 공주를 오랑캐의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나서 신하에게 어떤 나라를 치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대부 관기사가 오랑캐를 치라고 주장하자 무공은 ‘형제국을 치려했다’ 하여 관기사를 사형에 처했다. 그 소문을 들은 오랑캐는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결국 정나라의 침략을 받고 나라를 빼앗겼다.

 

  예의 이웃집 남자와 관기사의 의견은 모두 정당했으나 누구는 도둑 누명을 썼는가하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는 사물의 진상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더 어렵다는 뜻을 웅변한다. (일이 진행되는 단계에서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최종적인 마무리가 중요하다. 뒤끝없는 완전한 해결을 하려면 그 단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단계와 다음다음 단계의 대책까지 감추고 있으면서 패를 하나씩 까보여야 한다. 한꺼번에 자신이 가진 패를 전부 까보이면 저승사자의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위나라 영공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 미자하가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임금의 명령을 사칭하여 왕의 수레를 몰래 몰고 나갔다. 당시 위나라 법에는 허가없이 임금의 수레를 탄 자는 다리를 자르는 형벌인 월형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영공은 그 월형을 감수하면서까지 효성을 다했다 하여 도리어 미자하를 칭찬했다. 또 하루는 미자하가 임금을 모시고 과수원에 들어갔다가 맛있는 복숭아를 한입 베어먹다말고 영공에게 올렸는데 영공은 미자하가 제 입맛을 참고 임금에게 복숭아를 올렸다고 칭찬하며 더욱 사랑을 베풀었다.

 

  훗날 용모가 쇠해져서 군주의 사랑을 잃었을 때 미자하가 사소한 죄를 짓자 영공은 ‘이놈은 일찍이 나를 속여 수레를 탔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먹인 놈’이라며 이제까지의 죄를 몰아서 벌주었다. 유세하려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느냐 미워하는가를 먼저 살핀 후에 해야한다. 옛 이야기에 이르기를 용이라는 짐승은 길들이면 등에도 탈 수 있으나 다만 목에 붙은 한 자 가량의 역린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물어죽인다고 한다.” (김병총의 '사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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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 진행되는 중간 단계에서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과정의 향방을 결정하는 즉 에너지의 흐름이 중요하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치판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자기논리로 작동하는 에너지의 역동성 개념을 모르면 논객은 계속 오판할 뿐이다.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풀어가는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다. 물적 토대의 혁신에 기초한 자연적인 흐름을 만들고 거기에 기세를 태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회성의 작업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단계와 다음다음단계가 계속 나와주는 바 지속가능한 시스템의 건설 형태가 되어야 한다.

 

  한무제 때의 재상 급암은 노자의 무위사상에 따라 ‘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한무제의 유교노선을 따른 혁신이 많은 부작용을 낳을 것을 경고했지만 결국 역사는 그 방향으로 가버렸다. 문제는 급암의 경고가 맞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경고대로 무수한 부작용이 일어나 천하는 혼란해졌다. 한무제는 동쪽으로 고조선을 치고, 서쪽으로 흉노를 치고, 남쪽으로 베트남을 치고, 한편으로 서쪽을 개척하여 중경과 성도에 진출하면서 좌충우돌 하다보니 백성들의 세금은 날로 무거워지고, 변경의 백성들은 모두 부역에 끌려가게 되어 도처에서 변란이 일어났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방향으로 계속 굴러가는 것이었다. 공손홍, 장탕 등 유가와 법가노선을 따른 학자들이 부국강병식 개혁을 주도하는 한편 소금과 철의 전매를 추진하면서 경제를 크게 일으켰기 때문이다. 더 큰 정부, 더 많은 정부역할, 더 많은 세금, 더 많은 형벌, 더 고된 부역, 더 많은 법률로 천하는 흘러갔다. 이는 사람의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큰 흐름이다.

 

  급암은 세상이 시끄러워질 것이라 예언했고 실제로 세상은 시끄러워졌지만 맞는 말씀이라도 역사의 진보 앞에서는 허무한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개념 좌파들은 노상 쇄국을 주장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은 개방화로 치닫고 있다. 이는 홍수와 같은 거대한 흐름이라서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큰 물은 둑을 쌓아 막지 못하고 반대로 물꼬를 터서 다스릴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고질라의 질주를 인력으로 막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며, 그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다스려야 한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대통령 말씀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 대세의 흐름을 따라갈 때 계속 다음단계가 나와서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건설된다. 유가는 많은 법과 형벌과 제도와 세금으로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경제가 발전하여 계속 변화에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역사의 진보는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인위로 멈출 수 없으며 그 화살의 진행방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오직 혁신과 창의로만 문제의 해결은 가능하다. 그러나 논객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둑을 넘어오는 물을 호미로 막는다 가래로 막는다 다투며 세치 혀로 세상을 어지럽게 할 뿐이다.  

 

  평원군, 맹상군, 신릉군, 춘신군 사군자에다 여불위까지 5대 세력가를 따르는 수만 식객은 모두 죽었다. 그들은 근거지를 잃었다. 왜냐하면 자기네가 기생하여 붙어먹던 숙주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양식이나 축내고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인 식객들을 모조리 없애서 국가기강을 확립해야 부국강병이 가능하다는 변설이야말로 군주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좋은 정책인 것이며, 그들은 현명하게도 이를 군주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자기네 발등을 찍은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식인들은 제 발등 찍기에 분주하다. 무엇인가? 그들은 군주에게 의존하지 말았어야 했다. 군주가 내려보내는 밥을 거부했어야 했다. 자기네들끼리 연대하여 독립적인 세를 이루었어야 했다. 그렇게 실천한 사람이 있다. 일찍이 3류식객으로 출발했으나 마침내 이를 초월하여 태산을 넘고 북두에 이른 이가 있다. 그는 대논객 공자다. 공자도 한때 군주에게 유세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긴 했으나 실패하여 10여년간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굶어죽을 위기와 맞아죽을 위기를 여러차례 넘기고 제자를 길렀다. 유세가로 성공한 이는 공자 뿐이다. 그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시스템은 다음 단계와 다음다음 단계에 계속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한꺼번에 패를 전부 까지 않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며 지속적인 대응을 가능케 한다. 그것이 집단지능의 힘이다. 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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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 비견할만 하다. 동양에 한비자가 있다면 서구에 마키아벨리가 있다고 하겠다. 한비자의 세난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공통적으로 군주의 잔인함과 냉혹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실제로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비자의 세난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군주'를 지우고 '대중'으로 바꾸어도 뜻은 그대로 통한다. 군주론은 동시에 대중론이다. 군주에게만 역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역린이 있다. 군주가 세객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취한 다음에는 돌연히 마음을 바꾸어 그 세객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도 지도자로부터 원하는 것을 취한 다음에는 돌연히 마음을 바꾸어 그 지도자를 버린다. 대중의 변덕을 노무현 대통령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명박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그는 이미 역린을 건드렸다.

 

  군주가 세객의 공적에 따라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을 주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상을 주듯이, 대중도 훌륭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임할 가치가 있을 때만’ 권력을 위임한다. 한비자가 ‘논객의 진정한 어려움은 상대의 심중을 미리 파악해서 내 주장을 거기에 적중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했듯이 정치인의 어려움 역시 대중의 심중을 미리 파악해서 내 주장을 거기에 적중시키는 데 있다.  

 

  대중은 옳고 유능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임할것인가를 내심으로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 옳고 그름을 찾아 구색을 맞춘다. 사전에 결정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추어 옳은 점과 그른 점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정치인의 기세가 올라가는 흐름에서는 백가지 악재가 터져도 명박의 BBK처럼 다시 살아나고, 영삼의 초원복집 사건처럼 거뜬하게 살아난다. 반대로 기세가 떨어지는 흐름에서는 사소한 잘못으로도 큰 화를 입게 된다. 회창의 호화빌라나 병역문제는 명박의 그것에 비하면 사소하다 하겠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군주가 원하는 것은 통치의 편의인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이 원하는 것은 본질에서 의사결정의 편의다. 대중이 판단하는 것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다수가 승복하여 과연 그 길을 따라오느냐 혹은 그렇지 않으냐다. 그러므로 영삼과 명박은 백가지 악재가 터져도 살고 이회창은 한가지 악재에도 훅 가고 만다.

 

  군주가 냉혹할 뿐 아니라, 대중이 변덕스러울 뿐 아니라, 논객들 역시 비열하다. 군주가 통치의 편의를 추구하듯, 대중이 의사결정의 편의를 추구하듯, 논객들의 세계 역시 변설의 생리를 따른다. 작동하는 법칙이 있다. 맹상군이 재상에서 짤리고 어려워졌을 때 삼천 식객이 다 흩어지고 단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한다. 친노논객들이 비노니 반노니 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때가 생각난다. 논객들은 잘난척하며 입바른 소리를 지껄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할 뿐, 그것이 밑바닥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 일을 풀어가는 정당한 절차인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은 에너지 규모가 결정한다. 에너지가 어디서 들어오고 나가는지가 중요하다. 기세를 타고 방향성을 얻어 흐름을 잡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방향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을 풀어가는 방향을 잡아갔고 지금에 와서야 결국 당신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논객들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느라 결국 숙주를 죽이고 말았다.

 

  거지가 죽으면 이들이 하얗게 흩어진다. 군주는 비열하다. 대중은 배반한다. 논객은 어리석다. 옳은 것은 오직 역사의 맥박 그 자체 뿐이다. 그래도 역사는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사는 오직 에너지가 가는 방향으로만 가기 때문이다. 군주는 명성을 탐하는 척 실제로는 이익을 탐하며, 대중은 옳은 정치인을 탐하는 척 하며 실제로는 의사결정의 편의를 추구하여 명박을 찍으며, 논객은 사리를 따지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대중을 입맛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입지를 추구하여 결국 자기가 밟고 올라선 발판을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역사가 가는 방향성이다. 역사는 오직 에너지가 있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왜? 그 에너지는 혁신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혁신은 의로운 사람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바보를 속일 뿐 아니라 성실한 사람도 속인다. 그러나 혁신하는 자는 속이지 못한다. 천하의 군웅들이 일어나고 쇠퇴했으나 그들이 쌓아온 혁신은 줄기차게 흐름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혁신과 창의에는 반드시 다음단계와 다음다음단계의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부단히 대응하기 때문에 배신할래야 배신할 수가 없다. 패를 전부 까지 않기 때문이다.

 

  맹상군은 좌절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났다. 침뱉고 떠난 3천식객 원망하지 않고 다시 불러들여 예전과 똑같이 대접했다. 왜? 그래도 역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단계와 다음다음 단계의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항해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부류가 있다. 밖에서 에너지를 끌어오려는 그룹과, 내부에서 에너지를 소비하려는 그룹이 있다. 전자는 진보 쪽에 서고 후자는 보수 쪽에 선다. 대중은 양자 사이에서 끝없이 변덕을 부린다. 이념이 어떻든 역사의 참된 주인은 혁신하는 자다. 날로 새로워지는 자다. 우일신 하는 자다. 좋을 때는 좋은대로 말타고 가고, 어려울 때는 어려운대로 기어서라도 간다. 우리는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역사의 거친 호흡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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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의 한비자의 공통점은 근대성을 드러낸데 있다.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보통은 옳고 그름을 논하고, 대의명분을 논하고, 거기에 신을 끌어들인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이 대의명분에 맞기 때문에, 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모든 주장은 빗나가고 만다. 급암은 바른 주장을 폈고 실제로 그의 말대로 되었지만 결과는 허무해지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지만 역사는 도도한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구한말 일본에도 생각있는 정치가들은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치지 않고 동양삼국이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입바른 말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군부 내의 젊은 야심가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치인 중에 군부의 야심가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듯이 전쟁을 향해 치달았다. 불길한 질주를 멈추지 못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제 3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질은 연이은 패전에 따른 민중의 분노였으며, 그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정치인은 당시 독일 안에 없었다. 모두 히틀러의 먹잇감이 되었다. 실제로는 히틀러 역시 멋모르고 군중심리에 끌려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비자는 무엇을 말했는가? 법칙이다. 권력의 생리에 따른 통치의 편의 법칙이다. 통치의 제 1법칙은 쓰고 버리고 제 편한대로 한다는 거다.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말했는가? 역시 법칙이다. 정치에는 정치의 생리가 있고 그 생리대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군주의 냉혹함을 폭로했고 마키아벨리는 오히려 그 냉혹함을 옹호했으나 본질은 같다. 법칙대로 간다는 거다. 인정사정 없다는 거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라는 거다. 맞다. 대의명분이란, 옳고 그름이란 외교무대에서 우쭐대는 데나 소용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본질은 의사결정의 법칙이다. 대중 역시 의사결정의 편의를 따른다. 군주도 통치의 편의를 따른다. 오직 이 방법이 현장에서 먹히는가를 판단할 뿐이다.

 

  대중은 옳은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고자 한다. 옳고 그르고 간에 손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를 중요시 한다. 명품녀 김경아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손쉬운 목표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문제를 일으킨 방송국 Mnet을 공격하는 것은 어려운 목표다. 타블로를 공격하는 것은 쉬운 목표고, 전여옥을 공격하는 것은 어려운 목표다. 대중은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손쉬운 목표를 향해 움직이려고 한다. 교육개혁을 하는 것은 어려운 목표이고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대강 삽질은 쉬운 목표다. 스파르타식 교육은 당장 진학률을 높이는 쉬운 목표이고 참교육은 힘든 목표다.

 

  대중은 언제라도 쉬운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합의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사결정의 법칙이다. 그러한 구조를 드러낸 것이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다. 그들은 근대인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지성은 아니다. 그들은 고립되었고 숙주가 죽자 파멸했다. 체자레 보르자가 죽자 마키아벨리 역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군주론의 핵심은 철저하게 의사결정의 편의를 따르라는 것이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행각을 떠올릴 수 있다. 그가 조작하여 선전했기 때문에 멍청한 독일인이 속아서 히틀러를 따른 것이 결코 아니다. 독일인은 바보가 아니다. 그가 의사결정의 편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되고 말것으로 믿고 체념한 것이다. 선전이 먹힌게 아니라 선전의 방법으로 다른 의사의 등장을 봉쇄하여 의사결정의 편의를 추구한 것이다. 선전내용의 사실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선전이 한날 한시에 모든 독일인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선전은 그저 신호에 불과하다. 모든 독일인이 볼 수 있는 지점에서 신호탄을 쐈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중이 때로 독재를 원하는 것은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적어도 독재가 편하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실패한 경험 때문이다. 독재의 쓴맛을 보기 전에는 말이다. 장기적으로는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여 독재가 도리어 의사결정의 교착상태에 빠져버리는 난맥상을 보기 전에는 말이다. 독재자에 속아서가 아니다. 독재자의 거짓 선전을 전혀 안 믿으면서도 ‘아 이 방법 먹히겠네’ 하고 따라간다. 한 고조 유방은 숲을 지나다가 구렁이 한 마리 죽이고 와서 ‘적제의 후손이 백제의 후손을 죽였다’고 떠벌였다. 그 따위 거짓말에 넘어갈 바보는 천하에 없다. 민중이 그를 따른 것은 속아넘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유방이 말이 되든 안 되든 뭔가 방법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 양반은 뭔가 방법을 내놓는 사람이야. 아마 또 방법을 내놓겠지.’ 하며 그 방법을 기대하고 따라간 것이다. 무슨 수단을 쓰던 센세이션을 일으켜 만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뭔가를 터뜨리기만 하면 대중은 이심전심으로 담합하고 그를 따른다. 조조가 때로는 부하를 잔인하게 죽이고 때로는 부하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이중플레이를 펼쳤지만 부하들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으로 만인의 이목을 집중시켜 의사결정의 편의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건 물리법칙이다.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쇼만 정기적으로 벌여주면 다들 들떠서 그를 따라간다. 그곳에서 뭔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른거 없다.


  대중이 쉬운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역시 ‘반응하는 것을 따라가는 원리’ 때문이다. 고양이는 무조건 움직이는 표적을 향해 달려든다. 대상이 반응할 때 바깥뇌가 작동하여 지능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대상이 반응할 때 이심전심으로 작동하는 의사소통의 신호탄이 지속적으로 쏘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전이든 말든 상관없이 뭔가 지도부의 대응이 계속해서 일어나주기만 하면, 일단 신속한 의사결정이 일어나기만 하면, 설사 판단에 잘못이 있더라도 그 후과는 다음 단계로 미루면 되고, 오류를 시정하면서 계속 진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입바른 지식인이 나서서 옳은지 그른지 따지느라 의사결정이 일어나지 않고 시간이 지체되고 상황이 교착되면 모여든 군중이 흩어져서 결국 전멸하고 말 것이라는 본능적 두려움에 빠지고 만다. 갑자기 모여든 훈련되지 않은 군중은 무턱대고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반드시 흩어지게 되며, 군중이 흩어지는 일 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양떼는 무조건 숫자가 많은 쪽으로 모여들며 흩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


  농민반란군 지도자는 무턱대고 진군하는 방법으로 대오를 유지하며, 잔다르크도 마찬가지다. 보급에 신경쓰지 않고, 예상되는 모든 리스크를 무시하고 대책없는 신속한 공격만이 승리의 비책이 된다. 만약 제 자리에 머무르며 대오를 정비하기로 결정하면 군중은 반드시 흩어진다. 자전거는 균형을 잡아야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달려야만 균형이 잡힌다. 오합지졸도 이와 같아서 무조건 공격만이 내부에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 된다. 그러다가 전멸하게 된다. 대중의 행동은 잘못이지만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최소한의 본능적 합리성은 있다. 늑대의 공격을 받아 우왕좌왕 하는 양떼도 그렇게 무턱대고 무리짓는 방법으로 생존에 성공한 것이다. 지도자를 잃은 대중은 이성에 의존한 최선보다는 본능에 의존한 차선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최선은 소통에 의해서만 달성되는데 그 소통의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은 무작정 괴벨스의 신호탄을 따라 움직인다. 책략가는 유능한 어부가 물고기를 그물에 모으듯이 이를 악용하여 솜씨좋게 대중을 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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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객의 실패는 다음 단계의 대책, 그 다음다음 단계의 대책이 없이 자기 패를 전부 까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편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적 토대의 작용에 따른 시장의 권력을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막다른 길을 향해 치달았기 때문이다. 유가 출신의 공손홍은 임금을 거역하다가 한무제가 뜻을 굽히지 않자 즉각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고 바로 입장을 바꾸었다. 지조를 중시하는 유가지만 때로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노선을 바꾼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감춰둔 다음 단계의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임금의 결정이 옳건 그러건 간에 결국 또 문제는 일어날 것이고, 임금은 여전히 자기를 필요로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공손홍의 방법은 임금에게 두 갈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도한 에너지의 흐름에 올려태워 버리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건의하여 ‘이런 방법을 쓰면 됩니다’ 하고 알려주면 그 방법을 쓰고 난 다음에 신하를 죽이지만 계속 말썽이 일어나는 골치아픈 에너지의 흐름에 태워버리면 툴툴거리면서도 계속 그 신하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신하 없이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말의 재상 풍도(馮道)는 5대 10국 시대에 다섯 왕조 8개의 성을 가진 11명의 천자를 섬기며 수십년간 재상 자리를 지켜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지조없는 정치가라고 훗날 선비의 지탄을 받았지만 무난히 처세에 성공했다. 그의 술책은 무력으로 집권한 군주를 꼬드겨 문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새로 왕조를 열고 등극한 군주들은 거듭 바뀌는 왕조교체에 넌더리를 내는 백성을 회유하기 위하여 문치를 펼쳐 인심을 얻으려고 하다가 새로운 실력자의 무력에 넘어가기를 반복했고 풍도는 그때마다 새임금 편에 섰던 것이다. 이는 거꾸로 임금이 신하에게 토사구팽 된 격이다. 군주가 세객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듯이 그는 임금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렸다. 그러고는 ‘나는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했다’고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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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론은 질≫입자≫힘≫운동≫량 다섯 단계를 제시한다. 임금은 입자의 포지션에 해당된다. 입자는 힘보다 높다. 세객은 임금에서 이 길과 저 길 중에서 선택하게 한다. 이는 힘의 포지션이다. 이때 입자는 힘을 친다. 임금이 신하를 일회용으로 쓰고 버린다. 지식과 지성은 무엇이 다른가? 지성은 세력을 일구어 질의 포지션에 서는 것이다. 임금도 신하를 어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객의 위태로움은 힘의 포지션에서 입자의 포지션을 이용하려는 데 있다. 그럴 때 저승사자가 바로 등뒤에 따라붙는다. 질의 포지션에 서야 다음 카드와 다음다음 카드를 계속 내밀 수 있다. 시스템의 계속성을 부여하여 지속가능한 지배를 가능케 한다. 바로 그것이 지성이다. 일찍이 지식인이 많았으나 세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존심을 내세우다 화를 입고 권력을 원망하며 쓸쓸히 떠나갔다. 참다운 지성은 공자다. 그는 세력을 만들어 천하의 여론을 움직였기 때문에 임금도 어쩌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공자의 성공은 그의 사후에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나 공자는 생전에 그 토대를 닦았다.

 

  세객들이 주장하는 국가기강 확립, 부국강병책은 산업의 혁신과 맞물리지 않을 때 시스템의 계속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오자병법의 오기는 초나라 도왕을 도와 귀족을 억누르고 개혁을 추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임금이 죽던 날 귀족들의 반격에 화살세례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그가 도왕의 시체에 엎드렸기 때문에 화살이 오기의 시체를 관통하여 도왕의 몸에 꽂혔다. 새로 왕위에 오른 숙왕에 의해 오기에게  화살을 쏜 귀족가문은 몰살을 당했다. 오기는 죽으면서 복수했으나 실상 초나라 왕실을 돕고 팽 당한 격이다. 숙왕 역시 태자시절 오기를 좋아하지 않아 도왕이 죽자 오기는 바로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중국사에 매우 많다.

 

  조조와 이름이 비슷한 한나라 경제 때의 재상 조조(鼂錯) 역시 법가를 주장하여 개혁을 시행하다 죽은 인물이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후의 토지를 삭감하다가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은 재빨리 조조의 목을 잘라 반란군의 명분을 꺾어버렸다. 중종을 도와 개혁을 단행한 조광조의 운명도 비슷하다. 중종은 연산군에 의해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선비를 등용하였으나 선비집단이 세력화되자 임금은 변심하여 조광조를 죽였다. 문제는 조광조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임금에게 충성하며 자신이 토사구팽 당한 현실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의 한계다. 지성이 아니면 안 된다. 권력은 임금의 뜻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조광조는 그 권력의 작동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세력화 되어 질의 포지션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외부를 바라보는 것이다. 질은 사람의 머리 역할이다. 머리에 속하는 눈과 귀와 코와 입은 모두 외부를 바라보고 있다. 봉건시대의 제왕은 모두 군대를 기르고 외교를 구사하여 외부의 힘에 맞선다. 특히 유럽이 그러하다. 그러나 섬나라 영국과 역시 섬나라인 일본은 섬으로 고립되어 그 바라볼 외부가 없다. 그러므로 왕이 필요없다. 영국인들은 마그나카르타라는 것을 들고 와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일본 역시 이름만 기세좋게 천황이라 붙였을 뿐 막부에 의해 허수아비가 되었다. 여기서 내밀하게 작동하는 필연적인 구조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지식인 역시 근대 지식의 본고장인 유럽과 연계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질의 포지션에 도달하지 못하니 꾀를 내어 어떻게 임금을 이용해 볼 궁리나 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핍박하지 못해 안달하다가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되었다. 그들은 모두 바보가 되는데 성공했다. 공자가 성공한 이유는 유림이 질의 포지션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많은 군주들은 귀족들에 둘러쌓여 궁성에 고립되었다. 군주는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을 쓰려면 먼저 사람을 얻어야 한다. 그 사람이 차단되면 군주도 힘을 쓰지 못한다. 군주가 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실력자는 토호로 변질되어 중앙에 대항하기 쉽고 중앙의 실력자는 임금을 고립시켜 놓고 전횡하기 일수다.  유가는 과거제도의 방법으로 계속 신인을 등용하여 끊임없이 인물을 교체한다. 그것이 부단한 혁신에 따른 에너지의 흐름이다. 그 에너지의 흐름에 임금을 올려태우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여러 국가들이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었으므로 혼맥으로 이어진 왕실간의 연대가 그 외부를 바라보는 질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혼맥으로 이어질 국가들의 무더기가 없었으므로 유림에 의한 지속적인 혁신이라는 에너지 흐름이 질의 시스템 역할을 한 것이고 지성은 그 흐름 안에서 호흡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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