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 전쟁
갈등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그런 소원은 결코 이룰 수 없다. 세상은 사람의 뜻대로 그렇게 만만하게 돌아가주지 않는다.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로또 잿팟은 잠시 문제를 미뤄둘 뿐이지 문제 자체를 없애주진 않는다. 강제로 모든 문제를 거세한 삶은 맥동을 멈추고 좀비처럼 변하고 만다.
신약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劍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예수는 평화지상주의자가 아니다. 평화와 행복을 치장하는 종교는 거짓을 파는 장사꾼이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은 행복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샘솟는 기대와 설렘이 사람을 살게 한다. 행복이라는 것을 얻으면 가슴이 뛰기를 멈춘다. 가슴이 뛰지 않으면 삶도 멈춘다. 이 세상은 평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심장을 뛰게 할 문제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독재시대가 평화로웠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하였기에 사회는 혼란을 통제하고 표면적으로 평화라는 포장지를 씌워놓을 수 있었다. 그러한 평화는 가짜다. 사람들은 끼를 표출하지 못했고 주장을 펼지지 못했으며, 숨을 쉬지 못해 심장 박동은 점차 느려졌다.
부단한 투쟁을 통해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삶이다. 사회도 그렇다. 독재시대는 독재권력이 균형을 잡는다. 민주주의가 되면서 권력이 분산되었다. 무주공산을 먼저 차지하겠다고 서로 목청을 높인다. 독재 호랑이가 살던 시대에 조용하던 여우들이 컹컹대며 저마다 으스대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차원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저마다 자신들의 끼를 발산하고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부딪히고 충돌한다. 도처에 권력의 위계가 생겨나고, 그것을 부수고 흔들려는 시도들이 일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명분없는 주장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끼의 발산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명분이 있어야 주장에 힘이 실리고, 타인에게 영감을 주어야 끼의 발산은 멀리 퍼져나간다. 명분과 명분이 부딪히거나 서로 손을 잡기도 한다. 그렇게 세력을 만들어 총성없는 전쟁의 대열이 만들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의 통치는 거버넌스governance로 표현되고 있다.
거버넌스는 다양한 행위자가 통치에 참여 · 협력하는 점을 강조해 '협치(協治)'라고도 한다. 사회가 국제적인 교류가 중요해지고 다중의 이해관계 조정이 더욱 복잡다단해지면서 민관이 어우러지는 협력을 통한 문제해결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협치의 취지와 의도와는 다르게 실제로 현장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공공과 민간의 이해와 명분이 큰 틀에서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행정 부처와 부서별 이해와 집행 절차를 조화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 영역과 협력은 더욱 조심스럽게 만든다.
이런 뜻에서 거버넌스 또한 전쟁이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명분이고, 명분을 통해 각자의 벽을 허물어내는 과정이 그리 예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박동을 감지한 사람은 거버넌스 전쟁의 리더가 될 수 있다. 우리 삶의 본질이 그렇다. 세계라는 대양 앞에 돛을 펼친 선장의 가슴 뛰는 마음을 가져야 모두가 이기는 거버넌스 전쟁의 승전보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