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虯는 규룡인데 새끼용이다. 새끼용은 장차 왕이 될 사람이며 곧 문종 자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방자한 글은 문종 본인이 지었을 것이 틀림없다. 군규쾌업은 세종과 문종이 쾌업을 이루었다는 의미다. 세종이 혼자 한글을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종이 감히 발칙하게도, 무엄하게도, 방자하게도, 오만하게도, 무례하게도 이런 역적같은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문종이 한글 창제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그런데 이 내용은 세종과 공동작업이라는 증거가 된다. 문종이 자신이 한글창제에 개입한 사실을 이스트에그로 숨겨놓은 것이다. 문제는 한글창제 시기다. 1444년에 창제했다면 최소 10년은 연구했을 것인데 1397년생인 세종이 40살이 넘어 한글창제에 매진할 수 있었을까? 한창 국정에 바쁜 임금이 말이다.
한글은 세종이 아이디어를 내고 문종이 실무작업을 맡았을 것이다. 문종이 스물한살 때가 1934년인데 이 시기는 한창 머리가 잘 돌아갈 나이다. 천재가 머리를 쓴다면 이 때가 적절한 타이밍이다. 원래 노벨상 받는 연구는 모두 20대 때 시작된다. 본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게 40살 넘게 먹은 임금이 국정에 바쁜데 그거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두루 고려한다면 세종과 문종의 공동작품이며 신하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세종이 내가 만들었다 닥쳐! 죽을래.를 시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나이 어린 동궁이 쓸데없이 한글창제에 간여하고 있으니 금지시켜라는 상소문이 많이 올라와서 세종이 난처했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반발을 찍어누르려면 임금이 다 내 작품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왕자들에게 임무를 줬고 세종의 아들은 다 똑똑해서 잘 해냈다.
세종 은 세조나 안평대군 등 왕자들을 성균관에 입학시켜 교육시키고 세조나 안평대군을 왕자시절부터 정사에 개입시켰다. 그 이유는 뭘까?
귀족들은 시야가 좁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왕은 조선전체를 보고 귀족은 끼리끼리 자기집단의 이해관계만 본다.
정치를 양반에게만 맡겨 놓으면 왕권이 약해져 조선후기같이 양반가문이 왕은 제쳐두고 힘쎈가문이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왕은 명목상으로 존재하고 외척가문이 죄지우지하는 조선말기.
그래서 세종은 왕자들을 활용했나?
왕은 시야가 넓고 조선 전체를 봐야하니.
지금 대한민국도 그렇지 않나?
대통령과 국민은 전체를 보고 국민의힘귀족은 자신들의 이익만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