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쇠다. 쇠는 단단할수록 좋다. 칼은 손잡이와 날로 나뉜다. 손잡이는 칼잡이의 몸과 닿고, 날은 적의 몸을 찌른다. 묵직한 칼일수록 적에게 더 큰 충격을 준다. 칼의 놀림이 빠를수록 적을 더 매섭게 몰아 부칠 수 있다. 날이 더 예리할수록 칼은 적의 몸속 깊숙이 들어간다. 한반도가 쥔 칼에는 손잡이가 없다. 누구라도 움직이면 서로 피를 본다. 힘을 줄수록 더 깊이 박힌다. 그 모양이 슬프다.
칼이 노래한다. 칼의 노래는 슬픈가? 기쁜가? 승리한 칼은 기쁜 노래를, 패배한 칼은 슬픈 노래를 부를까? 칼이 운다. 그것은 칼이 부르는 노래인가? 내가 부르는 분노의 살기인가? 적과 나 사이의 긴장, 갈등, 살의인가? 칼은 노래하지 않는다. 칼이 울린다.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듯, 그것은 적이 나타난 신호이다.
이순신 장군은 물었다. 적이 나를 ‘적’이라 하니 나는 적의 ‘적’인가? 적이 나의 ‘적’인가? 나를 베러 온 자가 날더러 적이라 한다. 베어야 한다. 그것은 배를 몰아와 조선을 도륙한 왜구만이 아니다. 왜구를 베고 나니 선종의 칼이 날아온다. 베어야 하나? 벨 수 없다. 왕의 두려움을 베어야 한다. 그 두려움이 장군이었다. 그래서 장군은 다시 바다로 갔다. 죽음으로 삶을 완성하러 갔다.
장군은 말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그것이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말했다. “외세 뒤에 숨으면 죽고, 자주 국방 하면 산다.” 당당하고 떳떳해야 죽어도 살 수 있다. 살아서도 죽은 것만 못한 삶에 허덕인다면 다시 떠올려볼 일이다. 이 정권의 오늘 대한민국의 백성들의 삶은 어떠한가?
북의 연평도 폭격에 해병이 전사하고, 민간인이 죽었다. 미군 항공모함은 아직 서해에 떠 있다. 남북한을 두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신경이 곤두섰다. 북한은 정권 세습에 위험한 도박을 건다. 남한은 전시 작전권도 없는 군미필 군통수권자와 지도자들의 허풍에 귀도 시끄럽고, 눈도 어지럽다. 누가 적인가? 모두가 적인가? 아니, 바로 당신이 적이다. 또 내가 적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