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단순한 0과 1로 많은 정보를 담아낸다. 우주는 가장 단순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관념으로는 변화와 안정 곧 음과 양이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동과 정, 유와 강이 알려져 있다. 음은 나쁜 것이고 양은 좋은 것이다. 변화는 나쁜 것이고 안정은 좋은 것이다. 정은 좋은 것이고 동은 소란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막연한 생각이다. 반례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무엇보다 좋다, 나쁘다 하는 표현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과학적인 언어사용이 아니다. 내게 좋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다. 모두에게 좋은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주는 동적인 존재다. 생명은 동적인 존재다. 우주는 137억 년 전의 빅뱅 이후 끊임없이 전진해 왔다. 한시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움직여야 산다. 움직임이 끊어지는 즉 존재는 부정된다. 어떤 존재가 어떤 이유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바로 그것이 존재다. 존재하려면 외력을 이겨야 한다. 움직여야 외력과 싸워서 이긴다. 단단한 것이 겉보기로는 움직이지 않아도 내부적으로는 맹렬하게 움직인다. 단단하다는 것은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것이다. 기민하게 움직여서 순식간에 외력을 극복한다. 우주는 정이 아닌 동이며, 안정이 아닌 변화이며, 양이 아닌 음이며,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마이너스를 반대편에서 바라본 것이고, 정은 동과 나란한 것이며, 안정은 변화가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좋은 것은 이기는 것이고 좋지 않은 것은 지는 것이다. 노자의 이유극강을 떠올릴 수 있다. 변화가 안정을 이긴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 산 것이 죽은 것을 이긴다. 전통적인 관념의 음과 양, 정과 동, 유와 강은 외부에서의 피상적인 관찰이며 자연의 사실과 맞지 않다. 이기느냐 지느냐가 우주의 절대적인 기준이다. 부드러운 것이 이길 때도 있고 강한 것이 이길 때도 있다. 이기는 것은 산 것이고 지는 것은 죽은 것이다. 부드러운 것, 움직이는 것, 변화하는 것이 산 것이다. 에너지가 있는 쪽이 이기고 없는 쪽이 진다. 변화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머리와 꼬리가 있다. 이끄는 것과 따라가는 것이 있다. 갑과 을이 있다. 명령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가 있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이 있다. 산 것과 죽은 것이 있다. 의사결정의 우선순위가 있다. 이기는 것은 좋고 지는 것은 좋지 않다. 이기는 것은 살아있으므로 통제할 수 있고 지는 것은 죽어버려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향성이 있다. 방향성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방향성은 이기는 것과 지는 것, 산 것과 죽은 것의 방향이다. 머리가 되면 좋고 꼬리가 되면 좋지 않다. 머리가 되면 살고 꼬리가 되면 죽는다. 새로운 것은 머리가 되고 익숙한 것은 꼬리가 된다. 새로운 것이 좋다. 그곳에 권력이 있고, 이윤이 있고, 기세가 있고, 가속도가 있고, 플러스 알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에너지의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다. 자연의 어떤 상태는 에너지의 확산상태다. 변화는 한 점에서 시작되며 변화의 촉발과 함께 에너지는 그 한 점에 수렴된다. 변하고 있는 것도 관측자에 대해서 변하고 있을 뿐 자체적으로는 정지해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든 것은 사건에 대해서 확산상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에너지의 수렴은 5회에 걸쳐 일어난다. 이 말은 자연의 어떤 상태는 척력의 미는 상태라는 말이다. 민다는 것은 첫째, 계 내부에 에너지가 걸려 있다는 것이며 둘째, 내부에 질서가 없다는 것이다. 당긴다면 이미 질서가 있다. 인력은 잡아당긴다. 잡아야 당긴다. 잡으면 이미 질서가 있다. 무질서는 예측가능하지 않다.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질서와 무질서, 확산과 수렴, 척력과 인력, 대칭과 비대칭, 단절과 연결, 작용과 수용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결론은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이다. 산 것과 죽은 것이다. 여기에 순서가 있고 방향이 있다. 우선순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컴퓨터는 0과 1로 해결한다. 회로의 연결과 단절이다. 대칭과 비대칭으로 척력을 인력으로 바꾸어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연결하고 단절한다. 최초의 확산상태는 단절상태다. 닫힌계의 지정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어 계를 연결시킨다. 마이너스는 단절이다. 처음 에너지의 수렴에 의해 전부 연결된 상태에서 사건이 촉발되며 내부적으로 질이 끊어지면서 입자가 탄생하고, 입자가 끊어지면서 힘이, 힘이 끊어지면서 운동이, 운동이 끊어지면서 량이 탄생한다. 그 과정에 끊어짐이 보다 국소화된다. 중앙부의 단절에서 말단부의 단절로 바뀐다. 끊어지는 정도가 높아지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죄다 끊어지면 외력이 개입해서 다시 닫힌계를 지정하지 않는 한 사건은 진행될 수 없다. |
마이너스는 단절입니다.
닫힌계는 연결입니다.
처음 전부 연결된 상태에서 사건이 촉발되며
내부적으로 질이 끊어지면서 입자, 입자가 끊어지면서 힘, 힘이 끊어지면서 운동
운동이 끊어지면서 양으로 계속 연결의 형태가 바뀝니다.
질은 전부 연결된 상태, 거기서 마이너스, 량은 전부 끊어진 상태
즉 끊어진 정도의 증가=무질서도 증가라는 거지요.
그것을 종이를 펼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건의 각 단계는 시간축 상으로
전개되고 각 단계별 상호작용은 공간상으로 이뤄지는 그림을 그려보면? 될까요.
매우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외부에서는 시간적으로 드러나지만 내부에서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의사결정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1단계가 끝나고 2단계가 오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외부 관찰자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입자 밖으로 열린 에너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포함관계가 있으므로
질과 입자와 힘이 따로따로 있는게 아니고
동시에 찰나적으로 성립하지만
즉 질=입자=힘=운동=량이지만
질=입자+입자
입자=힘+힘
힘=운동+운동
운동=량+량인데
실제로는 이 중에 하나씩 소거됩니다.
질=입자 하나를 버리고 나머지 입자
입자=힘 하나를 버리고 나머지 힘
힘=운동 하나를 버리고 나머지 운동
운동=량 하나를 버리고 나머지 량인데
시간적으로 하나하나 진행하는게 아니라
공간적으로 범위가 좁혀지는 건데
그건 외부에서 관찰이 안 되므로
시간적으로 진행한다고 하는게 알아듣기 쉬운 거지요.
인간이 만든 장치에는 각 단계마다 조절기능을 두어
시간을 지연시켜 놨지만 그것은 인간이 통제하기 쉽게 만든 것이고
자연에서는 찰나적으로 빵 터져 버립니다.
거인의 진격이 이런 것에 대한 예시가 됩니다.
3중 성벽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뚫리면 전체를 포기해야 합니다.
질이 무너졌다면 입자 힘 운동 량까지 다 포기해야 합니다.
질이 무너졌으므로 입자를 지켜라. 이거 안 됩니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면 질이 변했지만 입자는 살아있다? 아닙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주춧돌은 빠졌지만 건물은 살아있다? 아니죠. 허물고 새로지어야 합니다.
반대로 량이 깨지면 운동을 추가하면 되고
운동이 느려지면 힘을 추가하면 되고
힘이 약해지면 입자를 추가하면 되고
입자가 약해지면 질을 추가하면 되고
질이 변질되면 포기해야 하고.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별도로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눈이 별도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활을 쏜다면 시위를 걸고 화살을 매기고 하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자연은 그런게 없습니다.
그냥 꽝 터지는 겁니다.
질은 활시위의 팽팽한 상태
입자는 화살을 놓는 지점
힘은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
운동은 화살이 날아가는 순서
량은 화살로 인해 사라진 에너지인데
인간의 눈이 사건의 어느 부분을 보느냐입니다.
범위를 넓게 보느냐 좁게 보느냐입니다.
에너지는 수렴되므로 처음 넓게 잡고 점점 좁혀가며 봐야 합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그 범위를 좁혀가는 절차입니다.
갑이 을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냐?
나는 죽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찔렀는데 쟤가 죽었다. 왜 죽었는지는 죽은 자에게 물어봐라. 난 책임없다.
이렇게 둘러대면 곤란하겠지요.
찌르면 죽을 것을 알고 찔렀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분은
찌르다와 죽다가 연결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질은 연결을 보는 것이고 량은 떼어서 각각 보는 것입니다.
찌를 때 죽을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질만으로 다 설명될 수 있고 량만으로 다 설명될 수 있습니다.
질로 설명하면 세부를 알 수 없고 량으로 설명하면 전모를 알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질로 설명하면 하나의 정부로 보는 것이고
량으로 설명하면 각 지자체의 집합으로 보는 것인데 둘은 같은 것입니다.
질=량이라는 거지요.
사람을 그냥 사람이라고 하면 질이고
남자와 여자의 집합이라고 하면 입자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나 남녀의 집합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 말이 그말입니다.
2라고 하는 것이나 1+1이라고 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게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일단 잉크를 절약합니다.
남녀의 집합이라고 하면 문장이 길어지니까.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면 통제하는 정도가 약해집니다.
남녀의 집합이라고 하는게 훨씬 더 세부적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사람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남녀로 갈아타야 합니다.
이런걸 따지자면 한이 없지요.
예, 알겠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사건의 규모로 볼 때 질-입자-힘-운동-량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전적으로 내포-외포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사건이 전개되는 닫힌계를 유지하는 한, 질-입자-힘-운동-량의 형태는 '사건의 시작점을 어디로 보느냐'의 시작점 선택 문제로 관찰자가 사건을 얼마나 잘 포착해서 찍느냐의 문제로 귀결돼 보입니다.
다시 구조론 무식자로 귀환했습니다..
종이를 펼쳐야 글을 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