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한창 철학적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가? 당시에 나는 생존이라는 기준을 세웠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외부에 의해 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인류의 리스크를 줄여서 내가 급사할 확률을 줄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는 황당한 것이다. 생존이 목적이라면 생존주의 서적부터 사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러기는 싫었다. 어쨌든 나는 당시에 이 논리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당장 사는 것과 인류의 문제든 우주의 문제든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결국 관련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그 결론은 형식적이다. 그렇지마는 생존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했다면 의미있는 것이다.
김동렬
거북이는 평생 등껍질을 벗을 수 없고
물고기는 평생 물을 떠날 수 없고
인간은 주어진 팔자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존이 목적이 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절대 벗어던질수 없는 거북이 등껍질은 진보입니다.
인간을 피곤하게도 하고 설레이기도 하는 것은 계절의 변화이고 환경의 변화입니다.
계절이 없는 곳으로 갈수도 없고 변화가 없는 곳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내가 가만 있어도 계속 게임을 걸어오는 데는 당해낼 장사가 없습니다.
게임을 이기거나 게임에 지고 투덜대거나 뿐입니다.
게임에 이기는 방법은 파도가 오는 것을 예측하고 파도를 타고 넘는 것입니다.
그게 진보라는 거지요.
입시든 취업이든 결혼이든 사업이든 게임입니다.
내가 게임을 걸지 않아도 상대가 지분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내가 게임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내가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 워터 해저드와 벙커를 곳곳에 배치해 놓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화라면 내가 변화를 설계하고
세상이 게임이라면 내가 게임을 설계하고
세상이 운명이라면 내가 운명을 설계하고
그것만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나머지는 죄다 허당.
내가 성공했네 출세했네 마누라가 예쁘네 자식이 서울대 붙었네 해봤자
누가 물어봤냐고?
인생은 죽거나 아니면 이기거나.
죽거나 아니면 게임을 갈아타거나.
죽거나 아니면 게임을 설계하거나.
생존이 기준이 된다면 이미 남의 게임에 선수로 뛰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건 내 게임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호르몬은 유전자가 준 것이지 내가 발명한게 아니거든요.
신이 나를 경기장에 몰아넣으면서 씌워준 굴레이자 핸디캡.
검투사처럼 관중을 위해 싸워야 한다면 그게 비극.
자유를 얻은 검투사들이 맨 먼저 했던 짓은 로마인을 잡아다가 검투경기를 시킨 것.
이 게임을 탈출하는 방법은 다른 게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경기장에 가두고 튀는 것 뿐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