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에 환국한 백범은 즉시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순국 의사들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유해가 이듬해 6월에 돌아왔습니다. 김구는 부산에 내려가 추도식을 지낸 후 유해를 효창원에 안장했습니다. 그 옆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만들었습니다. 묘단에는 ‘유방백세(流芳百世, 꽃다운 향기 영원하리)’라는 휘호를 새겼습니다.
김구는 자기가 죽은 뒤에는 의사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암살당한 후 측근들은 그의 유지를 이행했습니다. 김구는 효창원이 ‘성소’가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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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현충원 같은 국가 추모시설이 없었습니다. 일제는 장충단을 퇴폐적인 공원으로 개조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들을 냉대하고, 그 묘역을 능욕했습니다. 동작동에 국군묘지가 조성된 이듬해, 효창원 독립운동가 묘역에서 효창운동장 건설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어떻게 독립운동가 묘소에 오락시설을 짓느냐?”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이승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현충원에 안장한 일을 두고, “소련 사람으로 죽었으니 카자흐스탄에 그대로 두었어야 했다”느니, “공산주의자를 왜 현충원에 묻느냐?”느니 하며 시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빼야 한다고 믿는 자가 아직 많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함께 반성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