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시대에 공자인가? 안희정이 호통 한 방으로 이재명을 보내버렸다. 그에게는 공자의 언어가 있다. 문재인에게는 공자의 예가 있다.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우리가 노무현에게 열광한 것은 그의 언어에서 공자의 일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역시 노무현에게서 공자의 일면을 보았을 뿐 나머지 면모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나고 동세서점의 시대가 왔도다. 서구와 동양은 무엇이 다른가? 1백년 전 서구인들이 인도와 말레이시아를 거쳐 중국 앞바다로 진출했을 때 통역겸으로 말레이시아인을 배에 태우고 다녔다. 그들의 동양인에 대한 이해는 맨손으로 밥을 먹는 인도인과 말레이시아인을 경험한 것이 전부였다. 한국인은 달랐다. 그들이 경험한 동양인과 다른 동양인을 만난 것이다. 만나기만 하면 일단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종이를 펼치더니 붓과 벼루를 가져와서 필담을 나누자고 하는데, 그들이 보여주는 유리병 따위에 눈독들이는 말레이인과 달랐다. 동양인이라면 집요하게 흥정하자고 매달리다 뒤통수치는 삐끼놈들 아닌가? 서구의 진귀한 물건에 관심이 없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동양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다. 한국인을 달리보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첫 대면은 이랬다. 곧 저질들이 떼로 몰려와 인종주의 관점으로 한국인을 평가하게 되지만.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들은 한국과 동양인을 다시봐야 하게 된 것이다. 70억 인류의 스승은 한 사람 뿐이니 그 사람은 공자다. 지식은 도서관에 있으니 굳이 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사는 지식으로 장사하는 사람일 뿐 스승이 아니다. 스승의 의미는 따로 있다. 김영사 박은주 사장의 스캔들을 떠올려도 좋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부자관계 이상이다. 그래야 스승이라 일컬을만 한 거다. 불교는 인연을 논한다. 무엇인가? 제자가 스승의 까르마를 상속하는 것이다. 스승에게는 특별한 무언가 있으니 그것은 불과 같다. 스승의 불씨가 제자에게로 옮겨붙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출가할 수는 없고 반드시 스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남방불교에는 비구니가 없다. 원래는 있었는데 중간에 대가 끊어졌다. 석가로부터 직접 수계를 받아 이어온 까르마의 맥이 단절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계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쯤 되면 필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느낌이 왔을 것이다. 족族이 있는 것이니 그 족에 들어야 한다. 제자弟子는 동생이라는 뜻이니 사제는 가족이다. 사제관계는 뜻이 아니라 피로 되는 것이니 생물학적으로는 호르몬이다. 호르몬이 나와주어야 의미가 있다. 인간은 세 번 태어난다. 한 번은 동물로 태어나고 두 번은 사람으로 태어난다. 인간의 꼴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 인간은 아니다. 외계인이 인간대접 받는 것은 인간과 말이 통한다는 전제를 깔아두었기 때문이다. 말귀를 못알아 듣는 놈은 일단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상호작용이다. 인간과 수평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물이라도 말귀를 알아들으면 상당히 대접을 해줘야 한다. 사람과 말이 통하면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었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리더가 되어야 한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어른이다. 어른은 누구나 될 수 있다. 그것으로 다되지 않는 것이니 거기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리더 호르몬이 나와야 리더다. 두목 침팬지는 다른 호르몬이 나온다. 혹돔은 원래 암컷인데 호르몬이 바뀌어 수컷이 된다. 여성이라도 마찬가지다. 모계사회의 여자족장은 주술과 저주로 무리를 통제한다. 신탁을 받거나 저주를 내리는 것이 그냥 되는건 아니고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 된다. 호르몬을 바꾸어 자기 몸을 변화시켜야 한다. 모계사회는 주술로 리더가 되고 부계사회는 권력으로 리더가 된다. 인간은 언제라도 권력을 탐하는 존재다. 그 권력이 반드시 가부장의 정치권력일 필요는 없다. 본질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노예가 되려는 욕망도 있다. 때로는 노예가 더 긴밀하게 환경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주인에게 복종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군대체질 말이다. 엄격한 위계서열이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한 사람이 있다. 공자 가르침을 잘못 배우면 그렇게 된다. 박근혜의 강박장애도 군대체질에서 왔으니 의전에 길들여져 노예가 되었다. 지식을 가르친 선생은 많으나 리더가 되는 방법을 가르친 진짜 스승은 드물다. 책을 읽는다고 스승이 되는게 아니고 호르몬이 나와줘야 리더가 된다. 그것이 공자의 인지의신예다. 이 순서를 따라야 호르몬이 나온다. 인仁은 타자를 포용함이니 타자를 포용하지 않으면 호르몬이 끊긴다. 어린이는 타자를 포용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함부로 타자를 포용하다가는 유괴범에게 끌려간다. 타자를 포용했다면 지배해야 한다. 제압당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지智다. 강도를 포용하거나 산적을 포용하면 망하는 거다.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포용하고 제압하여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면 다음은 팀플레이다. 그것이 의義다. 신信은 그것을 시간상에서 지속하여 가는 것이며, 예禮는 그것으로 결과물을 도출한다. 그리하여 완성된다. 무엇을 완성하는가? 만남이다. 인지의신예는 만남을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만날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예는 완성된다. 개는 개와 만나고, 새누리는 새누리와 만나고, 인간은 인간과 만난다. 박근혜는 최순실을 만나고 우병우는 김기춘을 만난다. 그러다 교도관을 만나 콩밥을 먹는 귀결이다. 인생의 목적은 만날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그러려면 교육이 필요한 것이며, 지식은 만남의 수단일 뿐 참된 본질이 아니다. 탄생하여 생물학적 만남과 배워서 지식의 만남은 작게 만나는 것이며 영혼의 만남이라야 제대로다. 운명으로 만나는 것이 영혼으로 만나는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만남처럼 말이다. 사람과의 만남은 작고 세상을 통째로 만나야 한다. 한 사람을 만나기 앞서 한 우주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두목 호르몬이 아니라 리더 호르몬이 나온다. 가부장 호르몬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나온다. 권력에 취하지 않고 그것을 넘는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로 규정했고, 예수는 인생을 죄罪로 규정했고, 공자는 인생을 락樂으로 규정했다. 인생이 고苦든 죄罪든 그것은 개인의 영역이니 자기소개병을 극복하지 못한 바다. 락樂은 위대한 만남에서 얻어진다. 혼자로는 결코 락樂일 수 없으니 만나려면 서로 통해야 한다. 통하지 않고는 만나도 만났다 할 수 없다. 어떻게 통할 것인가? 호르몬으로 통한다. 호르몬을 바꾸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호르몬을 바꾸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사람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다른 호르몬이 나온다.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당신의 호르몬이 결정된다. 참된 리더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 공자의 예는 제사지내는 예고 외국사신과 만나는 예다. 이 시대에는 다른 예가 필요하니 그것은 스타일이다. 스타일이 통하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다. 만나도 거죽을 만날 뿐 그것이 영혼의 만남은 아니고 운명의 만남은 더욱 아니다.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스타일은 예禮와 예藝로 만들어진다. 예藝는 예銳이니 곧 art다. art는 이음새이니 연결이다. 칼날처럼, 붓끝처럼, 볼펜이나 연필의 촉처럼 엣지가 예리해야 만날 수 있다. 예리한 엣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스타일이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어야 한다. 날이 뭉툭하면 그 낫으로는 풀을 벨 수가 없고 그 칼로는 파를 썰 수가 없다. 모든 연결부위는 예리하다. 당신 안에 예리함이 있어야 만난다. 전축의 바늘처럼 예리하고, 지식인의 문장처럼 예리하고, 신사의 매너처럼 예리하고, 연주자의 손끝처럼 예리하다. 반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의 부름에 호응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안테나가 살아있어야 한다. 촉이 있어야 한다. 예리함이 살아있어야 너와 나는 만나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왜 공자가 스승인가? 이러한 본질문제, 곧 호응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공자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름에 답해야 호응입니다. 역사의 부름, 진리의 부름, 운명의 부름에 그대 답해야 합니다. 석가의 고, 예수의 죄, 노자의 도는 소인의 신세한탄이요 처세술이라 할 것이니 그걸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노예의 덕목입니다. 부름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아부하는 것이니 그들은 리더가 아닙니다. 그들 속에 섞여 있어서는 마침내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