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하여 점수 딸 기회는 일생을 두고 몇 차례 오지 않는다. 그 기회를 잡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잡지 못한 사람은 평범한 정치인이 된다.
어쩌면 노무현과 김근태의 차이는 거의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기회를 잡은 사람과 잡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은 운이 좋아서 기회를 잡았고 김근태는 운이 나빠서 기회를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천만에! 기실 그 차이란 것이 바늘끝 같은 차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도 하다.
앨 고어는 대선에서 지고 한때 체중이 20키로나 불어날 만큼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수염도 텁수룩하게 길렀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억울하게 지고 충격을 받아 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911이 발생하자 "부시는 나의 지휘관"이라고 공개선언 하고 충격받은 국민을 다독이며 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그 한마디로 다죽었던 앨 고어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앨 고어는 지금 부시를 맘껏 까대고 있다. 부시의 수명도 2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고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정치는 앨 고어처럼 해야한다.
그것은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후보로 당선되는 순간부터 노무현은 김근태의 지휘관이다. 당연히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어떻게 했는가?
한때는 보궐선거 선대위원장을 맡아 제법 움직이는가 싶더니 결국은 '김근태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고 삐쳐서 엇길로 샜다. 이것이 다시 살아난 앨 고어와 다죽어가는 김근태의 차이다. 그 차이는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로 하늘과 땅 차이다.
정치인은 위기에 강해야 한다. 위기에 그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정치는 반전의 드라마다. 위기야말로 기회가 된다.
911 테러가 났을 때, 그때가 바로 일생에 한번쯤 오는 기회이자 위기였다. 정치인은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때 고어가 "부시대통령은 나의 지휘관이다"고 선언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끝장이다. 만약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면 고어는 영영 매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어와 부시는 정적이지만 알 카에다와의 큰 싸움을 앞두고는 정적인 부시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부영에게는 김근태가 라이벌이었다. 이부영은 김근태를 피하여 한나라당으로 갔다. 이것이 전형적인 소인배의 선택이다.
김근태에게는 노무현이 그의 진로를 방해하는 라이벌이다. 그 라이벌에게 고개를 숙일 때 인간은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고어는 부시에게 숙이므로서 위대해진 것이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가?
민주주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민주주의란 신뢰의 힘으로 돈의 힘과 폭력의 힘에 맞서는 것이다. 평소에는 티격태격 하다가도 위기에는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힘이다.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왜 김근태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까?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먹여살려야 할 식구가 있었다.
김근태는 '평화개혁연대'라는 계보의 보스이다. 보스가 식구를 걱정하는 순간 약해진다. 혼자가 아니게 된다. 고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치사해 진다. 정치인은 이런 식으로 망가진다.
왜 미국에서는 되는 것이 한국에서는 되지 않는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언론과 시민단체의 감시가 없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잡고 압력을 넣는 제 3의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 네티즌이 움직여야 한다.
왜 김근태는 "어떤 경우에도 노무현은 나의 지휘관"이라고 선언하지 못하는가?
덧글 ..
한국의 아름다운 철새들 업글버전
http://www.ddanzi.com/ddanziilbo/88/88ch_702.asp
어쩌면 노무현과 김근태의 차이는 거의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기회를 잡은 사람과 잡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은 운이 좋아서 기회를 잡았고 김근태는 운이 나빠서 기회를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천만에! 기실 그 차이란 것이 바늘끝 같은 차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도 하다.
앨 고어는 대선에서 지고 한때 체중이 20키로나 불어날 만큼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수염도 텁수룩하게 길렀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억울하게 지고 충격을 받아 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911이 발생하자 "부시는 나의 지휘관"이라고 공개선언 하고 충격받은 국민을 다독이며 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그 한마디로 다죽었던 앨 고어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앨 고어는 지금 부시를 맘껏 까대고 있다. 부시의 수명도 2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고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정치는 앨 고어처럼 해야한다.
그것은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후보로 당선되는 순간부터 노무현은 김근태의 지휘관이다. 당연히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어떻게 했는가?
한때는 보궐선거 선대위원장을 맡아 제법 움직이는가 싶더니 결국은 '김근태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고 삐쳐서 엇길로 샜다. 이것이 다시 살아난 앨 고어와 다죽어가는 김근태의 차이다. 그 차이는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로 하늘과 땅 차이다.
정치인은 위기에 강해야 한다. 위기에 그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정치는 반전의 드라마다. 위기야말로 기회가 된다.
911 테러가 났을 때, 그때가 바로 일생에 한번쯤 오는 기회이자 위기였다. 정치인은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때 고어가 "부시대통령은 나의 지휘관이다"고 선언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끝장이다. 만약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면 고어는 영영 매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어와 부시는 정적이지만 알 카에다와의 큰 싸움을 앞두고는 정적인 부시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부영에게는 김근태가 라이벌이었다. 이부영은 김근태를 피하여 한나라당으로 갔다. 이것이 전형적인 소인배의 선택이다.
김근태에게는 노무현이 그의 진로를 방해하는 라이벌이다. 그 라이벌에게 고개를 숙일 때 인간은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고어는 부시에게 숙이므로서 위대해진 것이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가?
민주주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민주주의란 신뢰의 힘으로 돈의 힘과 폭력의 힘에 맞서는 것이다. 평소에는 티격태격 하다가도 위기에는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힘이다.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왜 김근태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까?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먹여살려야 할 식구가 있었다.
김근태는 '평화개혁연대'라는 계보의 보스이다. 보스가 식구를 걱정하는 순간 약해진다. 혼자가 아니게 된다. 고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치사해 진다. 정치인은 이런 식으로 망가진다.
왜 미국에서는 되는 것이 한국에서는 되지 않는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언론과 시민단체의 감시가 없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잡고 압력을 넣는 제 3의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 네티즌이 움직여야 한다.
왜 김근태는 "어떤 경우에도 노무현은 나의 지휘관"이라고 선언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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