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런가?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어째서인가?
맨 처음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맨 처음 어느 레벨에서 관계를 맺을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역할 놀이에 중독되지 않고 정신차려서 상대방을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단추를 꿰는 것이 중요함은 알고 있었지만 왜 중요한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구조론은 모든 만남과 모든 낳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만남이 낳음으로 이어지기 위한 중간 과정, 맞서, 맞물리고 하나되는 과정까지 언급하고 있다.
우선 둘은 영혼으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상대와 마주해야 한다.
따뚯하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 조금씩 맞물려야 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완전한 사랑을 낳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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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여친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친이 처음 상대방과 관계를 맺을 때 관계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수준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관계의 깊이와 질이 달라지더라하는 이야기를 듣고 깜놀했소. 구조론적인 사유와 일치하였기 때문이오. 예를 들어 남: 나는 너의 보호자 여: 나는 피보호자, 이런 식으로 설정된 관계는 결국 나중에 둘 중 하나가 자신의 역할에 질리면서 파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오. 실패로 끝난 대부분 연애담들을 가만 보면 하나의 패턴이 있소. 처음 관계설정에서부터 "나는 연상, 너는 연하" "나는 남자, 너는 여자" "나는 한국사람 너는 외국사람" 등등 "나는~" 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제한하고 있고, 결국 가장 높은 정신의 수준에서 만나지 못한 채, 관계를 풀어나가기 쉽상이오. 자신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고 연상도 연하도 아니라는 깨달음에서부터 출발해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소.
물론 중간에 관계 속에서 서로 친밀감을 쌓고 신뢰를 쌓을 때는 서로의 역할이 부여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쌓으면서 의사소통의 속도를 빨리 하게 되지만, 언제 어느때라도 정신차릴 수 있어야 하오. 내가 지금 내 앞의 아무개라는 이름의 여자 혹은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사랑의 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오. 내 앞에 선 사랑의 신이 지금 완전한 사랑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오.
옛 인도의 수행자들 중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도 있었소. 그들은 완전한 사랑을 화두삼아 깨달음의 길을 걸었다오. 어찌보면 모든 연인은 사랑의 완전성을 탐구하는 수행자와도 같소. 그들이 가는 길에 구조론은 좋은 나침판이 되줄 것이오.
땡건
ahmoo
서로 만나 사귈 때는 그야말로 존중의 레벨에 머무를 때가 많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면 사소한 일상 때문에 존중에서 행불행(감정의 만족과 불만족)의 상태에 더 자주 머무르는 경우가 생기오.
누가 더 불만족이냐를 두고 다퉈봐야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고 오히려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오.
마음에 레벨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오.
설겆이나 청소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사랑을 통채로 저당잡히고 마는 경우인데
이런 어리석은 일이 벌어져도 관계의 전체 안목을 잃었기 때문에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오.
처음 가진 존중의 관점을 걸고 대타협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문제라오.
좋은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둘은 영혼으로 만나야 하고 한사람의 인격체로서 상대와 마주해야 한다는...말씀에 공감이 가네요.^^ 그리고 구조론은 정말로 좋은 나침판이 되줄 것임에 저도 믿어 의심치 않구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