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압도적인 허무와 싸우면서 실낱같은 의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숨을 이어가는게 인생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의 작은 전환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 사이에서의 커다란 도약이라야 한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는 자가 있다. 둘 사이의 나란함이 있다. 상호작용이 있다. 보이는 것은 자연이다. 보는 자는 인간이다. 둘 사이의 게임은 문명이다. 여기서 방향성과 기세를 찾아야 한다. 방향성이 진보라면 기세는 의리다. 진보는 함께 하고 의리는 개인의 몫이다. 자연과 인간과 문명은 원래 있는 것이고, 진보는 남들이 하니까 묻어가는 것이고, 의리는 남이 안하므로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서구사상은 진보를 가르치되 의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반대로 동양사상은 의리를 가르치되 진보를 가르치지 못했으니 피장파장이다. 미국식 히어로물과 일본식 허무주의가 망한 이유는 이야기의 결말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사느냐?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기는 외부에서 주어진다.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다. 모든 이야기는 히어로의 변형이다. 뭔가 힘을 얻거나 동기를 획득한다. 누가 나를 해코지 해서 내게 복수할 명분이 생긴다. 절대적 히어로냐 상대적 히어로냐의 차이뿐 본질에서 같다. 무언가 지갑을 주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난을 당하지만 영웅의 솜씨를 보여줄 찬스다. 결말을 짓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겉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주인공이 세상과 톱니가 맞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안해도 되는데 왜 하지? 히어로는 출동할 이유가 없다. 외계인은 침략해 오지 않았다. 내게 돌아올 몫이 없다.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재난이 찾아오길 기다려야 한다. 자고 일어났더니 큐브에 갇혀 있다거나, 무인도에 버려져 있다거나, 감옥에 갇혔다 하는 식으로 계기는 외부에서 주어진다. 캐스트 어웨이든 쇼생크 탈출이든 그러하다. 외부에서의 강한 힘에 의해 주인공은 어떤 낯선 공간에 결박된다. 탈출하는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항상 적이 선수를 치고, 운명이 선수를 치고, 주인공은 후수가 된다. 주인공은 나설까 말까 고민하다가 악당의 공격이 도를 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곤 한다. 내가 능동적으로 말을 걸어야 진짜다. 왜 항상 세상이 먼저 내게 말을 거는가? 남이 먼저 시비걸고, 함정에 빠뜨리고, 해코지를 하고, 거인이 진격해 오고, 외계인이 침략해 오고 하는건 시시하다. 내가 먼저 세상에 말을 거는 힘이 주어져야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것이 의리다. 유비가 가만있는데 장비가 와서 말을 건다. 오늘부터 네가 형 먹어. 관우녀석도 끼워주자구. 그것이 의리다. 성기훈이 딸을 만나기 위해 게임에 나서는건 헐리우드식이다. 타의에 의해 끌려간다. 조상우의 어머니와 강새벽의 동생을 챙기는 것은 먼저 말을 거는 의리다. 일본만화의 좋은 소재라도 한국인이 손을 봐야 완성된다. 한국인은 말을 걸 줄 알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가 꼬인 것은 일본이 말을 걸 줄 모르는 츤데레 민족이기 때문이다. 침략은 일본이 먼저 한 것이다. 미국에게 말을 걸 줄 몰라서 본의 아니게 진주만을 습격해 버렸다. 한국이 시비를 걸어준 것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이 아니면 일본은 지구와 겉돈다. 주인공 성기훈이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죽어줄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의리가 인류문명의 마지막 빈 칸을 채운다. |
아하...
20년을 서구인들을 만났지만 친구가 없다.
이방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본질적으로 외톨이이기 때문인걸 깨달았다.
미국에서 수많은 외톨이들을 봤고, 일본인들에게서 히키고모리를 봤다.
한국은 끊임없이 간섭하지만, 서로를 챙기는 문화적 힘이 있다.
아무래도, 중국 (한족이건 정복왕조건)이라는 거대제국에 대한 유일무이한 항전국가라는 역사.
냉전이후 중국의 대 약진에 의한 지정학적 조건
21세기의 전무후무한 기후변화보다 악취가 심한 지식인의 몰락 시기에
한국인이 가진 문화적 힘 (서양의 진보 + 한국의 의리)이 가진 양날의 날개.
다만. 인구 급감. 수도권 지가 폭등. 2가지를 잡아야 다음 대선도 민주당 몫.
수도권 지가폭등: KTX 비수도권노선 확충. 지방 거점도시를 동서 축으로 있는 작업.
인구급감: 좀 긴이야기지만, 저연령쪽 인구는 이민개방과 다문화결혼밖에는 답이 없고. 장기적으로는 저인구상에서의 국가 경쟁력을 제고할밖에. 공장자동화와, 노무 메뉴얼 확충.
미국과 서양이 좋아는 돈돈돈.
그들의 표현에 빠지지 않는 경제적 이득.
그러면서 시위를 하면 상점을 약탈하고 화염병을 던져 타인의 경제적 피해를 주는 서양과 미국.
한국에서는 촛불집회나 다른 집회 때 상점약탈이나 화염병이 던지기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상점가게 주인이 모르는 사람이더라고 집회시민이 그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상점주인과 집회인끼리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서로 돕고 싶은 마음
서양에는 이런 마음 없다.
옆나라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다.
또 시위를 막는 경찰들도 어려서 그들도 누구네집 귀한 아들이니
촛불시민들도 시위를 막는 경찰관에 물리적피해를 원하지 않으나
유럽시위할 때 보면, 독일이나 프랑스를 보면 이런 것 안 따진다.
영화가 그 나라전체의 정신영역이 도달한 위치를 보여준다면
미국영화는 영웅이 혼자 문제를 해결하고 시민을 문제해결에 끼워주지 않는다.
미국감독은 아직은 시민이 문제해결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보다.
아니면 시민을 문제해결에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보는 걸까?
각종 영웅시리즈 영화는 시민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웅이 문제를 해결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은 일상생활을 사는 것만 보여준다.
한국영화나 드라마는 문제해결에 시민도 끼워주어서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끝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봄에 끝난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은 심지어 노비까지 문제해결멤버로 나온다.
작가는 노비까지 문제해결 멤버로보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도달해야 할 위치가 어디인가?
영웅만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시민은 세상의 진실 근처에 가면 안되는가?
그러나 얼마전에 끝난 악마판사 작가는 욕을 먹어야 한다.
작가가 전직판사라는 데 시민을 싫어하는가?
드라마를 전체 다 보진 않았지만 화재로 주인공부모가 죽고 딸이 살아남는 데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인 그 딸은 어려서 자신이 화제의 원인제공자인지를 모른다.
그 비밀을 삼촌만 알고 있는 데, 작가는 왜 여고등학생에게 화재방화자로 지목했을까?
아직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여고등학생에게
'너는 원죄야'라고 말하는 작가의 의도는 힘없는 시민들 니들도 찾아보면
죄하나씩 다 가지고 있으니까 입닫고 조용히 살라는 것인가?
아뭏튼 작가의도때문에 16부작을 띄엄띄엄보다가 안 봤다.
증국은 돈으로 말을 걸고
러시아는 말을 타고
일본은 말을 안 걸고
북한은 밥을 안 먹고
한국은,
"두 유 노우 비티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