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가로되 삶의 미학적 스타일 연출이다. 항상 전체를 보고 부분에서 행동해야 한다. 어떤 100을 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주변 1000에 조치해야 한다. 주변에 전해지는 파급효과를 고려하여 선제대응하고 광역조치해야 한다. 중국은 인구가 많으므로 개인의 행동이 다수에게 가해지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사결정속도가 빠른 현대 한국인에게는 맞지 않다. 일일이 세심하게 살펴서 행동할 필요가 없다. 집단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면 일은 저절로 돌아간다. 공자의 예악스타일은 인구가 많아 참견당할 일이 많은 중국에 맞는 스타일이다. 눈으로 볼 때는 응수타진한다는 자세로 대략 겉만 두드려 보고, 내용을 들을 때는 빠르게 핵심만을 파악하고, 감정은 생기있게 표현하고, 폼은 조금만 오바하고, 말은 단도직입하고, 일은 능란하게 해치우고, 의심은 일단 접어두고 기다려보며, 분노할 때는 불벼락을 내려주고, 챙길 때는 뒷주머니에 슬그머니 하는게 21세기에 맞는 방식이다. 다른 점은 상대방의 2차 반응을 기다려본다는 거다. 중국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는다. 후흑학을 연마한 중국인은 절대 겉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반면 솔직한 한국인들은 금새 본심을 털어놓기 때문에 슬쩍 건드려서 의중을 떠보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면 수용하는 방법이라도 괜찮다. 일본인은 혼네와 다테마에로 이중행동을 한다. 겉다르고 속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슬쩍 떠봤는데 열렬히 반응하지만 그 반응이 가짜일 확률이 높다. 중국인은 한 술 더 뜬다. 특히 중국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 우한武漢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고서야 ‘사실은 지금까지 조직의 지시로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네.’ 하고 털어놓는다고 한다. 죽기 전에 털어놓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 “선을 보면 마치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슬그머니 행하고, 악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덴 듯이 잽싸게 피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기도 했고 듣기도 했다.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의를 행하여 도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보지는 못했다." 선을 행할 때는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나 해서 돌을 던져봤는데 호랑이가 냅다 달려와서 맞아버렸네. 저 호랑이가 불운했던 거지.“ 이 정도로 조심스럽게 말해주면 된다. 반면 악을 피할 때는 몸을 날려 잽싸게 피해야 한다. 그러나 도교의 입장에서는 이런 조심스런 선행조차도 위태롭다고 본다. 위선적인 자기연출이라는 거다. 은거하며 아예 나서지 않는 것도 고려해볼만하다. 은거는 공자에게 있어서 제 2의 선택이다. 그러나 은거해서 도에 이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딘가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공자도 은거를 고려했지만 은거하지는 않았다. ###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말하되 “시詩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예禮를 공부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다.” 시詩는 말을 돌려하는 중국인 특유의 문화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회의 중에 면전에서 부하직원에게 꾸지람을 하면 체면을 깎였다며 밤에 칼들고 쫓아온다는 설이 있다. 부하직원이라도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혼내지 않고 따로 불러서 타일러야 한다. 정면으로 거론하면 안 되고 시詩를 논하는척 하며 비유로 말해야 한다. 감독이 선수를 꾸짖지 못하므로 중국 축구팀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출신 감독은 외국인이므로 체면을 깎이면 보복하는 법칙에서 예외가 된다. 춘추시대에 중국에는 많은 소국들이 있었다. 제나라 환공이 70국을 정복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논어에도 사방 50리 정도면 국가로 쳐준다는 말이 있다. 중국의 문화는 소국들 사이에서 사신으로 오가는 외교관의 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원래 외교관은 말을 돌려서 한다. 자리배치나 얼굴표정이나 이런 것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아베와 악수하는 시진핑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 제 17편 양화陽貨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명언이다. 노무현도 변하지 않고 이명박도 변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선거운동 할 때 조금 변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선수를 치므로 변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뒷북을 치므로 변하지 않는다. ### “예禮라 예禮라 하지만 그것이 어찌 옥이나 비단이겠는가? 악樂이라 악樂이라 하지만 그것이 어찌 종과 북이기겠는가.” 예禮는 외교관의 매너일 뿐 예물로 바쳐지는 옥이나 비단이 아니다. 악樂은 미학적 스타일이지 연주되는 악기가 아니다. 예악은 궁중의 교양이지 형식적인 선물이나 공연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면 약해져서 귀신을 겁내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부족민의 지나친 종교행동으로 나타난다. 마녀사냥이나 매카시즘이다. 혼자 고립된 양치기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친다. 혼자 고립된 부족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귀신을 무서워한 끝에 마녀사냥에 나서 눈에 보이는 피해자를 생산해낸다. 이를 막으려면 인간관계를 긴밀하게 해야 한다. 그 방법은 예악이다. 예악을 통해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섞여 있으면서도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 예악이 없는 상태에서는 흩으면 미워하고 모으면 싸운다. ### “향원鄕原은 덕을 해치는 적이다.” 향원鄕原은 지방에서 나름 인기를 얻은 사람이다. 헛된 명성을 탐하여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법륜이나 강신주의 부류다. 그들은 변방에 있으면서 중앙을 치지 않고 비주류의 주류가 된다.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나 힐링서적을 쓰는 자도 향원의 변종이라 할 수 있다. ### “큰 길에서 듣고 골목길에 이야기하면 덕을 버린다.” 베갯머리 송사와 같다. 중요한 국가대사를 주변인물과 논한다면 위험하다. 서울시장 출마여부를 아버지에게 문의하는 안철수 짓이 아닌가? 큰 일은 열린광장에서 큰 인물들과 논해야 한다. ###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니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사람에게는 어진이가 드물다.” 보려고 하지 않고 보이려고 하는 자는 연출하는 자다. 교회목사 특유의 얼굴표정을 떠올릴 수 있다. 억지로 웃어서 생기는 눈가주름이 세 줄이나 나 있다. 정치인이 말을 현란하게 꾸며 대중의 격동시키려는 한다면 더욱 고약하다. 영화라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관객을 울리려고 하는 윤제균 영화는 보지 않는게 좋다. “나는 말하지 않겠다. 보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성되니 하늘이 무슨 말을 보태겠느냐?” 공자의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해명하고 있다. 공자는 배움을 자연법칙에서 구한다. 하늘이 작作하니 인간은 술述한다. 사실 공자는 대단한 진보주의자다. 단 그 진보의 근거를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고 자연의 진리에서 찾을 따름이다. 공자의 이런 부분을 왜곡하여 ‘침묵은 금이다.’ 하는 식으로 몰아간다면 고약하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존엄을 다치기 때문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지, 힘들어도 견뎌라'거나, '남 신경쓰지 말고 내 한 몸만 챙겨라거나' 하는 식의 대증요법은 상처를 더 깊게 할 뿐입니다. 설사 그것으로 행복해졌다 해도, 왜 불행이라는 손님이 나를 방문했을까 하는 그 업무는 처리되지 않은 것입니다. 불행이 그대를 방문한 것은 그대에게 줄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인의 고통은 해방의 임무 때문이고, 독재치하의 고통은 민주화의 임무 때문입니다. 그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코 불행을 벗어날 수 없으며 행복하다 해도 그게 사실은 미친 겁니다. 임무를 해치워 존엄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인류라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가라는 당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깨달아야 합니다. 헬조선의 답은 탈조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