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원짜리 동전을 잃었다면 동전은 그곳에 있다. 잃어버린 자리를 중심으로 수색하면 된다. 그런데 혹시 동전이 사차원의 문을 통과하여 웜홀로 빠져나갔다면 어떨까?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동전이 나비로 둔갑해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도깨비가 몰래 낚아챘을지도. 타임머신을 따라 과거로 가거나 미래로 가버렸을지도. 개소리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개소리 하기 없기. 규칙을 정해야 한다. 진리는 그런 점에서 사유의 비용을 줄여준다. 물리적으로 연결된 부분을 중심으로 수색해야 한다는게 진리다. 연결되지 않은 것은 쳐내야 한다. 안드로메다 아저씨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세가 있다 한들 천국이 있다 한들 연결되지 않으므로 없는 것과 같다. 없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연결된 부분을 중심으로 논해야 한다는게 진리의 진정한 의미다. 사차원이든 웜홀이든 둔갑술이든 도깨비든 타임머신이든 연결되지 않는다. 아닌 것은 제거하자. 뻘짓을 제거하고 남는 부분을 확인하면 동전은 그곳에 있다. 동전이 그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혹시 모르잖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끝이 없다. 묵묵히 등잔 밑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은 그렇게 한다. 등잔 밑을 찾으면 되는데 절대 등잔 밑을 찾지 않는다. 체와 용의 문제 때문이다. 사유는 체에서 용으로 흘러간다. 중심에서 변방으로 가버린다. 마이너스 원리가 작용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무의 가지 끝으로 가버린다. 결국 계를 빠져나간다. 그들은 홀려 있고 낚여 있고 몰려 있다. 기세를 타고 있다. 흥분해 있다. 서울에서 잃은 것은 서울에서 찾아야 한다. 보통은 관심이 과천으로 가고, 성남으로 가고, 안양으로 간다. 서울에서 잃은 것을 의왕에서 찾고 있다. 물론 재수가 없다면 동전이 굴러가다다 지나가는 자동차 타이어에 붙어서 서울에서 잃은 것이 의왕에 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률을 계산해보고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 사유에도 마이너스 원리가 적용된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 중심으로 수색해야 한다. 직접 현장에 가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 범위 안에서 해결하기로 미리 약속을 해야 한다. 메뉴얼을 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나마나 음모론으로 가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건 훈련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의지할 수 있다. 자식에게 부모가 있는 것과 같다. 차가 있으면 도로가 있어야 하고 배가 있으면 항구가 있어야 한다. 사건이 있으면 연결이 있어야 한다. 사유가 있으면 진리가 있어야 한다.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기독교에서는 진리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쓰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인간들은 사유의 궁극적 출발점으로서의 진리를 말해왔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와 관련한 팩트라는 좁은 의미로 진리라는 단어를 쓰는 모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말할 때의 그것이다. 그림자의 배후에 빛이 있다. 그것이 진리다. 이면에 감추어진 것. 그것은 사건의 연결이다. 사유는 연결에서 시작된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때는 인사와 통성명부터 해야 한다. 연결상태를 확인하는 절차다. 연결이야말로 유일한 진리다. 진리는 연결이며, 구조는 연결방법이며, 엔트로피는 연결방향이며, 사건은 연결대상이다. 만약 사차원의 문으로 빠져나갔다면 역시 사차원의 문으로 쫓아가면 된다. 형태가 있는 사물의 연결로는 추적할 수 없으나 사건의 연결로는 끝까지 추적할 수 있다. 설탕이나 소금이 물에 녹아 없어진다면? 물속의 당도와 염분을 추적하면 된다. 사건으로는 어떻게든 추적된다. 웜홀로 도망쳤다면 웜홀로 따라가면 된다. 연결에는 체와 용이 있다. 체는 네거리와 같으니 연결의 중심이다. 용은 갈라진 가지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도덕, 윤리, 사랑, 정의, 도덕, 윤리 따위는 모두 용이니 이쪽을 이으면 저쪽이 끊어진다. 나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억압한다.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이기 십상이다. 용을 따라가는게 플러스다. 체를 따라가는게 마이너스다. 상대성을 따라가지 말고 절대성을 따라가야 한다.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그림자를 따라간 것이다. 용을 따라가지 말고 체를 따라가야 한다. 상대성을 따라가면 상대성이 된다. 절대성을 따라가야 절대 진리에 도달한다. |
실제로 구조론은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한다.
골치 아프게 썰을 풀지 않는다.
구조론이 간결한 것은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고 군더더기 없이 선언하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이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원인을 궁극이라 여긴다.
결국 진리는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소설 쓰는 사람들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진리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은유를 쓰더라도 시가 간결하고 명확하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고,
소위 말하는 사건이라는 것도 그냥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더라.
진리에 의지하라는 말도 그냥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나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